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공동체, 2021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안병은 지음 / 한길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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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는 말은 보통 언제 쓰더라, 대개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생각이나 행동 등을 보았을 때 우리는 '미쳤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든 간에 '정상'이 아닌 것을 '미쳤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은 무엇일까? 어떤 상태를 정상이라 말하는 것일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정상'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무엇보다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준에 따라 정상의 범주는 너울대는 파도처럼 요동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 속 정상의 범주는 보수적인 편이다. 무엇이든 10 사람 중 8-9 사람에게는 해당되어야 정상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정상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나머지 1 사람은 비정상인 사람 즉, 미친 사람으로 분류된다.


미친 사람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한 존재이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친 사람은 소수이다. 다수의 정상인 사람들은 미친 사람보다 힘이 셀 수밖에 없다. 결국 미친 사람은 정상인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 사회의 외딴곳에 격리되게 되고 이것이 최근까지 우리 사회가 정신질환 환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그들을 위한다는 말로 처방한 조치였다.


책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의 저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안병은은 ADHD를 극복하고 정신과 의사가 된 무척이나 인상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ADHD 성향을 오히려 직업적 변주로 활용하여 직접 현장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만나고 그들이 이 사회 속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본 책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저자는 지역사회 중심 치료를 강조한다. 관리와 통제라는 목적으로 무조건적인 입원 치료를 강조하는 것의 부작용을 강하게 경고하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역사회 서비스를 확대해나갈 필요성을 역설한다. 현재의 정신병원 입원은 자의에 의한 입원보다 타의에 의한 입원이 더 많다는 사실과 강요에 의한 입원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환자에게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신질환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 부족한 현실과 단순히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부 병원들의 열악한 서비스 등. 최근 사회적으로 정신질환을 받아들이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아직도 이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정신질환 역시 질환의 한 종류일 뿐이다. 신체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것처럼, 정신질환 역시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야 한다. 그들을 사회의 구성원에서 배제하기 위해 '억지로' 입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치료를 받으며 '회복'할 수 있는 진료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가 원활하지 않다고 해서 그들은 미친 것이 아니다. 아픈 것이다. 그저 몸이 아닌 마음이 아픈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나 또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마음껏 아플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프다고 말하지도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지 않은가? 아플 때는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마음일지라도, 아프다면 환자일 수 있어야 한다.







본 서평은 한길사에서 책을 무상으로 지원받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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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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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페미니즘의 모든 것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 따라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궁금한 입문자들에게 훨씬 다양한 인사이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본 책을 통해 배우고 정리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개괄적인 책 소개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1. 페미니즘은 정치적 입장이다.

→ 페미니즘을 정치적 입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정치적 입장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 했던 것 같다. 사회적 위치와 권리, 이익 등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려야할 당연한 가치들을 주장하는 행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 더 나아가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의 사회적 입장을 대변하는 페미니즘은 정치적 입장이다.


2. 페미니즘은 단순 여성중심주의와 다르다.

→ 페미니즘의 시작은 여권 회복일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역사적으로 존중받지 못 했던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여기서 '다름'이란 누군가와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차이가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말한다.


3. sex와 gender의 차이

→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sex와 gender의 의미로 확장하지는 못 했던 것 같다. sex로서의 구분은 여자/남자, gender로서의 구분은 여성/남성. 예전에 친구가 인원 파악을 하면서 '여성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말했었는데, 당시 '왜 여성이라고 말하지?' 의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야 미안해...!ㅠ


4. 남자들이 말하는 역차별의 진실

→ 남성이 아닌 남자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생물학적으로 남자로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얻게 되는 특권에 대해서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남자로 태어나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경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자들이 겪는 차별과는 확연하게 그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들의 불이익은 남성상으로부터 야기된,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발현되는 반면, 여자들의 불이익은 여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남성으로부터의 억압이라는 점에서 뿌리부터 다른 문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밖에도 페미니즘과 관련된 오해와 진실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는 책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크게 7가지의 질문으로부터 담론을 끌어내며, 우리의 삶 속 '자연화'된 문제들을 수면 위로 꺼내놓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저자가 용어를 대하는 자세였는데, 번역과 음역 사이에서의 고민을 솔직하게 풀어내며 단어 하나를 사용할 때에도 그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고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단어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그만큼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많은 시간 공부를 하고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책이었다.


한가지 아쉬운 부분은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다보니,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페미니즘 입문자가 아니라면, 더욱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본 책의 목차는 7가지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읽다가 지루해지면 관심 있는 다른 질문으로 건너가면 된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활용했던 방법!



이제는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담론이 된 페미니즘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두는 것은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필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이다. 개략적으로나마 대상에 대해 이론적인 개념을 정립하고 나서야, 진정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기 전, 도대체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개론서라 할 수 있다. 그대에게 필요한만큼의 지식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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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어떻게 쓸 것인가 서울대학교 글쓰기교실 연구노트총서 4
김지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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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일상에서 자율적 글쓰기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영화 감상 후 영화평을 작성하는 일이다.


