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은 봄밤 - 교유서가 소설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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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는 일상에서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 흔히 쓰이는 부사다. 자연스럽게, 무심코 쓰던 '그래도'가 나에게 조금 특별하고 그래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초창기 블로그로 소통을 하던 한 이웃의 닉네임이 그래도였다. 저마다 닉네임에는 의미가 있는데 왜 하필 '그래도'일까...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그녀의 가슴 아픈 사연, 절망 속 고통의 삶을 알게 되었고 긴 터널 같았던 아픔의 시간들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그래도'의 의미를 오래오래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아픔과 그녀의 절망과 그녀가 견뎌온 시간들의 무게가 얼마일지 감히 가늠하지 못하지만 어렴풋 느끼며 '그래도'는 여전히 나에게 가슴 아픔과 고통, 절망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희망을 품고 있는 부사로 남아있다.

등단 14년 만에 나온 황시운 작가의 소설집 <그래도, 아직은 봄밤>은 제목부터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9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그래도, 아직은 봄밤>은 나의 기대와 예측과 달라 적잖이 충격적인 책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 <매듭>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펄펄 끓는 육수 속에 던져지는 낙지를 보며 고통과 통증,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남편 윤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어버린다. 헤어지자는 남자와 헤어질 수 없다는 여자. 그 이후부터 서로에게 지옥 같은 날들이 이어진다.

"내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니? 하긴, 옆에 들러붙어서 매 순간 비참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내가 끔찍했을 거야.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넌, 네가 매듭 따위, 끝내 묶지 못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결국, 그 매듭을 내 손으로 묶게 할 생각이었던 거야,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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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루에 낙지 대가리를 몇 개나 자르는지 알아? 손목이 시큰대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낙지 대가리를 자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신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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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놓쳐버린 미래를 생각해. 우리가 지워버린 과거를 생각하고 대책 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당신은 왜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 나는 왜 그때 도망치지 않았나 생각하고 당신은 왜 더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내지 않았는지 생각하기도 해. 다 까먹어버린 보증금을 생각하고 그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받은 대출을 생각해. 밀린 이자와 하루 열두 시간씩 낙지 대가리를 잘라도 갚을 수 없을 원금을 생각해. 낙지 대가리 자르듯 당신 모가지를 잘라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차라리 내 모가지를 자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해. 그런 생각들을 해. 나는."

p. 33-34



어떻게 이렇게 지독하고 처절하게 두 사람의 감정을 표현했을까. 솔직히 처음부터 너무 힘들었다.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고 탈출구 없는 아득한 심연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서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너무 힘든 책들이 있다. 그리고 잔상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고 남는 경우도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조금 버거운 경우가 있는데 첫 이야기 <매듭>에서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어떻게 작가는 이런 생각을,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죽을 만큼 힘듦 속에서 안간힘을 쓰는 삶이 처절하다 못해 가슴을 후벼파고 드는 이야기들. 상처 난 부위에 소금을 마구 뿌려대는 듯한 이야기들이 깊은 통증을 느끼게 했다.

<어떤 이별>은 어쩌면 가장 상처를 후벼파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짧은 단편이지만 한편씩 읽어나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이별>에서는 3명의 여성이 나온다. 각자의 지옥 속에 사는 여인들의 삶을 보면서 삶이란 무엇일까...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삶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정폭력, 장애인, 고독사, 성매매, 학교폭력, 가출 등 사회적 문제들을 이야기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사건들이지만 외면하고 싶고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의 아주 어두운 불편한 진실들을 드러내고 있을까. 내가 잊고 있었던 세상, 내가 몰랐던 세상을 책을 통해 경험하게 하는데 지독하고 숨 막힐 정도로 집요하다. 믿기지 않지만 세상엔 이런 삶도,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모든 내용을 다 읽고 나니 내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평화롭고 행복한지 새삼 느끼게 만들었다.

내 삶은 이리도 평온한데 타인의 지옥 같은 삶을 들여다보고 나니 삶의 애착과 감사 그리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황시운 작가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작가의 말이 없었다면 그저 끝도 없이 추락하는 삶의 그 끝을 보여주는 지독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고는 지금껏 이야기 속의 죽을 만큼 힘들고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쓴 이야기들이 작가 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절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너무너무 가슴 아픈 소설 속 이야기들이 황시운 작가가 절망의 바닥에서 살기 위해 건져 올린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나 아팠다.

작가의 경험, 감정들이 이야기 속 곳곳에 녹아 있음을 작가의 말을 통해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야간산행을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추락하여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린 작가. 수시로 밀려오는 통증 속에서 매일매일 죽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삶을 이어가며 써 내려간 이야기들. 죽을 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운 날들 속에서 그래도, 아직은 봄밤이라고 이야기하는 작가.

눈물겹다.

삶의 절망에서 끝내 살아남아 삶을 이야기하는 황시운 작가의 조금 남다른 삶의 이야기를 여러분들도 꼭 만나보길 바란다.

지금 삶이 힘겹고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래도, 아직은 봄밤"이라고 황시운 작가는 위로를 건넨다.

작가의 사연과 9편의 이야기들을 다 읽고 나면 <그래도, 아직은 봄밤>이라는 제목이 더 크게 눈물겹고 감동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도"가 가지는 힘은 참 대단한 거 같다.

책을 읽은 지 한참 되었지만 쉽사리 서평을 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삶의 무게가,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고 가늠할 수도 없었기에 감히 무어라 글을 쓰겠나 싶어 오래 망설였던 거 같다.

조금 다른 감동이지만 굉장한 작가를 만났다.


K는 남편의 죽음을 목격한 후부터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날이 훤히 밝아온 뒤에야 가까스로 아주 잠깐 잠들 수 있을 뿐이라면서, 남편이 밤이 아닌 낮에 죽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거라는 말도 했다. 그때 나는 그런 끔찍한 말을 그토록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방향을 잃은 분노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 P104

돌연히 찾아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고독하기 짝이 없다. 아내와의 만남이 그랬고 이별 역시 그러했다. 그것들 앞에서 나는 매번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만은 달라야 했다. 돌연히 찾아올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라도 아직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더이상 손 쓸 수 없을 만큼 틈이 벌어지기 전에 금간 벽을 손봐야 했다. 고개를 수그리고 가슴을 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세차게 뛰던 가슴이 진정되면서 차츰 시야도 맑아졌다. 저만치 버스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버스가 보였다. 어쩐지 이번만은 버스를 놓쳐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무턱대고 뛰기 시작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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