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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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장 아메리’는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유대인이며, 치열하게 나치와 싸우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고문도 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글을 쓰며 살다가, 그동안의 잔혹한 경험을 성찰해서 저서들을 냈고, 그 저서들은 지성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중 ‘자유죽음’은 큰 논쟁이 되었고, 이 책을 출간하고 2년 뒤에 한 호텔 방에서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유죽음’은 사회나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일방적인 용어로 ‘자살’이다. 저자는 자살자의 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부분을 비판하며, 자살을 ‘자유죽음’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한다. 그 주장을 위해 자살자의 내면을 철학적으로 성찰한다.

먼저 사회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살’은 ‘자살자’ 또는 ‘자살을 기도하는 자’가 기준이 아니다. 현생에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기준이다. 그 기준에 의해 자살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자살자의 입장은 어떠한가. 그들은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폭력적인 억압으로 느끼며, 그것에 억지로 맞추려다보니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다. 즉 살고자 하는 사람의 사회에 의해, 죽고자 하는 사람은 억압받는다. 그런 의미로 그들이 선택한 자살은 자유를 위한 선택이다. 그것이 자유죽음이다.

그러나 그 자유죽음에도 모순이 있다. 이를 위해 자유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면, 자유는 자신의 억압된 무언가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해방도 잠시뿐이고, 다시 자유를 위해 억압에서 해방작업을 시작한다. 이런 끊임없는 반복의 굴레를 죽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죽음 또한 잠시의 해방일 뿐이며 오히려 더 큰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자유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의 자유 굴레에 고통을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즉 그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자유죽음이 더 큰 고통이더라도,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옳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유죽음을 단지 피안이자 회피라고 보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현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 속한 인간이다. 그래서 자살을 안타까워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의외로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죽음의 선택이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들의 제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도 어느 순간 자유죽음을 선택하고 싶을 때가 분명 올 것이기 때문이다. 단, ‘장 아메리’정도로 자유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끊임없이 고민한 다음에 선택했냐가 중요하다. 아무나 쉽게 자유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반대한다. 물론 그 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저자의 ‘자유죽음을 인간의 특권’이라는 말에 나는 반대한다. 이건 과학에서 증명되고 있듯, 모든 생명(동식물)이 자유죽음을 하는 모습과 흔적이 보인다. 그러니 자유죽음은 인간의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죽음은 생명의 특권’이다. 모든 생명이 삶은 선택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삶의 자유도 한정된 해방이다. 동식물은 죽음이라도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인간도 그렇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사회는 자유죽음에 대한 토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장이 열려야 한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그렇다면 그 그림자를 함께 안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장 아메리도 사회적인 생존법칙을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이다. 그러니 반대로 현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도 자유죽음의 자연법칙과 권리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서로 오가는 것이 건강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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