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나무 1 - 그림 문자로 풀어내는 사람의 오묘한 비밀 한자나무 1
랴오원하오 지음, 김락준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모르는 문자를 공부해서 읽고 이해한다는 것에 조금 희열감을 느끼는 편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고 확실히 사람은 어릴 때 경험이 중요한데요. 제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이전부터 세 살 터울인 형을 따라 (아니 정확히는 형에게 끌려 ) -부모님이 낮에 장사를 해야 해서 형이 학교를 갔다오면 저녁 먹기 전까지는 형에게 자동 인계 되었다 - 만화방에 주말 빼고는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습니다. 형은 만화책 잡고 혼자 낄낄 웃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전 옆에서 처음에 그림만 조금 보다가 지루해지만 형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그러다 밥 먹을 때 즈음 끌려서 다시 집에 오고. 전 아직도 그때 만화방이 생생히 기억나는데요. 여하튼 너무 답답해서 몇 번을 엄마한테 나도 글 가르쳐 달라고 진짜 많이 졸랐습니다. 그러면 항상 하는 말이, 그건 학교 들어가서 배우는 거야. 다 배우는 때가 있으니깐 지금 알려고 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시더군요. 결국 8살에 국민학교 들어 가기 전까지 계속 만화방에 끌려 가서 조는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요. 그러니 어린 맘에 얼마나 글을 읽고 싶었겠습니까? 학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찌나 읽고 싶던지. 

그렇게 저도 드디어 8살이 되자 1학년이 되었고 그렇게 맞은 3월 첫 토요일. 수업을 파하고 집에서 혼자 점심을 조용히 챙겨 먹고 - 여전히 부모님은 장사 하느라 바쁘셨다 - 돼지 저금통에서 동전 몇 개 슬쩍 빼 혼자 만화방 가서 그동안 형 옆에서 내용은 모르고 그림만 보던 만화책을 집어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을 때의 감동이란.  아, 이런 이야기였구나. 형이 그래서 낄낄 거렸구나. 이젠 만화방에 있는 책은 다 내꺼야! 쾌재를 불렀습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사람 구실 할 수 있다는 것을, 어찌보면 너무 어린 나이에 절절히 몸에 박힌 것 같습니다.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치면서는 누구나 다하는 영어와 고등학교 제 2외국어로 불어를, 대학 때는 독일어를, 유러피언 어의 근본에 대한 호기심과 심화 영어 공부를 위해서 라틴어를,  이왕 고대 언어 공부 시작한 거 나일롱 신자이긴 하나 기독교인으로서 성서 원전을 읽고 이해하고 싶어  헬라어(고대 그리스어), 히브리어 공부까지 언어 공부를 쭈욱 이어나갔습니다.  이렇게 인도-유럽어족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점은 언어 공부에 있어서 '어원'에 대한 이해가 클수록 공부하는 언어의 기초를 굉장히 탄탄하게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단어 확장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더군요.



저의 이런 언어 공부의 또 다른 분기점이 결혼하고 생기게 되는데요. 2000년 초반에 일었던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노자'강의를 통해서입니다. 당시 ebs를 통해 정말 재밌게 시청하고 책을 사서 보는데, 한문 원전을 읽는 데 뜻은 고사하고 읽기 조차 힘들더군요. 한자 문명권에 사는 1인으로서 기본 한자를 편하게 읽지 못한다는 점에 스스로 무척 자괴감이 들더군요. 인도-유럽어족의 바탕 언어인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는 띄엄띄엄 읽으며 뜻도 희미하지만 알아채면서 조선 시대까지 이 땅의 공용 문자인 한자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 중에서 겨우 머리에 남은 것만 가지고 지금껏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적당한 때 한번은 마음을 다잡고 한자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맘을 다지게 됩니다. 