시작은 그저 영화를 보는 순간의 감상을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에 몇 마디 적어보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점차 영화를 보다 진지하게 마주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좋아서 지금은 영화를 보고 나면 개인 블로그에 꾸준히 영화평을 올리고 있다. 누군가 나의 영화평을 읽고 공감을 표할 것이라 상상하면, 너무나도 달콤한 동기부여가 된다. 자연스럽게 더 좋은 글, 더 멋진 영화평을 쓰고 싶다는 갈망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던 우연히, 나는 책 『영화평 어떻게 쓸 것인가』를 만났다. 강렬한 제목이 두 눈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시작된 글쓰기였지만, 이제는 욕심을 내고 싶다. 영화평, 과연 제대로 영화평을 쓰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영화를 배우지 않았다 (두 번째 목차)


나는 과연 영화를 진지하게 이해해보려 했던 적이 있었나? 곰곰 생각해보았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관련 글쓰기를 즐긴다는 사람치고는 영화에 대해서 썩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없었다. 지난 나의 영화평을 돌아보면, 그저 순간의 감상을 담아내기에 급급하여 나조차도 글을 쓰며 무척 버거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도 자신이 없었던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영화 안에서 묘사되는 대상은 우연적 포착이거나 현실의 반영이 아닌, 필연적인 선택이자 연출자 및 제작자의 해석(pp. 38)'이라는 문장은 나에게 상당한 울림을 주었다.


영화의 모든 장면에는 의도가 담겨있다는 말은 어쩌면 너무나도 자명할지도 모른다. 제한된 시간 내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하는 운명 앞에서 무의미하게 낭비한다는 것은 너무 큰 사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번도 그 모든 장면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몇 몇 눈에 띄는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딱히 유심히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문득 나를 스쳐간 수많은 영화들이 궁금해졌다. 내가 놓친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어쩌면, 영화의 표면만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영화평 어떻게 쓸 것인가』는 이처럼 영화를 마주한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부터 시작해서 영화와 관련된 글쓰기의 종류, 영화를 분석할 때 고려해야할 사항들과 분석하는 방법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특히 저자 본인이 직접 영화를 다루는 강의를 하며, 학생들이 영화 보고서를 쓸 때 놓치는 부분들을 핵심적으로 정리하고 있어 영화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현실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독자의 대상이 영화학도가 아닌 영화평을 쓰고자 하는 사람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어, 영화 분석에 필요한 개념적인 지식을 쌓기에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자신이 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뤄보고 싶다면, 널리 알려진 고전서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실용서로서 추천하고 싶다.


책 『영화평 어떻게 쓸 것인가』을 통해 단순히 즐기고자 하는 목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평을 쓰겠다는 목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확연히 다른 행위라는 것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작정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만 가지고는 훌륭한 영화평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정말 좋아하는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면, 그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중요한 부분들을 메모하는 습관과 영화의 구성 및 영화와 관련된 주변 정보까지 두루 살필 수 있는 꼼꼼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를 본 직후, 날 것의 감상을 녹여낸 글이 가장 솔직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이라는 믿음은 오만이었다. 나의 영화평이 누군가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나름의 비평이기에,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더 많은 단서들을 포착하고 더 많은 의미들을 찾아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겠노라 다짐한다. 영화를 구성하는 저마다의 요소들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나의 영화평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언젠가를 꿈꾸며, 오늘부터 영화와 더 세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눠보려 한다.


영화 안에서 묘사되는 대상은 우연적 포착이거나 현실의 반영이 아닌, 필연적인 선택이자 연출자 및 제작자의 해석 (pp.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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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8일 - 생각할수록 애련한 조성기 오디세이 1
조성기 지음 / 한길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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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죽음, 그 8일의 기록을 소설로 풀어낸 책 <사도의 8일>.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시선을 통해 진행되는 이야기는 단지 뒤주에 갇힌 후의 상황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리고 영조 사이의 사건들 또한 회상의 방식을 통해 전하고 있다.


 

사실 나는 본 소설을 읽기 전, 사도세자를 그저 아버지 영조의 잔인한 처사로 뒤주형에 처해진 가여운 인물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사도세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쩜 자신의 아들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갔던 아버지의 연유와 그러한 형벌을 받게 된 아들의 사연을 궁금해본 적이 없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두 인물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따라서 소설을 읽으며 마주한 역사적 사실들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세자가 의복을 입는 일을 병적으로 기피했다는 것도, 심사가 뒤틀리면 살생을 저지르곤 했다는 것도 다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이었다. 즉, 사도세자가 단순히 억울하게만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본 소설을 통해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을 단순히 그의 잘못이 야기한 결과라고 하기엔, 그 과정에서 아버지 영조의 행적이 수상스럽다. 완벽을 추구했던 임금 영조. 역사는 그를 성군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소설 속 영조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는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자유로운 성품에 무예와 예술에 소질을 보였던 사도세자와는 달리 충과 효, 예를 중시하며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했던 영조는 사도세자를 품어주기엔 여유가 없었다. 영조의 호령 앞에 아비의 정을 갈구하던 사도세자는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정신적으로도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스트레스가 병이 되어 점점 망가져가던 사도세자. 따라서 온양온천으로의 요양을 위해 홀로 궁 밖을 나섰을 때, 궁에서와는 달리 어질고 현명한 군주로서의 태도를 보이는 부분에서 상당한 인상을 받았다. 그의 문제가 단순히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또는 따스한 말 한 마디를 건네주었다면, 부자 사이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웠다.


