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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ㅣ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3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한번 본것은 모두 기억하고, 가끔 미래도 “기억”하는 가브는 시리즈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능력을 지녔지만 영웅적인 일을 하지는 못한다. 그저 주어진 시련에 의해 떠돌면서, 능력의 도움을 조금씩 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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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했다고 말하지 뭐!”
“안돼. 네가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선 절대 말하지 마. 네가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할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힘을 타고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 하지만 그건 아닌걸! 그냥 가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억할 뿐이야!”
“ 알아. 하지만 가비르, 잘들어. 정말이야. 네 기억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p.10
‘타고난 지도자’라는 말은 흔하다. 날 때부터 지도자인 남자는 많을 것이다. 지도하는 방법도 많고, 지도해갈 목표도 많은 법이니까. 그러나 내가 처음 안 진짜 지도자는 바로 이 열일곱 살의 소년 야벤 알탄테르 아르카였고, 그 후부터 나는 그를 기준으로 다른 이들을 평가했다. 이 기준에서 지도력이란 개인적인 매력, 활기찬 지성, 주저없이 책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정의하기 힘든 무엇.... 정의와 자비 사이의 긴장이 있었다.
p.98
행운의 신은 우리가 기도하는 쪽 귀가 먹었다고들 한다. 그는 우리 기도를 듣지 못한다. 그가 무엇을 듣고, 어디에 귀기울이는지 아무도 모른다. 시인 데니오스는, 행운은 하늘의 길 위에서 돌아가는 거대한 별들의 전차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나는 내가 어떤 기도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깊이 가라앉아 있을 때, 희망도 믿음도 소망도 없을 때 계속 행운이 나와 함께 있었음을 안다.
p.238
“누나는 언제나 거기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나는 조금씩, 울기도 하고 토막토막 끊어지기도 하고 순서도 뒤죽박죽인 채로 살로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누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망각의 벽은 무너졌다. 나는 생각하고, 말하고, 기억할 수 있었다. 자유로웠다. 자유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p.300
나는 복종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반도 끝의 진흙과 돌 위에 걸린 작은 바깥 마루에 무릎을 꿇고, 차분한 회색 하늘 아래 호수를 바라보았다. 도로드가 가르쳐준대로 호흡하면서 머리를 비우려했다. 이윽고 내 뒤에 검은 암사자가 걸어오는 것을 깨달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몰라도 내 두려움은 사라졌다. 내가 앉은 좁은 뜰에 꽃이 피어 있었다.
p.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