몇 년 지나서 드디어 기회가 되어 본격으로 한자 공부를 시작하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무식한 방법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첫째, 옛날 서당에 가면 먼저 '천자문'을 가지고 한자를 배웠으니 우선 '천자문' 책을 사서 한자 공부를 시작한다.

둘째, 언어 공부에 있어 '어원'이 중요하니 한자 '어원'에 해당하는 부수 공부를 병행한다.

이렇게 천자문의 한자를 읽히기 위한 책, 천자문의 한자를 넘어 천자문 책 자체의 이해를 위한 책, 부수 해설을 위한 책 몇 권을 구입해서 한자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생깁니다.

'부수部首' 공부를 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는 것이 허신(AD 58?~149)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AD 121년)인데요. '부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허신입니다. 허신이 '설문해자'에서 540자의 한자를 부수로 세우고 부수자의 자형을 기준으로 한자를 분류하게 됩니다. - 이것이 오늘날 한자 사전 즉 '자전字典'의 원형이 된다 -. 설문해자에서 이런 부수를 기준으로 9,353개의 한자를 분류한 후 자형과 본뜻을 설명합니다. 시중의 많은 부수 관련 책들이 설문해자의 자형 분석을 기본으로 한자를 설명하더군요.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설문해자를 보면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설문해자의 자형 분석이 소전小篆을 기본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소전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에 이사李斯를 시켜 만든 서체(BC 220년 전후)이다. 문서를 통한 중앙 집권적 통치 방법을 쓰는 진나라 입장에서는 통일된 한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데 이 표준 한자가 소전이다 - 소전이 오래된 글자이긴 하나 BC 1200년 전후에 사용한 갑골문에 비하면 천 년이나 지난 글자이거든요. 20세기 고고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갑골문자나 청동기의 금문자 등 고대문자가 대량으로 발굴되어 연구한 결과 소전의 자형이 갑골문에서 너무 많이 생략, 변형되어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경우가 꽤 된다는 것 알게 됩니다. 결국 원래의 자형에서 많이 변모된 소전에 의거하여 자형을 분석했기 때문에 설문해자에는 오류가 많이 남게 되어버렸습니다. 또 자형 분석에 근거해서 본뜻을 설명해 나가니 본뜻 역시 오류도 많은 거죠.(갑골문의 대가인 대만 학자 호후선(胡厚宣)은 갑골문을 토대로 설문을 분석해 보면, 잘못된 해석이 20~30% 정도 된다고 한다). 이런 설문을 토대로 부수를 해설 - 설문해자 자체 번역서도 많이 나와 있다- 하는 책이 시중에 많다 보니 가장 기본적인 부수 공부를 시작할 때 책 하나만 봐서는 절대 안 되고 부수를 풀이한 다양한 책을 보면서 스스로 이해되고 납득이 되는 해석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이 깨닫게 됩니다. 이런 작업이 저 같은 초보는 쉽지가 않더군요. 당시에는 한자 관련 인터넷 정보도 많지 않아서 집에 있는 책으로는 이해가 안 되면 도서관에 가서 좀 더 책을 찾아보든가 아니면 꺼림직한 상태로 그냥 넘기던가. 뭔가 진도를 나가는 데 명확해 지지 않고 오히려 더 흐릿한 경우도 많이 생기고... 여하튼 알아서 정리하는 수밖에 없더군요.

게다가 부수 공부를 하면서 하나 더 고려 사항이 있더군요. 현재 한자는 부수 214자를 기본으로 배열되는데요. 부수에 들어가는 다양한 한자들이 부수를 기본으로 의미가 파생되었다고 이해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소전을 거쳐 예서, 해서로 정착이 되면서 또다시 많은 생략과 변모를 맞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원래 갑골문의 모양의 온데간데없고 엉뚱한 모양으로 변하면서 엉뚱한 부수로 편입된 한자가 꽤 많다는 점이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교과서에 '壽福'이라는 한자가 내용상 그냥 떠억 나오는 문장이 있었는데요. 선생님이 '목숨 수, 복 복'이라는 불러주더군요. 수업 끝나고 '수'자를 찾아보니 부수가 '士이더군요. (士가 나왔으니 한마디. 중학교 당시 한문 선생님 曰 '하나를 깨우치면 열을 아니 선비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만 나오는 설명을 합니다. 그땐 자형 분석이 그렇게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그런 '士'에서 어떻게 '목숨'이라는 의미까지 나오게 된 걸까요? 어린 제가 이런 걸 알 턱이 없으니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자는 그냥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다시 한자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요. 결론적으로 壽는 원래 '士'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글자였습니다(시중에 士를 토대로 壽를 설명하는 글이 천지다).

