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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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추운 날에는 어느 정도 추위에 대해 생각한다. 더운 날에는 어느 정도 더위에 대해 생각한다.
슬플 때는 슬픔에 대해, 즐거울 때는 즐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 괜찮은 아이디어가 문득 떠오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언제나 조금은 우울한 표정의 후드티를 입은 장년의 모습으로 기억되곤 했다. 몇 년 전, 하루키가 거의 예순이 다 되어간다는 걸 새삼 확인하고 나서, 잠시 멍했던 적이 있었다.(하루키는 1949년생, 올해로 만 예순이 된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봤을 때의 그 인상으로 오랫동안 기억되게 마련이지만, 처음 <상실의 시대>를 접한 것도 벌써 이십 년 가까이니, 새삼 놀랄 것이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언제나 젊은 감각의 글쓰기를 유지하는 그였기에,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받은 인상 역시 마찬가지다. 한결같음. 놀랄 만큼 신선하지 않으나, 이 세상의 모든 젊은이가 가져야 할, 그리고 가지고 있는, 느끼고 있는, 딱 그만큼의 새로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미 경험한 사람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솔직함과 여유가 그 안에 있다. 
그리스에서 첫 마라톤 풀코스를  마친 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튼, 나는 혼자서 마라톤 코스를 주파한 것이다. (...) 그러나 그런 일은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더이상 한 발짝도 달릴 필요가 없다--뭐라고 해도 그것이 가장 기쁘다. 아아, 이제 더이상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무엇보다,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그의 글쓰기와 곧장 닿아 있다. 서른 즈음에 첫 소설을 발표한 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쓰고 있는 그의 글쓰기는 장거리 러너의 레이스에 다름아니다. 무리해서 스피드를 내지 않고, 천천히, 페이스를 유지하며, '끝까지' 달리는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트럭 가득히 있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나는,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의 이런 말들이 대부분의 '어른'들이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는 그저그런 가르침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이러한 그것이 그의 글쓰기와, 달리기와, 직접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새삼 그의 소설 속의 어떤 긍정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 앞으로 한참은 더, 그의 작품을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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