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벤자민
구경미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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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뭘?”
여자의 환심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안수철의 물음에 무뚝뚝한 별장 관리인 녀석은 그렇게 말한다.
“이유 같은 거 없이 그냥 잘해주세요. 아침에도 잘해주고 저녁에도 잘해주고 꿈속에서도 잘해주고. 이유 같은 거 없어도.”

철없는 어른들의 동화 같은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반짝이는 사랑(?)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는 이연주를 납치했던 안수철이 떠난 다음날부터, 관리인은 아침마다 김밥을 만다. 특이한 것은 아침에 만든 김밥을 저녁에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저녁마다 딱딱해진 김밥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힘들게 씹어 삼켰다. 그러면서도 이연주에게는 꽁다리 하나 주지 않았다. 이연주가 같이 먹자고 할 때마다 그가 말한다.
“아닙니다. 내가 다 먹을 겁니다.”
......
안수철도 떠나고, 별장에서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서지 못하던 이연주가 드디어 별장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한 날 아침.
“오늘 떠나요.”
“그럴 것 같았어요.”
“막을 건가요?”
“네.”
“그래도 떠난다면요?”
“어쩔 수 없죠.”
“직무유기로 해고당할지도 몰라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현관문이 잠긴 것도 아니고,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배웅은 못 합니다. 보다시피 할 일이 많거든요. 현관 앞에 배낭을 둘 테니 가져가세요.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김밥은 먼저 먹고 과자는 나중에 드세요. 우유는 먼저 마시고 물은 나중에 마시세요. 산짐승이나 집짐승을 만나더라도 음식은 나눠주지 마세요. 제 먹이는 알아서들 챙기니까요.”
어느새 그는 김밥을 다 말고 배낭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배낭을 들고 식당을 나간다.

관리인은 언젠가 이연주가 세상 밖으로 나갈 것을 알고,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또 그의 홀로서기를 남몰래 준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어도, 온정이어도, 연민이어도, 혹은 그 무엇도 아니어도 좋겠다. 어느 날 문득 우리는 깨달을지도 모른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보다, 수시로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 친구보다,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밤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나에게 잠시잠깐 손을 빌려주고 사라져버린 그 사람이 더 큰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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