결국 부수의 자형을 갑골문을 바탕으로 잘 이해했더라도 부수에 속한 한자를 살피는 데에는 무척 세심해야 한다는 것이죠. 부수에 속한 글자 중에 어떤 것은 부수로부터 파생되었고 어떤 것은 부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글자인 줄을 알아야지 제대로 된 한자 공부가 되니 초보 입장에서는 정말 갈 길이 보이지 않더군요. 결국 거의 우격다짐으로 어찌어찌해서 천자문도 때고 부수 공부도 대충 마치고 구미가 당기는 옛 글들을 사전 찾아가며 어눌하게나마 읽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최근에 아내로부터 조금 솔깃한 책의 출간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한자나무'라는 책입니다. 미리 보기를 통해서 대략 살펴보는데 적잖게 놀랐습니다.

제가 한자 부수 공부를 대략 마치고 몇 년 지나서 부수라든지 기본 (상형. 지사. 회의) 한자에 대해서 굉장히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 책이 있었는데요. 그 책과 굉장히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더군요. (나중에 '한자나무'를 받아보고 혹시 제가 본 책이 이 '한자나무'의 영향을 받았나 살펴보니 대만에서 한자나무가 출판되기 이전에 출판된 책이더군요. 자형의 분석이나 설명도 비교해 보니 많이 다르네요)



그간 한자를 공부하면서 내린 결론은 제대로 된 한자 (자형 설명) 책은 (부수와 같은) 기본 한자가 들어가서 파생되는 여러 한자들을 설명할 때 파생된 모든 한자 속을 관통하는 기본 한자의 쓰임을 공통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과연 한자나무 이 책은 어떨지 우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받아서 빠르게 살펴보다가 아래 단락을 읽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자의 비밀을 푸는 것은 어떤 사건을 추리해 해결해가는 과정처럼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비밀을 풀 때 어느 한 단계라도 잘못되면 마지막에 가서 잘못 해석하게 되거나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

(중략)

...

이 책에 나오는 한자들은 적어도 다섯 가지의 검증 원칙을 통과했다. 먼저 반드시 갑골문, 금문의 자형에 부합하고, 둘째 반드시 역사적인 사실이나 선진시대의 서적 기록에 부합해야 하며, 셋째 모든 한자 부호에 대한 해석은 반드시 일치해서 그 한자 부호를 포함한 다른 한자에서도 똑같이 쓰여야 한다. 넷째 파생된 뜻을 반드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자형과 뜻이 일관성 있게 변화해야 한다. 예컨대 '갑'이라는 부호와 이 부호와 관계있는 '을'이라는 부호 사이에는 합리적인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논리적으로 정확하고, 고대 문물이나 서적에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 다석 가지 검증 원칙은 한자 시스템을 지탱하는 다섯 개의 기둥으로서 한자 시스템을 체계적, 일관적, 합리적으로 만들어 쉬운 이해를 돕는다."

한자 나무 1 p. 24

이 대목을 읽고는 진짜 감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위에서 풀어쓴 제 생각이 저자의 세 번째, 네 번째 검증 원칙에 걸쳐 있던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과 이런 저자라면 그의 얘기를 믿고 따라가 보야도 된다는 확신이 생기더군요.

