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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하나님 말씀인가? -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
재클린 E. 랩슬리 지음, 정대준 옮김 / 도서출판100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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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안전하게’ 읽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들은 특별히 교단 전통에서 큰 비중을 자리하는 신학자에 의해,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만들어진, ‘교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안전하지 않은(?) 해석을 접할 때면 당혹스러움을 표하곤 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성경을 ‘다양하게’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본문은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여성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등의 각자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읽는 것이 필요하고, 또 때로는 ‘다양하게’ 읽는 것이 오히려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방식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는 성경 해석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성경본문을 읽어갈 때에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기술적인(technical) 측면입니다. 쉽게 말해 성경본문은 텍스트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기록되지 않는 것을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을 상상할 때에도, 이미 기록된 텍스트를 근거로 상상해야 마땅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성경본문을 읽는 방법에는 ‘옳음’과 ‘틀림’이 (모호하긴 하지만) 구분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능숙하게 읽어내고, 누군가는 미숙하게 읽어내니까요. 하지만 성경본문을 읽어감에 있어서 기술적인(technique) 측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예술적인(artistic) 측면입니다. 같은 텍스트를 읽었을 때에 기록된 사실관계를 틀리는 것은 기술적인(technical) 오류입니다. 하지만 기록된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지요. 예컨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군가는 아버지에게, 누군가는 첫째 아들에게, 누군가는 둘째 아들에게 감정이입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겠지요. 즉 이는 예술적인(artistic) 측면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의 성경읽기는 꽤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언급한 백부장의 종, 즉 파이스 논쟁이 한 예입니다.) 대다수의 비판은 사실상 해당 성경 읽기가 약간의 기술적인(technical) 오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즉 자신이 미리 간직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개연성이 떨어지는 방식으로 읽어내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측면이 있지요. 비판을 하는 입장에서는 성경의 기록된 문자를 최대한 존중해서 읽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그런 읽기를 시도하고,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다소 실존적인 읽기 경험을 추구하는 경향 혹은 그런 읽기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읽기에 있어서 ‘독자’에 더 방점을 두느냐, 혹은 ‘텍스트’ 혹은 ‘화자(하나님)’에 더 방점을 두느냐의 차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볼 수 있습니다. 기술적인(technical) 측면과 예술적인(artistic) 측면이 꼭 충돌하는 걸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측면은 읽기의 서로 다른 영역이며, 상호보완되어야 마땅합니다. (사실 모든 이들은 미숙하든 능숙하든 기술적인 읽기를 하고, 모든 이들은 텍스트를 자신의 입장에서 예술적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누군가는 의식하고, 누군가는 의식하지 못하지만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기술적인(technical) 측면을 존중하면서도, 여성신학적 읽기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네, 바로 재클린 E. 랩슬리의 <이것도 하나님 말씀인가? :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가 바로 기술적인(technical) 측면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예술적인(artistic) 측면에서 여성신학적 가치를 읽어낸 사례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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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류의 장르는, 바로 ‘서사’입니다. 성경은 흥미롭게도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시편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세기 서사로 시작됩니다. 서사는 우리의 사유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사는, 의외로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중심 서사 외에도 다소 (우리 입장에서는) 불필요해보이는 단서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용규 선교사의 <더 내려놓음>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에서 첫 번째 아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환대한 아버지에게 집중했을 뿐이지요. 성경 서사가 매력적인 점은, 이처럼 우리가 읽는 방식에서 소외된 캐릭터, 소외된 대사, 소외된 장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점이 바로, 우리에게 텍스트를 해석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창출합니다.

