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밀키웨이 > 인물 사진작가로서의 루이스 캐럴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사진이란 걸 처음 배우려고 카메라를 구입한 1856년, 그의 나이는 스물 넷이었고 사진이 처음 발명된 지는 17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이미 미국에서만 매년 삼백만 장이 넘는 상업 사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게레오타입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은 상상을 초월했다. 흥행사 출신의 프랑스인 다게르는 발명부터도 그랬지만 그 상업적 가치를 활용하는데도 영국인들보다 한 발 더 빨랐다. 소위 상업 사진과 예술 사진의 갈 길은 시작부터 확연히 갈라졌다. 당시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던 방식은 영국인 탈보트가 발명한 칼로타입(calotype)이었다. 이것은 다게레오타입에 비해 선명도가 떨어지는 대신 복제가 가능하고 예술적인 효과를 추구하는데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1850년대의 사진은 고가의 장비 말고도 상당한 기계, 화학 지식을 요구하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성가신 취미는 게으른 귀족들에게 맞지 않았다. 영국에서 사진술을 가장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계층은 지주, 젠트리, 고학력 엘리트들이었다. 이제 막 크라이스트 처치의 전임 강사로 임명되어 안정된 지위와 수입을 누리게 된 도지슨 또한 이 비싸고 쿨한 유행에 합류했다. 당시 유행에 합류한 대부분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복잡한 기술과 값비싼 장비라는 벽에 부딪쳐 좌초하고 만 것과 달리, 그는 학교 내에 개인 암실과 스튜디오까지 차릴 수 있는 호사스런 이점을 살려 25년에 걸쳐 꾸준히 수천 장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초상 사진에 있어 도지슨은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과 함께 19세기 사진사에 중요한 양대 작가로 꼽힌다.

사진 촬영은 여러 면에서 도지슨의 성향이나 욕구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평소 미술과 연극을 비롯한 시각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 그림을 그려 보려고 여러번 시도했지만 일찌감치 자기가 미술에 소질이 없음을 깨달았던 그에게 사진은 매력적인 대체물이었다. 심한 편집증 증세를 보이는 이 까다로운 수학자에게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현상과 인화의 과정이 성격에 잘 맞았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추측은 렌즈 속에서 아래위가 거꾸로 되고 정착액 속에서 흑백이 전도되는 영상의 마술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쓴 수학자의 감성을 건드렸으리라는 상상이다.

그에게 사진은 한번도 취미를 넘어서 본 적이 없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취미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사진기나 화학 약품의 선택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채택한 사진술은 당시 다게레오타입과 칼로타입의 장점을 취합해 새로 개발된 콜로디온 습판법(collodion wet-plate)이었다. 이는 유리판을 코팅하는데 매우 숙련된 시간 조절과 섬세한 기술을 요하는 까다로운 방법이어서 대부분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기존의 종이판을 이용한 기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매사에 완벽을 기하려는 그의 성격은 사진의 기술적, 미적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특히 종이판을 이용한 칼로타입에 비해 콜로디온은 사진의 선명도를 크게 높여 주었다. 세부적으로 섬세하고 명료하면서도 완벽한 자연스러움이야말로 그가 추구한 이상이었다.

그런 미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택한 피사체는 주로 인물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초상 사진
에 주력했다. 사진술이 아직 새로운 기술로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당시에 주변에서 사진찍을 자원자를 구하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사진을 찍을 줄 안다는 것은 당시에는 유명인사를 만날 수 있는 보증수표로 통했다. 여기에 옥스포드 대학 교수라는 도지슨의 사회적 위치가 이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도지슨은 그런 기회를 열성적으로 활용했다. 마이클 패러데이, 존 에버렛 밀레이, 알프레드 테니슨 등의 많은 유명인사의 사진은 그렇게 해서 찍혔다. 특히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사진을 찍기 위해 도지슨이 알음알음으로 몇 번에 걸쳐 읍소한 일은 유명하다. 그는 유명인사들의 사진 밑에 그들의 싸인을 받아 꼼꼼이 수집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훌륭한 사진들은 대부분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의 가족과 개인적인 친구들을 찍은 것들 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진가와 피사체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뛰어난 보석들은 뭐니뭐니 해도 어린 친구들을 찍은 작품들이다. 사실 사진작가로서 도지슨의 유명세는 주로 이 어린 소녀들의 사진에 기대고 있다. 전체 인물 사진의 약 반수를 차지하는 어린이들의 사진들은 당시 흔히 그랬던 것처럼 뻣뻣하고 경직되어 있지 않다. 그는 사진기 앞에서 오랫동안 부동자세를 취하기 위해 당시 스튜디오에서 흔히 사용하던 머리받침대같은 것을 거의 쓰지 않고, 어린이들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많은 지인들은 기꺼이 자기 아이들을 그의 카메라 앞에 데려 왔다. 그렇게 해서 찍힌 그의 사진 속의 소녀들은 모두 섬세하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의 소녀 사진은 - 누드 사진을 포함해서 - 빅토리아 시대에 어린이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용의 많은 그림이나 조각, 사진 작품들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사춘기 이전 어린 아이의 '순수한' 육체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이이런 유행은 크리스마스 카드 삽화와 같은 대중적인 취향으로 널리 소비되었는데, 랄프 칼데콧, 에밀리 거트루드 톰슨, 윌리엄 스티븐 콜먼, 알렉산더 먼로 등의 화가나 조각가들이 비슷한 주제로 작업하였고 도지슨은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지슨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우아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모두 지체높은 집안에서 훌륭하게 교육받은 영애들이기도 하다. 그의 피사체는 자신과 같은 사회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자 자신의 미적 이상에 부합하는 사람들에 한정되었다. 그 기준은 어린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예술적 효과를 노려 앨리스 리델을 거지 소녀로 분장 시켜 찍기도 했지만, 그의 사진 속에 동시대 디킨스가 묘사했던 진짜 런던 빈민가 거지 소녀들이 등장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사실 빈민가의 부랑아나 노동 계급아이들 또한 어린이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또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었다.)