이 문장을 만난 이후부터는 모든 의심의 눈초리는 내려 두고 정말 기쁘게 읽었, 아니 읽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름 넘어 책상 위에 두고 저녁마다 다시 읽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간 제가 부수 공부하며 참고했던 책들도 다시 들춰보고 이 책과 비교하면서 조금 다가오지 않았던 한자들을 새롭게 정리하고 있답니다.

이 책은 다시 한자 공부를 시작하는 이에게도 좋은 책이지만 어찌 보면 이 책은 한자를 처음 공부하는 이에게 절대적으로 유용할 책입니다.

중학생이 되어서 처음으로 맞은 한문 시간에 가장 먼저 한 것이 일 단원 공부가 아니라 한문 교과서 맨 마지막에 있는 '부수'를 따라 읽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무슨 글자인지도 모른 체, 7-8획 정도 넘어가면 가뜩이나 글자도 복잡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무작정 따라 하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부수 '辵착'을 왜 '책'받침이라 하는지 설명도 없이 책받침, 책받침 하던 무심한 한자 선생의 목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땐 그렇게 선생도 무식했고 우린 무식하게 그걸 따라 했다).

제가 만약 한자 공부를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했다면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는 상용 한자 정도는 힘들이지 않고 그냥 내 것이 되었으리라 감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만큼 초심자에게 기초를 다지는데 매우 유용한 책 같습니다. 주위에 한자 공부를 막 시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고민 없이 그냥 사주고 싶은 책입니다.



한자 나무 1권에서는 '人'을 기본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한자들을 살피고 있는데요. 지금껏 만나 본 자형 풀이 책으로서는 최고라고 말하고 싶네요.

초반에 孕, 秀, 盈으로 이어지는 풀이만 보더라도 -이게 다 人과 연결돼 있다! - 이 책이 풀어가는 내용이 얼마나 과함 없이 물 흐르 듯 자연스러운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진짜 설명이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검색해 보니깐 대만에서 현재 5권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국내에는 1, 2권이 출간되어 있네요. - 1권은 사람이라는 큰 틀에서, 2권은 사람이 가진 신체 부위를 중심으로 - 3, 4, 5권에서는 어떤 한자를 중심으로 한자 나무를 그렸는지도 몹시 궁금하고 하루빨리 번역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그동안 한자 공부를 하면서 찜찜하게 머릿속에 남은 한자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 욕심도 생깁니다.

최근 10년간은 사진 작업에 매달리느라 책은 항상 카메라 뒷전에 있었는데요. 모처럼 카메라를 던져두고 책 읽는 재미에 흠뻑 빠졌던 9월이었습니다. (이 책의 특성상 한번 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상에 올려 두고 다락에 넣어둔 곶감 빼먹듯 매일매일 야금야금 보는 재미가 있다)

혹시 한자의 체계와 구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입문하고자 하는 이라면 꼭 곁에 두길 바라면서 오늘 글을 맺겠습니다.



蛇足

一. 이 책은 번역가도 번역가이지만 편집자의 공이 정말 많이 들었으리라 짐작된다. 우선 원서에는 없는 한자 관련 배경지식을 짧게 정리해서 삽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자책이라는 특성답게 한국식 뜻과 음을 한자마다 일일이 새롭게 다는 것은 물론이고 한자와 관련해서 기억하면 좋을 한국식 단어까지 새롭게 찾아 집어넣는 등 티 안 나며 돈 안되는 일에 시간을 갈아 넣었다. 부디 건강하게 앞으로 더 좋은 책을 만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二. '壽' 자형도 人에서 시작이다. 이럴 수가! 궁금하면 한자 나무 1 60쪽을 보라.

三. 辵의 음은 '착'이고 좌변에서 부수로 파생 한자의 받침 역할을 하기에 '착받침'으로 읽어야 한다. 책받침은 명백한 오류이나 사람들이 그리 부른다며 다들 그리 부른다.


교유당 서포터즈 4기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