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표정있는 역사 7
호사카 유지 지음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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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2에서 밤10시쯤해서 지식강의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호사카 유지교수가 나와서 사람좋은 얼굴로 약간은 일본억양이 들어간 한국말로 일본과 한국의 문화차이를 설명하는데 재미있었다."북플"에서 이책을 읽은소감들을 보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호사카선생이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책을 보고 알았다.그런데 한국이름은 왜 안쓰는걸까?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나라"라는 표현대로 같은것 같지만 다른모습이 참 많다.

선비와 사무라이의 비교는 아마도 지배층에 대한 비교일것이고,그것이 일반대중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이책에서 비교한 한,일간 학교의 체육시간과 스포츠동아리에서도 그런것이 드러난다.일본은 사무라이의 영향으로 무술연마를 중요시 여겼던 영향으로 체육시간을 중요시 여기는 반면 한국은 과거를 통해 출세를 이루던 영향으로 입시위주의 교육이 더 강하다는 얘기는 공감이 간다.

앞서 읽었던 "역설의 군대"일본군에서도 군대가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일본의 모습은 근대화가 되었어도 사무라이시대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 볼수 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에도막부를 타도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예전 도쿠카와막부와의 전쟁에서 진 히데요시측 사무라이들이라는것이다.그들은 "미토학"이라는 성리학의 아류를 발달시켜 "국수주의적 세계관"으로 "존왕양이"를 명분으로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주변국을 침략하는 과정을 밟아 나간다.

임진왜란때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이란 유학자를 통해서 성리학을 받아들여 조선에 대해 문화국으로 대우하던 시대에서 18세기 들어오면서 서서히 국수주의적 시각이 대두되면서 조선에 대한 멸시와 침략본성이 본격화되었고,히데요시측의 메이지유신이 성공하면서 임진왜란시기 조선정벌이 찬양화되고 "정한론"이 일었다.이러한 경향이 한일합방,일제식민지까지 이어져 왔다고 볼수있다.

그리고 선비는 국가통치의 원리를 성리학에서,사무라이는 손자병법에서 찾았다고 하니,얼마전 읽었던 "마오쩌둥평전"에서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끈 마오쩌둥의 전술의 바탕이 손자병법이었다고 하는데 손자병법은 수천년간 동아시아의 전쟁의 지침서 역할을 톡톡히 했던듯 하다

다만,선비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조선의 역사부분이라서 흥미가 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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