내가 사도세자였더라도 그의 자리를 감당해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만큼 그를 바라보는 혜경궁 홍씨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싶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세자의 곁을 지켰던 그녀. 세자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했을까? 더구나 자신의 남편이 뒤주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심정은 도대체 어떠할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정말이지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혜경궁 홍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연민이었을까? 공포였을까? 다른 건 몰라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 책 <사도의 8일>은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어떠한 심경이었을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을 더해 풀어간 소설이다. 따라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사건들을 딱딱하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감성적으로 역사를 배울 수 있어 단순 역사책을 읽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통해 들으니 훨씬 몰입감도 좋고 역사를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한 인물의 사연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어 속도감 있게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더불어 영조가 아닌 사도세자가 되어 글을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입장에서 영조를 바라보는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본 소설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역사는 영조를 칭송하기에, 사도세자의 입장에서 영조를 바라보는 것은 영조를 이해하는 또 다른 시선을 선사해줄 수 있다 생각한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왕실의 관계가 아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편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역사 시간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이야기가 생소하기 그지 없다. 책 <사도의 8일>을 읽으며, 역사가 흥미롭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들의 관계가 파국에 치닫게 되었는지, 만일 지식백과와 같은 글을 통해 읽었더라면 잘 읽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명하게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을 통해, 이야기를 통해 접하니 각 인물의 마음을 감히 헤아려볼 수 있었다. 더불어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서도 뒤주형을 바라보고 있어 당시 왕실 여성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본 소설은 여러모로 나에게는 단순한 소설책이상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두루 살필 수 있게 해주었고 꺼져있던 역사 흥미를 북돋아주었다.


책 <사도의 8일>의 부제목은 생각할수록 애련한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가여웠던 것 같다. 그 가여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역사가 말하는 사도세자는 그의 삶에 얽힌 배경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자진하여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본 소설의 문체가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게 느껴졌다. 무언가 해탈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뒤주 안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나라도 기운찬 문체의 글은 쓰지 못 했을 것 같다. 사도세자가 조금이라도 덜 아팠기를 바라며, 삶의 미련이 사라진 듯한 문체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그것이 그를 위로하는 최선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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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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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저서를 몇 권 읽게 되며, 그녀 철학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책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한나 아렌트의 생전, 실제 그녀와 교류한 경험이 있는 저자 덕분인지, 한나 아렌트가 주요하게 문제시했던 현상들을 알기 쉽게 안내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한나 아렌트, 그녀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일생동안 관심있게 다루었던 '난민' 문제에 대한 일부를 본 글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난민, 이제는 일부 국가의 문제를 넘어서 국제적 현상이자 사회 문제로 자리하게 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난민 문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난민 문제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작년, 제주도 난민 이슈가 터지며 국가 차원에서 난민들에 대한 처우를 고민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갑론을박도 심심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18년간 무국적 상태였다고 한다. 맘 편히 몸을 누일 나라가 없다는 사실은 그녀의 삶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다양한 난민들을 만나며, 난민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녀의 문구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권리를 가질 권리'라는 문구였다. 그녀에 따르면 난민들은 절대적인 국가 내 국민으로서 인정받지 못 하기에 누구보다 나라의 성실하게 협조하며 최고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국민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기는 커녕 '의견을 가질 권리'조차 박탈당하게 된다. 그 결과 인권을 주장할 자격조차 없는, 인간임을 인정받지 못 하는 '잉여'로운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녀가 난민 문제에서 역설하고 있는 바이다.


왜 나는 한 번도 난민들의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 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난민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갈 수 고향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 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토록 모른 척해왔던 것일까? 인권을 말하기 앞서,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먼저 논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절대적인 기준 인권. 그들에게는 이 너무나도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인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조차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내집단과 외집단을 확연하게 구분하여 조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가란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가 어떠한 집단 내에 소속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적용 가능한 제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한 국가에 속한 사람이 또 다른 국가에서도 국민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것은 제재의 대상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민, 그들의 경우는 이와 같은 기준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그런 그들에게 '당신들은 외집단이니, 우리의 국민들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선을 긋는 행위는 애초에 잘못되었다. 그들이 소속된 집단이란, 이제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삶 속에서 난민 문제에 대해 첨예하고 심도 깊은 논의를 전개해나갔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그녀의 논의가 현 사회에서도 똑같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수면 위에 드러난 난민들의 현실이, 아직까지도 개선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가슴 아프다. 사람들은 때때로, 보이는 것에 휘둘려 진짜 중요한 것을 보지 못 하곤 한다. 책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를 읽으며 난민 문제 또한 우리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잃은 것은 단지 나라만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즉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권리. 그들이 궁극적으로 잃은 것은 바로 이 '권리를 가질 권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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