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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 김영하의 '검은 꽃'을 읽었었다.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는데, 오래 잊고 있었다.
구한말의 혼란기에 일본의 지배 하에 사느니 새로운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자는 의도로 가솔을 이끌고 멕시코로 이민을 떠난 양반 가문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난다. 인상적인 것은 그 양반가의 조신한 딸이 배 안에서 또래의 평민 남자를 만나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던 장면이다. 양반, 상놈이 사라진 멕시코 땅에서 권위를 잃고 추락해가던 양반의 모습, 오래 가져왔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갈아타던 사람들의 모습, 심지어 혁명운동에 가담하기까지하는 모습 등등. 기발한 상상력과 막힘없는 이야기 구조, 잘 읽히는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어떤 평자는 김영하의 소설에는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다. 격변기, 민족의 운명이 갈라지는 시대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역사가 보이지 않고, 역사는 단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이라는 지적, 어느 정도는 공감했던 것 같다.
요 며칠 사이에 읽은 김영하의 소설들. 우선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실려있는 단편들.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소설은 '사진관 살인사건'이다. 쓸쓸한 유부녀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사진작가. 돌연한 유부녀 남편의 죽음. 용의선상에 오른 두 사람이 형사에게 털어놓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딴판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결국 살인자는 엉뚱한 다른 사람이었고, 두 남녀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인 것으로 밝혀진다. 형사 앞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헤프고 이상한 여자라서 자신을 유혹하려 했지만, 자신은 끄떡도 안 했다고 이야기하는 남자. 진실이 밝혀진 후 사진관에 찾아가서 우는 여자를 감싸안는 남자. 뭐랄까. 현실의 강퍅함 속에서 모처럼 찾아온 사랑의 진실마저 감춰야 하고 사랑의 씨앗은 결국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 느낌. 남자보다 여자가 더 진실에 가까운 말을 했다는 것, 남자가 혹여 자신의 남편을 죽였을까 두려워했다는 것, 남자가 범인이 아님을 알고 안도하는 여자의 모습... 외로워보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이 쏠렸다. 물론 표제적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일상 속에 가득한 이토록 철저한 무관심, 개인주의를 이렇게 재치있게 드러내놓다니. 그 반짝이는 재능이 놀라웠다.
다음으로 퀴즈쇼. 그의 빛나는 단편보다 맥이 빠진 느낌이랄까. 오히려 예전에 읽었던 검은꽃보다 인상이 희미하다. 일종의 연애소설이고 성장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설인데. 연애담은 너무나 모범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성장담은 너무 서둘러 끝을 맺은 것 같은 느낌. 현실 속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20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냥 소설 속의 남녀로구나 하는 비현실성이 더 크게 와 닿는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회사'의 모습은 현실의 은유로서 주인공의 정신적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 설득력이 더 느껴져야 할 텐데. 말 그래도 텔레비전의 퀴즈쇼를 관람하듯, 그 절박함이 잘 와닿지 않았다.
풍부한 상상력과 재미있는 이야기, 유려한 문체,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풍부한 문화적 상식. 이런 것들이 김영하의 매력인 것 같다. 역사와 현실을 다룬다고 하지만 어딘지 살짝 발을 빼고 있는 듯한 느낌? 생생한 땀냄새와 살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포장된 세련됨? 이런 것들은 김영하를 좋아하는 작가로 말하기를 망설이게 하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우울하던 요 며칠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