재클린 E. 랩슬리의 책 부제가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에서 첫째 아들의 서사는, (적어도 이용규 선교사의 <더 내려놓음>을 접하기 전의 저에게만큼은) 성경의 텍스트에 기록된,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세미한 소리’입니다. 저자는 야곱과 라반의 서사 속에서 라헬의 목소리를 발굴해내고, 첩의 시체가 토막난 사사기 마지막 서사에서도 살해당한 첩의 목소리를 발굴해내고, 출애굽기 초반부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그리고 룻기에서는 나오미의 목소리를 발굴해냅니다. 우리의 주류 읽기 방식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세미한 소리’를 부각시키는 것이죠. 이는 이미 기록된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이기에, 매우 기술적인(technical) 읽기입니다. 오히려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읽는 것이 기술적으로(technical) 미숙한 읽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자는 성서학자 특유의 꼼꼼함으로, 히브리어 특유의 늬앙스를 잡아내며 매우 능숙한 기술적인(technical) 읽기를 구사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여성으로 살아온, 그리고 페미니즘의 가치를 충분히 드러내고자 하는, 저자 고유의 문제의식과 매우 예술적으로(artistic)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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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말 그대로 정말 재밌었습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가 튼 저자의 내공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세 가지 정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술적인(technical) 측면과 예술적인(artistic) 측면을 두루두루 갖춘 성경읽기의 예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서사로 기록된 성경본문을 읽어나가는 모범적인 사례와 함께, 성경본문의 주된 내용 대다수가 서사로 주어졌다는 의미에 대해 좀 더 곱씹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미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는 존 바턴의 <온 세상을 위한 구약 윤리>에 보면 마사 누스바움의 이론을 바탕으로, 구약본문의 서사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윤리를 형성해나가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실제 예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실제 설교에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라헬의 이야기에서는 딱 여전도회에서 설교하면 좋을 것만 같은 인사이트를 얻었고, 룻기의 이야기에서는 고통에 대해서 욥기와 함께 엮어서 설교하면 좋을 것만 같은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사사기 후반부와 출애굽기 전반부를 다루고 있는데 이 또한 설교로 엮어내기 좋은 내용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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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안에서 사는 법 -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 충실하게 살아가기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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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는 인간이 ‘시간’에 갇혀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축복이라 말한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구속(redemption)에 대해 말하고,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지혜를 말한다. 읽어가는 내내 구속받았던 과거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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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재 - 계시, 화해, 성육신에 관한 과학적?삼위일체적 탐구
토마스 F. 토렌스 지음, 김학봉 옮김 / 사자와어린양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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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학문체계에서 학문을 탐구하는 방법론은 제 각각 분절되어 있었다. (마치 삼신론처럼) 분절되었기에 더욱 섬세하고 예리한 방법론은 특정 ‘사실’을 발견하는데는 탁월해보였지만, 역설적으로 ‘진리’에 다가가는데는 길을 잃게끔 만들었다. 하여 본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하나님은 세 분이지만 동시에 한 분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것이지만 또한 인간의 것이다. 즉 (삼신론처럼) 분절된 단위보다, 더 근원적으로 분절된 단위 사이에 맺고 있는 관계 자체를 (마치 삼위일체처럼) 탐구할 때에야 비로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통찰이다. 이는 뉴턴의 (정교하지만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이론에서 맥스웰과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모호하지만 전체를 포괄하는) 이론으로의 전환과도 꼭 닮아있다. 


*실제 저자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전문가인 동시에, 삼위일체 신학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영어로 옮겼다.


전체를 포괄하는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하는 저자답게, 신학의 본령을 거칠고 담대하게 서술해나가고, 근대의 분절된 학문체계에 의해 가리워젔던 기독교 신학의 진리를 복원해나간다. 그리고 가끔은 (저자 스스로 깊게 고뇌했을) 홀로코스트 문제에 관한 무척 예리한 통찰까지 돋보인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형벌대속론의 한계가 어디서 발생했는지도 알 수 있으며, 왜 동방정교회의 신학이 주목을 받게되었는지, 또한 삼위일체 신학이 어떻게 ‘신화화’ 내지는 ‘만인구원론’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보는 눈이 있다면.


대가의 책이라 어려울 수는 있지만 어렵게 읽어낼 수만 있다면 후회하지는 않을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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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물가 2024-06-2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한 서평 감사합니다.^^

쉴만한물가 2024-06-2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 4일 저녁 7시 30분 유튜브 라이브로 역자와의 만남을 갖습니다. 시간 되시면 들어오세요.^^
https://youtube.com/live/yzfA00E4oP4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사유의 뜰 1
김상봉 지음 / 온뜰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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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김상봉 교수께서, 현 민주주의 위기를, 진보 세력의 위기로 성찰한 후, 영성 없는 진보였기에 민주주의 위기를 마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책입니다.

