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벨트 게임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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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8. 이케이도 준 『루스벨트 게임』 : 인풀루엔셜

흔히 장르소설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들은 적어도 이케이도 준의 소설에선 만나볼 수 없다. 소거법을 통해 소설의 끝자락에 “범인은 바로 너!”라고 외치며 추리의 쾌감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기가 막힌 반전으로 독자를 혼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 흔한 폭력의 카타르시스조차 제거된 그의 소설은 대체 어떤 매력으로 수백만 독자를 사로잡았을까. 

현대의 장르소설을 쉽게 풀어가기 위해 기필코 빠져서는 안 될 요소와 소재 같은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스릴, 미스터리, 추리, 액션 같은 장르적 요소나, 범죄, 사랑, 전쟁 같은 소재를 적절한 인물과 배경, 사건들로 버무리면 그럴싸한 장르소설이 탄생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요인들 때문에 웬만한 장르소설은 잘 쓰고도 평이한 작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케이도 준의 소설은 대체로 그가 금융업계에 종사하던 당시의 경험과 기억들에서 파생된 시나리오다. 600만 독자를 사로잡은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기존의 장르소설을 탈피하여 뻔한 요소나 소재들에서 벗어난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가 부패한 기업과 금융업계의 실태를 고발하고 덫에 빠진 한자와가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루었다면, 이번 『루스벨트 게임』은 세계적인 경기 불황의 여파로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 아오시마제작소와 아오시마제작소 소속 사회인 야구팀이 회사와 야구팀을 구하기 위해 펼치는 처절한 몸부림을 그리고 있다.

전작 『한자와 나오키』에서 그랬듯 이번 소설에서도 이케이도 준의 인물 설정과 묘사는 빛을 발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위치(직책 또는 직급)에서 서로 다른 시선으로 고민을 안고 있다.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숫자와 윤리 사이의 고민이 있을 것이고, 야구팀의 입장에서는 해체되지 않기 위한 방안에 고민이 있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루스벨트 게임』은 어느 한쪽의 고민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대신, 양측의 고민을 모두 감싸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양면성 덕분인지 어떤 인물이라도 감정을 이입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입체적인 인물 묘사는 특히 이케이도 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인물에 애착이 갈 만큼 인물 묘사가 탁월하다. 각 인물들이 서로의 위치에서 느꼈을 절박함과 그럼에도 입장 차이로 인해 생기는 갈등은 폭력의 카타르시스가 제거되었음에도 이 소설을 읽으며 쉼 없이 긴장하게 도와주는 주요 장치로 활용된다.

한때 잘나가던 기업 아오시마제작소가 세계 경기 여파로 인해 사회의 밑바닥을 내려다보고 다시 부상하는 이 소설은 곤두박질칠 때의 속도와 그로 인한 갈등의 정도 조절, 그리고 부상할 때의 느린 속도와 무게감으로 힘든 상황에서 오는 고난과 역경을 템포의 조절을 통해 극대화한다. 묵직한 ‘기승’과는 다르게 3쾌(유쾌, 상쾌, 통쾌)를 모두 보여준 ‘전결’은 이케이도 준이 작가로서 얼마나 호흡과 완급의 조절을 잘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소재의 특별함이나 시나리오가 대단한 것도 아닌데 독자들이 이케이도 준의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를 나는 ‘당연함의 감동’에서 찾는다. 각자도생 사회가 낳은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는 법을 강화 시키는 대신 사회윤리를 잊게 한다. 우리가 원래 지키던 것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행하던 것들, 정의, 윤리, 도덕 같은 것들이 도려내어진 현 사회에서 이케이도 준은 당연한 것들을 행하며 얻어지는 감동을 독자에게 전한다.

야구의 룰도 모르는 사람이라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설에 적응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야구를 알면 더 좋겠지만, 야구를 몰라도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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