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 -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상실 혹은 단절 윤곽 3부작
레이첼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한길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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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상실 혹은 단절"

 

'윤곽'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나 사건의 대체적인 줄거리, 사물의 테두리나 대강의 모습이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끈 건 그 밑에 자리한 색다른 풀이였는데.. "인지적으로 낱말이 지시하는 실체를 받아들이는 틀. 바탕이 되는 큰 단위에서 하위 구조를 부각시킴으로써 나타난다."였다. 레이첼 커스크가 의도한 '윤곽'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 레이첼 커스크의 <윤곽>

이 소설은 이혼을 겪은 한 작가 파예가 아테네로 글쓰기 강의 하러 떠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그리고 점차 갖춰져 가는 화자의 윤곽에 대한 이야기다.

 

| 작가 '레이첼 커스크(Rachel Cusk, 1967~)'

1967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레이첼 커스크는 어린 시절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낸 후 1974년 영국으로 이주해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첫 소설 『아그네스 구하기』(SAVING AGNES, 휘트브레드 신인소설가상)를 1993년에 출간한 이후, 『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 시골생활』(THE COUNTRY LIFE, 서머싯 몸상 수상),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ARLINGTON PARK, 오렌지상 최종 후보), 『운 좋은 사람들』(THE LUCKY ONES, 휘트브레드 소설상 최종 후보), 『우리에 갇혀』(IN THE FOLD, 맨부커상 후보) 등 그녀의 소설은 주로 사회가 만들어놓은 여성상과 이에 대한 풍자를 주제로 했다. 지금까지 모두 아홉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2003년에는 『그란타 매거진』이 선정하는 ‘영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로 뽑혔다. 루퍼트 굴드가 연출하고, 레이첼 커스크가 각본을 쓴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MEDEA, 2015)는 수잔 스미스 블랙번상의 최종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10년간의 결혼 생활과 이혼의 아픈 경험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담은 그녀의 회고록 『후유증: 결혼과 이혼』(AFTERMATH: ON MARRIAGE AND SEPARATION, 2012)은 영국 문단에 큰 파장과 논쟁을 낳았다. 긴 공백 후, 커스크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견해는 피하면서 서사적 관습에서 벗어나 개인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프로젝트는 ‘윤곽 3부작’인 『윤곽』(OUTLINE, 2014), 『환승』(TRANSIT, 2016), 『영광』(KUDOS, 2018)으로 발전했고, 해외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소설의 특징

분명 화자가 존재하는데 그 존재가 요란하지 않다. 깊고 낮게 움직이는 화자는 소설에서 주로 청자의 역할을 한다. 타인의 말을 듣고 듣고 경청한다. 듣고 행위의 반복으로 인해 독자들 역시 끊임없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경청을 거듭하던 화자는 어느 한 순간 삶의 윤곽이 이어져감을 느낀다. 독자는 그 사실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낀다.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다. 익숙하면서도 독창적이라 더욱 매력적인 서술방식이다. 어딘지 빈 듯한 이질적인 서술이 작품의 스토리, 제목의 전달을 극대화한다.

또 장편소설임에도 단편소설의 장점을 지녔다. 파편적인 이야기가 한데 묶인, 그러면서도 서로 비슷한 흐름 위에 위치한 소설을 엮은 단편집을 읽는 묘한 감정을 선사한다. 그로 인해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사랑, 상실, 단절, 후회, 오해, 깨달음이 더욱 크게 와닿는다. 독자는 같은 처지의 인물에 공감할 수도, 화자처럼 묵묵히 들을 수도, 약간 떨어져 인물들과 화자를 주시할 수도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지점에서 반응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열린 소설이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개인적인 감상

여정 중 만난 여러 사람들의 독백을 들은 화자는 점차 자신의 윤곽을 완성해나가는데 이는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자명한 사실이나 완벽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은 늘 멀고 손에 쥘 듯 애타는 것은 손에 넣으면 눈 깜빡할 사이 바스라져 사라진다.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가진 윤곽은 감각으로 인지가 가능한 신체 하나뿐이다. 인생의 빈틈없는 윤곽이란 어쩌면 이룰 수 없는 환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 상실, 단절같은 조그만 파편들이 모여 삶의 윤곽을 이룬다.

삶의 윤곽이 흐릿할 때가 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보통 윤곽을 채워나가는 것을 지향한다. 더 선명하게 더 진하게 안간힘을 써서 지워지지 않는 윤곽선을 그려나가고자 계획하고 실천하고 소통한다. 그렇게 모양을 잡아온 윤곽이 흐릿해질 때 찾아오는 무력감은 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나 역시 그런 순간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럴 때마다 이 책을 떠올릴 것 같다. 가끔은 선이 엇나가도 돼, 약간은 뒤틀려도 돼, 흐릿해져도 괜찮아 이렇게 말해줄 것만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윤곽>을 읽고 일종의 용기를 얻었다.

 

| 문장수집

p.14 나는 런던에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근에 시골집에서 이사를 했는데, 그 집에서 아이들과 지난 3년 동안 살았고, 그 전에는 7년 동안 남편도 함께 살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건 가정이었고, 그곳에 살면서 그 집이 무언가의 무덤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무언가가 현실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했다.

p.89 나는 원하는 만큼 멀리 헤엄쳐나갈 수도 있었고, 거기서 그대로 익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충동, 자유롭고 싶다는 그 욕망마저도 내게는 여전히 어떤 강박이었다. 나는 그 충동과 관련한 모든 것이 환영에 불과함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그 존재만큼은 여전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 한줄평

원래대로 돌아올 걸 알면서도 자꾸만 흐릿해지는 삶을 위로받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을 책.

나는 런던에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근에 시골집에서 이사를 했는데, 그 집에서 아이들과 지난 3년 동안 살았고, 그 전에는 7년 동안 남편도 함께 살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건 가정이었고, 그곳에 살면서 그 집이 무언가의 무덤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무언가가 현실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했다. - P14

나는 원하는 만큼 멀리 헤엄쳐나갈 수도 있었고, 거기서 그대로 익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충동, 자유롭고 싶다는 그 욕망마저도 내게는 여전히 어떤 강박이었다. 나는 그 충동과 관련한 모든 것이 환영에 불과함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그 존재만큼은 여전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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