전출처 : 밀키웨이 > 낭만적 현실주의자 바바라 쿠니(Barbara Cooney)

 

아이가 어렸을 때, 우리말로는 ‘수목원’이라고 번역하면 될 듯한 ‘Nature Center’에서 하는 ‘그 때 그 시절’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6-25때 경험을 해 보세요’하는 프로그램에서 꽁꽁 얼어붙은 주먹밥을 먹어 본다면 참 마음이 아프겠지만, 바바라 쿠니 Barbara Cooney 미국이란 동네는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한 것 외엔 ‘외적의 침입’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옛날 생활 경험 여행도 그저 한가하고 재미날 뿐이지요.

아이는 손으로 돌려야 하는 ‘짤순이’에 빨래도 넣어 짜 보고, 옥수수알을 분리해 내는 기계에 여러 색 알이 단단히 박혀 있는 옥수수도 연신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물론 주변에는 한 150년 전쯤 되었을 듯한 그 때 그 시절 옷을 입은 아주 아주 촌스런 아줌마와 아이가 조그만 아시아 아이를 쳐다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바바라 쿠니(Barbara Cooney)의 사진을 보면서 그때 그, 완벽한 촌아낙네가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햇볕에 탄 동그랗고 붉은 얼굴, 땋아서 한바퀴 돌린 머리, 일찌감치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칼, 그리고 100% 면임에 틀림없는 질박한 윗도리까지도!

 

 

 

도날드 홀 (Donald Hall)이 글을 쓰고 이 아낙이 그림을 그린 『달구지를 끌고 (Ox-Cart Man)』에서 저는 남의 나라 그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깊어가는 10월에 한 해 동안 온 식구들이 애써 일한 것들을 소가 끄는 달구지에 실어 큰 마을의 장터에 내다 팔기 위해 농부는 언덕을 넘고 계곡을 지나 시냇가를 따라 걸어가지요. 그의 여행길을 작가는 아주 세세하게 묘사해냅니다. 가을이 아름답게 내려앉은 첩첩이 겹쳐 있는 둥근 산, 빨간 색 외양간, 하얀 색 교회, 노랗고 하얀 집들, 돌담, 단풍든 나무, 하늘색이 그대로 비치는 호수, 그리고 좁다란 노란 길…….

열흘 만에 도착한 포츠머스 마을의 장터는 길도 널찍하지요. 그곳에서 그는 4월에 깎아 두었던 양털과 아내가 만든 숄과, 딸이 짠 벙어리 장갑과, 모두 함께 만든 양초와, 직접 쪼갠 널빤지와, 아들이 부엌칼로 깎아 만든 자작나무 빗자루와, 감자와 사과와 꿀과 단풍나무 설탕과 거위털 한 자루를 다 팝니다. 그것만 파나요? 단풍나무 설탕을 담아 간 나무 상자도 팔고, 사과 통도, 빈 달구지도, 소와 멍에와 고삐도 다 팔지요.

이제 두둑해진 주머니……. 농부는 장을 봅니다. 딸에게 줄 수예 바늘, 아들에게 줄 주머니칼, 식구들 모두가 나누어 먹을 사탕을 새로 산 무쇠솥에 넣고 그 솥 손잡이에 막대기를 걸어 어깨에 척 걸치고는 남은 돈을 주머니 안에 넣고 그는 다시 여러 농장과 마을을 지나, 언덕을 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옵니다. 도합 이십 일이 걸렸을 그 길의 나무들은 이제 잎을 다 떨구었습니다. 저녁 서리는 허옇게 내렸는데, 하늘에는 푸른 빛, 붉은 빛 저녁 놀만 화려하군요. 작가는 너무나도 섬세하게 펜실베니아 산 속에는 겨울이 빨리 온다는 것까지 그림에 다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식구들은 겨우내 일을 하지요. 농부는 송아지에게 씌울 새 멍에를 깎아 만들고, 널빤지를 켜고, 농부의 아내는 천을 짜고, 딸은 아버지가 사다준 수예 바늘로 수를 놓고, 아들은 주머니칼로 빗자루를 만들고……. 4월에는 양털을 깎고, 5월에는 감자와 순무와 양배추를 심는데(그 페이지에 나와 있는 사과나무 꽃 그림이 기막힙니다) 뒷마당에서는 거위들이 부드러운 깃털을 떨구지요. 이렇게 뉴잉글랜드 농부의 한 해를 한 바퀴 돌아 그려낸 작가는 이제 그림의 배경을 매사추세츠 주의 암허스트 (Amherst)로 옮깁니다.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라는 시의 제목만 겨우 기억하고 있는 제게, 참 오랫만에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이란 시인이 그림책을 통해 모습을 보여 주는군요.

 

 

 

마이클 베다드(Michael Bedard)가 글을 쓰고 바바라 쿠니가 그림을 그린 『에밀리 (Emily)』라는 제목의 이 책의 첫장에는 백합 알뿌리가 보입니다. 봄이 되면 꽃으로 피어날 알뿌리는 자신이 죽고 난 뒤 많은 사람들에게 뛰어난 시인으로 사랑받는 에밀리 디킨슨을 뜻하겠지요.