그는 가족들과 주변 친구들을 찍으면서도 사진 한 장 한 장을 예술 작품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상업 사진의 관습을 경멸하고 그로부터 되도록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1860년대 이후에 스튜디오에서 크게 유행한 까르떼-드-비지뜨(carte-de-visite)라는 명함판 사진은 제작비용을 크게 낮춰 많은 중산층 대중들을 사진기 앞에 최초로 불러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고객인 신흥 부르주아지의 기호에 맞추어 대개 귀족적이고 고급스러운 배경에 화려한 옷을 입고 의자나 탁자에 기대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천편일률적인 구도를 띠고 있다. 도지슨은 그의 시 <사진사 히아와타>에서 사진기 앞에서 점잔빼는 중산층 가족을 묘사하며 까르떼-드-비지뜨의 관습적 의식을 풍자했다. 번들거리는 벨벳이나 앞섶에 손을 넣은 나폴레옹식 자세도 그의 세련된 취향에는 천박하게만 보였다.

도지슨이 선호하고 동경했던 모델은 당대의 유명한 사진작가였던 오스카 구스타브 레일랜더(Oacar Gustav Rejlander)의 사진들이었다. 레일랜더는 원래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치다가 사진작가로 전업한 사람으로, 고전적인 회화 형식을 사진에 도입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도덕적 메시지나 우화적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는 연작들인데, 당시에 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그의 노골적인 상징주의나 고전 취향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상당히 통속적으로 보인다. 어쨌든 도지슨은 레일랜더의 영향을 받아 소녀들에게 무대 의상을 입히거나 연극적인 연출을 시도하고, 주제가 있는 연작 형태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빨간 모자 의상을 입은 아그네스 웰드의 사진이라든지, 성 조지와 용 이야기를 극화한 자일 키친과 그 남매들의 사진이 대표적인 예다. 연작으로는 거지 의상을 입은 앨리스 리델과 같은 장소에서 성장(盛裝)한 앨리스 리델의 사진, 그리고 중국 차(茶) 상인의 의상을 입은 자이 키친의 사진이 가장 유명하다.

도지슨은 동시대에 활동하던 인물사진가인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과도 안면이 있었지만 그녀의 사진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다. 오늘날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물 사진가로 평가받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도지슨이 "초점이 안 맞고 머리만 거대한(요샛말로 대갈치기)" 사진이라고 혹평한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확실히 인물의 상체를 잡은 안정된 피라미드 구도의 화면을 선호했던 도지슨에 비해, 카메론은 카메라를 인물 가까이 들이대어 프레임을 얼굴로 꽉 채우곤 했는데 그렇게 했을때 초점을 정확히 맞추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섬세한 디테일을 중시했던 도지슨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렇게 해서 찍힌 카메론의 사진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도지슨의 우아한 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의 내면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전해 준다.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현대 인물사진의 걸작들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개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지슨의 인물 사진 속에서 속물 취향과 뻣뻣한 관습만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진은 가끔씩 카메론의 것과는 또다른 종류의 현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도지슨이 찍은 것 중에서 내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두 장의 사진을 감상하면서 이 긴 글을 끝내도록 하자.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은 캐틀린 타이디의 사진은 언뜻 보아 요즘 찍은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상당부분 가리고 있는데도 우연히 가볍게 찍힌 장면처럼 생기에 넘친다.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진은 그 시대 사진의 구도나 미적 관습에서 벗어나 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꽃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플로라 랜킨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오늘 수업 없어요(No Lesson Today)"라는 깜찍한 부제가 붙어 있다. 다시 한 번 노출 시간이 수십 분에 달했던 1860년대로 돌아가, 그 당시에 이런 찬란한 미소를 찍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였는지 되짚어 보지 않더라도 (19세기에 찍힌 많은 사진들이 왜 자는지 죽었는지 헷갈리는 사람들의 으시시한 모습을 많이 담고 있는지 잠깐만 생각해 보자.) 이 소녀는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찰스 다윈의 책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The Expre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에 자료 사진으로 실리기도 했다.

by Dormouse
 
 
 

추가....

루이스 캐럴의 사진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http://libweb2.princeton.edu/rbsc2/portfolio/lc-all-list.html
그림을 두번 눌러주시면 큰 사이즈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누드화도 많이 찍었으며 어린 소녀에 집착한 그를 두고 도슨이 소아성애도착증 환자가 아니었느냐는 논란도 일기도 했습니다만 도슨이 살던 빅토리아왕조 시대에는 초경전의 어린 소녀는 순결과 성스러움의 상징이었다며 어린 소녀에 대한 도슨의 집착도 순수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으며 평생 동안 앨리스 리들이란 소녀를 사랑했으며 앨리스 리들이 도슨의 영원한 「뮤즈」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그가 찍은 누드사진들은 철저히 부모의 허락과 관리하에 찍었으며 그 모델이 된 소녀들이 자랐을 때 모두 돌려주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우리가 볼수 있는 누드사진은 네점밖에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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