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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이자벨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8월
평점 :
3273. 더글라스 케네디 『오후의 이자벨』 : 밝은세상
때로 소설은 우리 삶의 귀감이 된다. 아마도 그것은 어떤 인생이든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끝이 있는 이야기. 그래서 나의 역사,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아무리 덧없거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인생이라도, 모든 인생은 소설이다. 샘이 사하라사막의 모래폭풍처럼 걷잡을 수 없었던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오후의 이자벨』은 시작된다.
스물한 살의 샘은 자유와 낭만의 도시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하버드 로스쿨 입학까지 남은 얼마간의 시간을 샘은 파리에 남기고 싶다.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다. 파리에서의 샘은 매일이 주말의 오후 같다. 그에겐 정해진 일정도, 처리할 과제도, 다가올 시험도 없다. 암스테르담에서 탄 밤기차에서 내렸다. 프린세그란츠에 있는 커피숍에서 합법적인 대마초를 피운 뒤 곧장 기차에 오른 샘은 머리가 멍하다. 지하철 입구에 있는 작은 빵집에서 크루아상과 커피로 허기를 채우고 3프랑에 카멜을 한 갑을 산다. 하루치 담배다. 파리의 골목을 헤집고 예약도 없이 영화를 보고 남은 여행비에 맞춰 식사를 한다. 그러나 공기마저 따사로운 그곳의 풍경도 그의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순 없다. 그가 마주한 파리의 1월은 온통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호텔의 옆방에 머물던 폴은 시내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 샘을 초대한다. 다행히 샘에겐 정해진 일정도, 처리할 과제도, 다가올 시험도 없다. 샘이 출판기념회에 가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출판기념회를 즐기던 샘은 검정 원피스에 검정 스타킹, 검정 부츠를 신은 연상의 여인 이자벨에게 이끌린다. 훗날 샘은 ‘이자벨 전에 나는 섹스를 전혀 몰랐다. 이자벨 전에 나는 자유를 전혀 몰랐다. 이자벨 전에 나는 파리를, 섹스와 자유가 영원한 두 가지 주제인 그 도시를, 전혀 몰랐다. 이자벨 전에 나는 인생을 전혀 몰랐다.’라며 그녀를 회상한다. 파리에서의 샘은 언제나 이방인이었고, 그것은 출판기념회에서도 특별히 다를 바 없었다. 회장을 서성이던 샘에게 다가온 이자벨은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친절하게 샘을 대한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샘은 이자벨에게 받은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한다. 오후 5시, 베르나르 팔리시 9번지. 숫자 5와 9 사이엔 사랑의 시간과 공간이 존재했다. 기혼녀인 이자벨은 샘과의 사랑에 규칙을 정했다. 오후 5시, 그리고 정해진 장소 베르나르 팔리시 9번지. 사랑엔 국경도 없지만, 결혼엔 반드시 제약이 따른다.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르듯, 샘은 파리에서의 아련한 기억들을 마음에 묻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성공한 변호사로, 레베카의 남편으로, 이던의 아빠로 살아가던 샘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지난 이력과는 다르게 삶이 그리 행복하지 않다. 병을 앓던 이던이 청력을 상실하며 아내 레베카는 알코올에 빠진다. 파국으로 이어진 짧은 결혼 생활과 양육권 다툼으로 샘은 다시금 미국에 안녕을 고하고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다. 지울 순 없지만 잊을 순 있다. 파리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샘 앞에 이자벨이 나타난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신작 『오후의 이자벨』은 이전 작 『빅 픽처』와는 상당히 결이 다른 소설이다. 불륜이라는 소재는 매우 자극적이지만 정작 완독을 한 시점에 과연 작가가 던진 물음이 불륜의 당위성이나, 사랑의 본성에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보수적인 성향은 아니지만 불륜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3대 죄악으로 보는 사람이라 당연히 불륜의 당위성 따위에 대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조금 다른 의미로 이 소설을 해석하자면, 미국인인 샘과 프랑스인인 연상의 여인 이자벨은 문화적 상징이며 동시에 대비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사고방식은 그대로 삶의 방식이 되어 인생의 결을 결정한다. 샘은 미래를 살아가고, 이자벨은 현재를 살아간다. 내일을 사는 사람과 오늘을 사는 사람의 차이는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고뇌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레베카와의 결혼 생활에 막을 내린 샘이 결국 내일에서 오늘로, 미래에서 현재로 돌아오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여정은 온통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파리로 무대를 옮긴다. 소설에서 샘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고통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 사이 어디쯤엔가 있는 마음상태일 거야.”
오후 5시, 베르나르 팔리시 9번지. 사랑이 만들어지는 시간과 공간. 『오후의 이자벨』을 읽으며 생각한다. 미래를 살 것인지, 현재를 살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