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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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중에서

 

 

"아마도 실망하는 게 싫어서겠지. 시시한 책을 읽고 나면 시간만 낭비한 듯한 기분이 들거든. 그리고 굉장히 실망을 하지.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어. 시간도 많았고 시시한 걸 읽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거기에서 뭔가 얻을 게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그 나름대로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아냐. 단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만 들거든. 나이가 들어서겠지." (하지메의 대사)

 

*

 

그 사진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제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는 원상회복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건 그때 그 장소에만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는 걸 보면서 나도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혼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딸들을 사랑했다.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는 건 내게 있어 하나의 커다란 행복이었다. 하지만 딸들이 실제로 한 달이 다르게 자라나는 걸 보고 있으면 때때로 심한 답답증이 느껴졌다. 마치 내 몸 안에서 수목이 점점 성장해 가면서 뿌리를 뻗어가고 가지를 넓혀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내 내장과 근육과 뼈와 피부를 압박해서 억지로 뻗쳐나가는 듯했다. 그런 생각은 때때로 잠을 이룰 수도 없을 만큼 나를 숨막히게 했다.

 

*

 

한밤중과 새벽을 잇는 그 시간은 길고 어두웠다. 울 수 있다면 편안해질 텐데 하는 생각을 할 때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좋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누구를 위해서 울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타인을 위해 울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나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이었고, 나 자신을 위해 울기에는 너무 나이 들어 있었다.

 

 

* * *

 

지난 여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하루키의 신작 소설 시작으로, 하루키의 옛 작품들을 다시 꺼내 보고 있습니다. 20대와 30대에 읽었을 때는 통 모를 소리만 가득 들어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없어서 참 지루하다 생각했는데, 이게 40대에 읽어보니 곳곳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그런데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다 우울하다는 거... 가을엔 좀 조심해서 읽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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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미카엘 엥스트룀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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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보았던 SBS 다큐멘터리 오로라를 보다가 문득 이 작품이 떠올랐다.

북유럽의 복지 천국 스웨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소년의 성장기. 한 사회의 자화상.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문제 있는 부모 아래 방치된 어린아이를 절대 그냥 두지 않고 국가나 나서서 <보호>하는 스웨덴의 복지 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사회적 이슈가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

물론 이런 얘기를 대놓고 깔아놓으면 참 재미없고, 딱딱해진다.

이를 재밌게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은 <탈주극>(!)이라는 구성을 가져온다.

(이준기의 투윅스?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필수보호대상자가 된 주인공 소년이 보호 가정을 탈출해 스웨덴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 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쪽지방에서 살았던 소년에게 북쪽 스웨덴은 또 다른 세계다.

장화의 길이가 다르고, 겹쳐 입는 옷이 다르고, 학교에 가는 시간이 다르다.

무엇보다 한밤에도 대낮처럼 환한 빛이 사방에 가득하다는 것이 소년을 흥분시킨다.

오로라- 우주의 손짓을 보며 소년은 헤어진 형을 생각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추억한다.

복지국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소년을 찾는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소년이란 이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볼보를 타고 하루를 꼬박 달려 소년을 찾아와 그를 강제로 끌고 가려한다.

소년은 힘이 없다. 소년은 돈도 없다. 소년은 이제 갈 곳도 없다.

이대로 복지국의 볼보에 처박히면 모든 게 끝나 버린다.

소년은 기어이 복지국 직원의 손아귀를 벗어나 얼음이 녹기 시작한 강가로 달려간다.

강치를 잡는 구멍 위에, 슬슬 금이 가는 구멍 근처에 서서 복지국 직원과 맞선다.

힘없는 작은 소년이 거대한 권력과 맞서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죽음과 맞바꾸어도 좋겠다는 각오를 할만큼 소년에게 국가의 획일적 복지는 끔찍했고

생전 처음보는 마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다정했다.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해피엔딩이다.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소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머리를 맞아 기절한 강치처럼 질질 끌려다니던 소년이 한 사람의 자아를 확인하며 우뚝 서는 과정이 진실하게, 또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자국의 사회문제에 대해서 신랄하게, 미화하지 않고 써내려간 작가의 서술방식도 눈길을 끈다.


무더운 여름, 차갑고 날카로운 북유럽의 스웨덴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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