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미술치료 - 캔버스 거울
Bruce L. Moon 지음, 원희랑 옮김 / 학지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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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그림 과외를 받는 수강생은 평소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그림으로 풀었다. 그 수강생과 함께 전시를 준비하면서, 수강생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 그림의 주제가 ‘불안을 느끼는 자신의 공포’였다. 학문적으로 ‘불안’과 ‘공포’는 나눠봐야 하지만, 이 둘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철학이 있다. 바로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다소 어렵지만, 사람의 근원적인 불안을 깊이 마주하게 해주는 철학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마침 ‘실존주의 미술치료’라는 책이 내 눈에 보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실존주의 미술치료’의 저자 ‘브루스 문’은 마운트 메리 대학의 미술치료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이며, 실존주의 미술치료의 많은 힘을 쓰고 있는 임상미술치료자이다. 그래서 이 책은 ‘미술치료’를 ‘실존주의’라는 철학을 적용한 임상사례를 중심으로 다룬다.

‘실존주의 미술치료’는 미술치료를 공부하는 사람뿐 아니라 미술전공자, 일반 대중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게 구성되어있다. 실존주의의 핵심인 자유, 죽음, 소외, 무의미, 은유, 의식, 여정 등을 간단하게 정의하여, 슬프고 감동적인 임상사례들을 통해 서사적인 재미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의 실존주의 미술치료의 신조 ‘함께하기’, ‘개방하기’, ‘고통을 존중하기’와 ‘이미지 죽이기’, ‘이미지 듣기’를 통한 미술작품 이해하기는 앞으로 내 수업에 큰 영향을 줄 예정이다.

나는 수강생이 그림을 그린 후, 항상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을 연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강생은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 과정을 실존주의 미술치료 신조를 통해 더 깊이 이어갈 것이다. 그림은 단순히 표면만 담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자신의 내면을 담는다. 그 내면을 담는 작업을 나는 그동안 선생이라는 지휘로 멀리서 보았지만, 이제 함께 그림을 그리며 나의 내면을 개방할 것이다. 그 개방을 토대로 그림에 내면을 담는 여정의 장을 수강생과 형성하게 되고, 서로 내면에 감춰둔 고통이 드러난다. 이때 나 자신이 먼저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수강생도 함께 그 고통을 배제하지 않고 뛰어넘을 수 있다. 이 과정은 모든 예술 작업에서 적용되고, 책에서도 예술 작업 자체가 실존주의라고 주장한다.

나는 수강생의 그림을 항상 철학적으로 깊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그러나 실존주의 미술치료는 오히려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 ‘그림을 죽이는 것(이미지 죽이기)’이라 말한다. 그림을 함부로 내 주관으로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수강생의 이야기를 경청(이미지 듣기)하며, 그 경청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거나, 개방적으로 반응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강생은 그림뿐만 아니라 내면의 밀도도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한계는 고전이라는 것에 있다. 동성애, 트랜스 젠더, 보편 가족의 개념 해체 등의 현대 다양성 시대에 대한 실존적인 반영이 없다. 물론 저자는 기존 과학주의 심리학을 조심스럽게 비판하기에, 다양성 시대에 관한 생각도 조심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이런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갖추고 있기에, 이런 현대 다양성에 대한 부제가 아쉬울 따름이다.

미술치료를 이 책으로 처음 접한 나는 행운이었다. 아니 오히려 빨리 접했다면, 나 자신을 더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싫었다. 10년 동안 그림을 그리며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시간, 돈, 경험 등. 전부 그림에만 몰두했고, 그 때문에 오히려 내면의 성장이 정체되어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런 그림을 놓고 세상으로 신생아처럼 세상에 나와 방황하게 해주면서 길을 제시해 준 스승 ‘치치’. 하지만 치치는 저 멀리 여행을 떠났다. 이 책을 같이 읽고 싶었고, 분명 치치라면 같이 울어주고 웃어줄 건데. 이제 없다. 치치의 부제를 다시 상기하고, 이 책의 나 자신을 투영하며 읽었다. 읽는 동안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울고 울었다. 시간이 지나서 이제 괜찮을 줄 알았더니. 아직 치치의 부제가 덜 풀렸나 보다. 물론 아직 풀어야 할 나의 심연이 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모순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싫어하는 나와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나의 근본 불안. 그 심연을 그림 그리기를 통해 다시 접근할 것이다. 치치의 부제를 넘어 홀로서기의 한 걸음. 다시 그림을 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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