이 책의 화자는 ‘신비의 여인’ 과 같은 동네에 사는 어느 꼬마 여자애입니다. 파란 겨울 외투를 입고 빨간 장갑을 낀 아이가 눈썰매 줄을 잡은 채 눈 속에 서서 길 건너편 노란 집을 쳐다 보지요. 거의 20년 동안 자기 집을 떠난 적이 없어 미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듣는 그 여자는 이 꼬마에게는 그 누구도 아닌 ‘에밀리’입니다.

어느 날 피아노를 치는 엄마 앞으로 편지가 한 장 들어오지요. 아파트 현관에 우유투입구가 있듯이 이 시대에는 현관에 우편 구멍이 있군요. 그 편지는 바로 그 신비의 여인에게서 온 초대장이었어요. 납작하게 말린 꽃이 동봉된 편지에는 “저는 마치 이 꽃과도 같답니다. 당신의 음악으로 저를 소생시켜 주세요. 그 음악이 저에게 봄을 가져다 줄 거예요.”라고 씌어 있었지요. 엄마와 아이는 그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아이의 호주머니에 뭔가 불룩한 게 들어 있군요.

그 집으로 들어가니 동생 아줌마가 접대를 하고 하얀 옷을 입은 언니 아줌마는 바람처럼 2층 계단을 돌아 올라가 버립니다. 엄마가 연주를 하는 동안 아이는 계단을 올라가 계단 위에 앉아 있는 언니 아줌마에게 다가갑니다. 그 아줌마는 눈처럼 하얀 옷을 입고 종이와 연필을 들고 있었지요. 아이는 그 아줌마에게 봄을 내밉니다. 뭐냐고요? 바로 백합 알뿌리 두 개였지요. 아줌마도 급히 종이에 뭔가 써서 아이에게 내밀지요. ‘아마 머지않아 둘 다 꽃이 필 게다.’ 하며. 물론 마지막 장에는 새하얀 백합꽃과 에밀리 디킨슨의 자필 시가 나란나란 나와 있습니다.

작가의 그림은 아주 세밀해서 노란 불이 따스한 벽난로, 그 위의 촛대 둘, 특이한 모양의 빨간 셰리주 병과 잔, 은쟁반, 레이스, 고색창연한 시계, 섬세한 장식의 의자 등이 아주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시인의 글씨는 상당한 악필이군요. 천재는 악필이라는 것을 지금은 믿기로 하겠습니다. 작가는 말하지요. ‘나는 알고 있는 것만 그릴 뿐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아낙은 에밀리 디킨슨이 살던 집과 길 건너 집을 조사하고 스케치하기 위해 암허스트에도 다녀 왔군요.

억센 시골 아낙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섬세하지요? 증권업자인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1917년에 태어난 바바라 쿠니는 복 받은 셈입니다. 그 시절에 어머니의 방에는 물감, 붓, 종이 등 그림 재료가 풍부했으니까요. 거의 반세기 이후에 태어난 저도 갱지를 연습장으로 썼고 어쩌다 맨질맨질한 하얀 종이가 생기면 안 쓰고 보물처럼 아껴 두곤 했는데 말이죠.

 

                     

 

그녀는 스미스 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후에 뉴욕 대학에서 동판과 에칭을 공부합니다. 색깔을 아주 좋아하는 그녀가 할 수 없이 동판과 에칭에 시간을 쏟게 된 이유는 편집자가 그걸 요구했기 때문이었지요. ‘무채색으로 한 번 해 보세요.’

그러나 좋아하는 것을 해야 그림도 잘 되는 법. 목탄이나 동판, 에칭을 이용한 그림들은 별 조명을 못 받은 반면 자신이 좋아하는 ‘full colors’로 그린 『제프리 초서의 챈티클리어와 여우(Chanticleeer and the Fox)』로 1959년 칼데콧 메달을 받았고, 앞서 말한 뉴잉글랜드 농부의 생활을 그린 『달구지를 끌고(Ox-Cart Man)』로 또 칼데콧 메달을 받았지요. 그밖에도 『바구니달(Basket Moon)』 『신기료 장수 아이들의 멋진 크리스마스(The Remarkable Christmas OF THE COBBLER'S SON)』 『미스 럼피우스(MISS RUMPHIUS)』에 그림을 그렸지요.

 

     

 

바바라 쿠니의 특징은 아무래도 정확한 세부 묘사와 최대한 자연색에 가까운 색을 쓰는 데 있지요. 그녀는 『달구지를 끌고 (Ox-Cart Man)』을 최대한 진실성 있게 그리기 위해서 머리 스타일이나 의상뿐 아니라 풍경과 건물 세트까지 만들어 보았다고 합니다.

스스로도 ‘나는 낭만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상당히 현실적이다. 나는 오직 내가 알고 있는 것만 그렸다. 실은 난 다른 방법으론 그리지를 못한다. 나는 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모호한 선으로 무언가를 암시하지도 못한다.’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사실을 사실대로 그릴 수 있는 것도 미국이란 나라의 역사가 짧고, 또 자료와 역사적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는 새 천년 들어와 저 세상으로 일터를 옮겨갔습니다. 지금쯤 하늘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며 정밀화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글쓴이 서남희 - 웹진 [열린 어린이]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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