먼저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보 세력에 국한해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사회의 민주주의 역사는 시민혁명의 역사요, 이를 뒷받침한 진보 세력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즉 애초에 보수 세력은 민주주의의 진전 가운데 아무 것도 헌신한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은 결국 진보 세력 자체가 위기를 맞이했다는 말과 다름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함석헌은 3.1운동에 참여해 총칼로 무장한 일본 군경 앞에서 비무장으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용기의 발로만이 아니라, 적에게도 이성과 양심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생사를 건 투쟁 가운데서도 보존되는 이런 믿음이야말로 영성의 발로이다. (…) 안중근이나 함석헌이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굳건히 견지했던 내가 전체와 하나이며, 적도 나의 일부라는 믿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P.105)”
이어서 진보 세력의 위기는 ‘영성의 부재’라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앞서 인용한 문장처럼 <전체>와 <나>가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일반적인 <나>는 곁에 있는 <너>의 고통조차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예컨대 전태일 같은 사람은) <세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깁니다. 세계라는 <전체>가 곧 <나>와 분리되지 않는 하나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는,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긴 사람들의 분투가 있었습니다. 전태일도, 이한열도, 그리고 당시 민주주의 투사들은 대한민국 사회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을 일궈냈습니다.
그렇다면 달리 물어볼 수 있겠습니다. 왜 오늘날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때처럼,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영성’의 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타자를 향한 애틋한 사랑의 자리는 정치권력 투쟁을 위한 암투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2022년에 개봉된 영화 <킹메이커>에 등장하는, 고 이선균 배우가 맡았던 서창대 역할을 숙고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민들을 위해 일어났지만, 시민들을 위해서는 선거에 이겨야만 하고, 따라서 이를 위해서 결국 시민들을 개 돼지 취급하는 그의 면모는, 오늘날 ‘영성’이 사라진 진보 세력의 민낯입니다.
분량은 짧지만 충분히 곱씹을만한 문장들과 논리 전개가 넘쳐납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민주주의’와 ‘공화국’ 사이의 간극에 대해 지적한 세 번째 챕터의 내용입니다. 모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를 담은 체제가 민주주의입니다. 각자 한 표씩 행사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국가가 모든 국민의 이익,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공화국입니다. 민주주의는 “By the people”이라면, 공화국은 “For the people”겠지요. 현 대한민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공화국으로 이어지지 못해 오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정부에 시끌벅적했던 부동산 담론, 코로나 자영업 담론, 그리고 오늘날 간협 혹은 의협과의 팽팽한 대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각자 한 표씩 행사하는데, 막상 이익은 누군가가 더 누리고 있는 현실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초래했다고 볼 수 있지요.

현 정국에 관심이 한 풀 꺾여버린 이들에게 본서를 권합니다. 또한 정치현실 속에서 분노에만 사로잡히는 분들께도 권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언어가, 구체적인 역사 현실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변주되는지를 마주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새삼 생각도 많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근래에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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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고 - 고난 중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다, 예레미야애가 묵상집 신학과 신앙을 잇는 시리즈
전원희 지음 / 지우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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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40일 묵상집’을 컨셉으로 출간되었다. 하지만 막상 꼼꼼히 내용을 뜯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묵상집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예레미야애가를 스터디하는 가이드 느낌이 든다. 분량이 길지 않은 서론부에만 17개의 각주가 등장한다. 쉽게 말해 저자가 스스로 예레미야애가를 한 절, 한 절, 원어로 읽어가고 연구한 알짬들의 모음에 가깝다.

지금껏 ‘묵상’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정해진 본문을 관찰하고, 가이드를 따라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을 장려했다. 하지만 본서는 본문에 대한 관찰-해석단계보다는 학습을 장려하는 모양새다. 실제 저자 스스로가 히브리어 본문을 살펴가며 연구한 흔적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후 등장하는 적용 도움 또한 (우리가 흔히 해오던) ’적용’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있기보다는, 저자의 관심사인 ‘신학’과 ‘신앙’을 연결하고자 궁리한 내용에 가깝다.

따라서 본서의 장르는 Qtudy라고 보면 어떨까? Quiet time에 예레미야애가를 Study하기를 장려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 40일 분량으로 나뉘어져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더 시간을 들여 하루에 1장, 2장, 3장, 4장, 5장, 이런 방식으로 함께 공부하는 것도 오히려 좋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묵상집’은 본문이 A를 말하더라도, 이를 기반으로 우리 삶에 (전혀 다른 영역이라도) 필요한 B의 메시지를 끄집어내는 것을 사실상 장려해왔다. 이를테면 애가의 몇몇 단락 속에서 상사가 나를 괴롭히는 장면을 생각하고 그에 따른 해법을 궁리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장려해왔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하지만 본서는 이에 대해 소심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애가에 관한 가이드를 제안하고, 각각 본문과 관련된 해설을 덧붙이며, 끝에는 본문과 관련된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안한다. 즉 본문이 A를 말하고 있다면, A에 충실할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저자의 고민이 좀 더 담겨진,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진화된, Qtudy라는 장르의, 새로운 해설서를 만나고 싶다. 짧은 예언서, 혹은 에스더, 느헤미야나 에스라와 같은 책을, 묵상과 함께 학습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류의. 참고로 QT는 목회자 중심의 설교 혹은 성경공부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나온 새로운 장르였다. 평신도 또한 본문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신박한 메시지였달까. 그렇다면 Qtudy 또한 본문에서 (성급하게) 적용을 끄집어내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대 속에 필요한 새로운 장르는 아닐까? 본문에 대해 좀 더 귀울여보자. 본문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와, 본문을 연구하면서 들었던 질문을 조금만 더 정리해보자. 즉 실제 본문을 학습해보자. 이런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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