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3271. 쓰네카와 고타로 『멸망의 정원』 : 고요한숨

출근길, 전차에서 마주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스즈가미 세이치는 목적도 정하지 않은 채 여인의 뒤를 따른다. 나른한 오후의 단잠에서 깨듯 얼마간 혼미했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마주한 곳은 마치 꿈결 같은 곳이다. 현실에선 꿈으로나 가능했던 일들이 이 세계에선 현실이 되어 일어났다. 이웃은 친절했고 배고플 이유가 없을 만큼 풍족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나를 사랑하고 밤하늘마저 아름다운 곳이다.

이것은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다.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삶에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집에 도착한 그를 맞이한 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낡은 외줄 위에 선 아내였다. 현실에서의 스즈가미 세이치는 모든 면에서 대체제가 있었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친구들이나 이웃 사이에서도 그는 꼭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사뭇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어디에도 대체제가 없을 것만 같은 이 세계에선 이웃도, 친구도, 여인도 친절했으며 동시에 그를 필요로 했다.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얼마간 그는 현실 세계의 ‘세이치’를 잊고 - 마치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것처럼 - 살았다.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쁜 딸아이와 함께라면 이 세계의 정체 따위는 스즈가미 세이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새로운 세계의 여정을 시작할 즈음, 현실은 고통과 시름으로 가득 찼다. 푸니에 의해 파괴되어 가던 세계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마주한다. 인류는 세이치가 그랬던 것처럼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 충동에 휩싸인다.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변하고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한다. 어느 날 받아 든 한 통의 편지를 통해 세이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행복해질수록 인류가 불행해진다는 사실도.

어쩐지 영화 『매트릭스』가 떠오른다. 소설을 읽어보면 『매트릭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영화 속 빨간 약과 파란 약, 현실과 가상 현실이라는 설정에서 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의 주인공 스즈가미 세이치가 인류로부터 받은 마지막 부탁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지금 나의 행복을 파괴(포기) 하면 인류를 존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 쓰네카와 고타로가 선물한 환상의 세계는 스즈가미 세이치에게 인생 최고의 선물임과 동시에 잔혹한 저주가 되고 만다. 멸망을 향해가는 지구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미지의 존재 푸니로 인해 권력층은 힘을 상실하고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한다. 전 인류가 마치 현실에서의 스즈가미 세이치처럼 고통에 절규한다. 폭동과 살인이 끊이지 않으며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가혹하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과 맞바꾸어 인류를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비록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행복한 지금과 지독하고 처절한 현실. 둘 중 우리는 어떠한 것에 가치를 둘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영화 『매트릭스』가 떠오른 이유는 단지 설정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웠던 기억이 있는 만큼 쓰네카와 고타로의 『멸망의 정원』은 재미 면에서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소설의 중반부에 다다라 작가가 내던진 잔혹한 질문을 받게 되는 순간. 재미 이상으로 우리는 깊은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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