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가운데 - 개정판
주얼 지음 / 이스트엔드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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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드라마를 한편 본 기분이다. 음악과 함께 사람들 간의 감정, 변화하는 풍경을 잘 버무려 담아낸 소설이다. 서랍 속 나의 일기장을 꺼내 열어보게 만들고, 소설 속 등장하는 여러 음악을 재생하며 읽다 보니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읽었다.

여름의 한가운데 20p
"그거 알지? 너도 참 열심히 사는 거. (중략)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머물러 있기보단 이곳저곳으로 어떻게든 부지런히 나아가고,
결국 그렇게 나아가다 닿게 되는 어딘가에서 또다시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 건지도."

할머니, 아버지와의 이별 부분에서 가슴이 아팠다. 영국 유학길 다시 돌아왔던 그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가늠할 수도 없다. 꿈을, 일상을 잠시 쉬어가게 만드는 가족과의 이별. 준비되지 않았기에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오래도록 아프게 한다. 인정할 수 없어서, 놓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곁에 없음을 인정하고 이겨내고 다시 살아내야겠지.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늘 나와 같은 마음일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타이밍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서로의 마음과 시간의 타이밍이 잘 맞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그래도 그가 망설이기보다 용기를 내어보는 모습에서 나 또한 응원하게 되었다. 그때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적어내려갈 수도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멋진 하루 49p
"카트리지의 바늘 끝이 LP의 홈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하자 The Commodores 'Easy'의 부드러우면서도 리드미컬한 피아노 인트로가 작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멋진 하루 73p
"갑자기 무작정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 완벽하게 멋진 날씨를 만끽하며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멀리 혼자서 걷고 싶었다. (중략)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바로 편한 운동화를 사자고. 그래서 내 발에 맞는 편한 신발을 신고 편한 걸음으로 지금부터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자고 생각했다. 남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이토록 멋진 하루를 온전히 마음을 다해 즐겨보자고 다짐했다."

The Commodores 'Easy'의 가사를 간추려보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내가 하는 게 옳다는 걸 알 수 있게,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래서 난 지금 마음이 가볍다. 여유로운 일요일 아침처럼.'
LP로 드는 음악은 지지직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LP 판 때문인지 더 음악에 몰입하게 되고, 마음에 음악 선율, 가사가 더 선명하게 와닿는다. 노래 가사와 그녀의 홀가분한 발걸음이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아서 기뻤다.

파주 가는 길 84~85p
"각자의 일정이며 생활습관, 심지어 살림살이의 배치까지 모든 건 엄마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중략)
어쩌면 타인보다 더 무관심했을지도 모를 엄마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었고 엄마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파주 가는 길 103p
"“언제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있어줘요.” (중략) 곧 엄마가 좋아하는 풍경이 창밖으로 펼쳐질 것이다. (중략) 나는 무릎을 세우고 양팔로 감싼 채 엄마가 바라보는 창밖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엄마는 그렇다. 가족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고, 가족들이 나로 인한 불편함을 겪는 게 싫다. 당신이 아플 때도 가족의 안부만을 궁금해할 뿐이다. 엄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 엄마의 취미 생활에 대해서도, 만나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묻고 알아가야겠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대화를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 내 곁에 계실 때 더 많이 사랑 표현하고 아껴 드리자!

수면 아래에서 132~133p
"흘러가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은정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중략) 언젠가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그 순간을 상상하곤 해요. 수면 아래에서 부드럽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내 호흡 소리만을 듣고, 내 안의 평안만을 느낄 수 있는 그 순간을."

수면 아래에서 149p
"외롭게 먼바다를 떠돌아다니다가 결국엔 아무도 찾을 수 없게 사라져 버렸을 거라고. (중략)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곧 사고는 잊혔어. 너무나 빨리, 너무나 야속하게."

언니네 이발관 '2002년의 시간들' 가사를 보면,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날 찾는 이 없어. "바람이 있다면 나도 너희들의 흔한 얘기 나누고 싶어"가 나온다. 그녀를 성난 파도가 삼켰다는 슬픈 소식에 나 또한 망연자실하게 됐는데 그녀는 슬픔보다는 평안으로 기억해 주길 바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원했던 수면 아래에서의 평안을 온전히 누리길, 가끔씩 바람으로 머물다 가주기를 기도해 본다.

월간 윤종신 167p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지는 게 느껴져요. 그래서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복잡하거나, 괜히 이유 없이 우울할 때면 인적 드문 해변을 찾아가 가만히 바라봐요.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요. (중략) 위로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끔 절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월간 윤종신 178p
"난 꾸준하게 좋아. 비록 사소한 일일지라도 파도가 멈추지 않듯 꾸준하게 한다면 그건 정말 굉장히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음악은 공간의 온도와 사람의 감정을 미세하게 변화시키는 재주가 있다. 백화점에서 마케팅에 음악을 활용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를 반영해서이다. 음악으로 잊혔던 예전 기억이 떠올려지고 희미하게나마 그날의 분위기, 표정, 나누었던 대화가 갑자기 떠올려지기도 한다. 그녀에게 희미해지거나 잊히는 것이 싫은 그가 등장하는 월간 윤종신 편에서는 정말 많은 음악이 등장한다. 나도 애청하는 클래식 FM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반가웠다. 그녀가 겪은 사고를 이야기하기 전 집안에 흐른 곡은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의 브람스 교향곡 4번은 끝까지 우울함이 그대로 간직되는 곡이기도 하다. 한슬리크는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어두움의 근원이라고도 평했다. 그녀의 청각 손실과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고백했고, 그가 그 아픔까지도 모두 끌어안아주었기에 그녀에게 꾸준한 사람이길 바랐으나 둘은 결국 이별했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만남에서 흘렀던 브람스 교향곡 3번은 각 악장마다 다양한 감정을 담은 곡이다. 슬픔, 그리운 순간들, 행복했던 옛 추억을 회상하게 한다.

가수 윤종신 님의 음악은 나의 숨기고픈 비밀까지도 공유하는 기분이 들어서 내게도 한 곡 한 곡 모두 소중하다. 그래서 더 집중해서 보고 들었다.
윤종신 '부디', '너에게 간다', '이별을 앞두고'. 그 당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사였지만 결국에는 그 가사대로 되었다는 것이 참 슬펐다. 윤종신 님이 만든 곡의 가사가 전부 내 이야기 같아서 참 많이도 울었던 과거의 날 바라본 기분이 들기도 했다.
'부디'의 가사처럼 - 이루어질 수 없는 너와 나의 사랑. 나는 괜찮아. 그냥 견딜 수 있을 거야.
'너에게 간다' 가사에서는 - 나에게만은 거꾸로 흘러. 이 부분에서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 이야기를 나누던 그 상황을 떠올리게 됐다. 서로 다른 시간을 걷게 된 주인공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이별을 앞두고' 가사가 특히 아팠는데 - 마지막 그 자리에 내가 오지 않아도 혼자서 이별해 줘요. 끝내 바다로 함께 가지 않고 일방적인 메시지로 이별 통보를 한 그가 너무 미웠다. 붙잡지 않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됐다. 비겁한 남자여!!! 메시지 이별 통보도 하룻밤 실수도 용서할 수 없다.
소설 속 나오는 음악을 하나하나 재생하면서 읽었더니 더 생생하게 그 장면 속에 빠져 들어서 주인공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소설을 읽는 분들께 음악과 함께 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드린다. 소설 속에 곡명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윤종신 님의 곡이 소설 곳곳에 꽤 많이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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