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 - 철학자 김진영의 아포리즘
김진영 지음 / 한길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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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요즘인 것 같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담긴 의미를 곱씹으며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지금이 좋다.


장황한 글만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담담하게 끝맺는 마침표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책 <사랑의 기억>을 만났다.

책 <사랑의 기억>은 철학자인 저자가 남긴 삶과 사랑의 아포리즘이라고 소개된다. 아포리즘? 아포리즘이 무엇일까? 낯선 단어였다. 찾아보니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라고 한다. 멋진 의미였다. '깊은 체험적 진리'라는 표현은 아무나 가닿을 수 없는 표현인 것 같다. 나의 체험을 감히 깊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기 전에 아포리즘을 한 편이라도 써볼 수 있을까?


추억의 밖

동물원에 갔다.

곰을 봤다.

시멘트 우리 안에서

곰은 쉬지 않고 원을 그리며 돌고 또 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동이 곰에게는 반복일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동이 내게는 추억이건만.

곰아, 멈추어라. 멈추고

차라리 시멘트 장벽의 높이를 정확히 재거라.

나는 곰에게 충고한다.

곰이 빙빙 돌다가 나를 바라본다.

얘야, 곰이 묻는다.

네가 사는 밖은 정말 여기와 다르니?

(pp. 63)

저자가 동물원에 방문했었던 모양이다. 그때 한 마리의 곰을 본 것이겠지. 그 곰이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나 보다.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곰을 불쌍이 여겼던 저자는 곰에게 충고한다. '그렇게 돌고 있지만 말고 답답한 공간을 탈출해!' 그런 저자를 빤히 보던 곰은 말한다. '너부터 탈출해. 그 답답한 공간에서!'

이상하게 유독 이 글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항상 그런 것 같다. 상대방에게는 늘 객관성을 유지하며 현명한 대안을 제안하는 듯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부족하고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남에게 훈수를 두기 전, 지금 자기 자신의 상황을 먼저 돌아보라는 따끔한 곰의 질문에 마음이 쑤셨다. 나나 잘하자고!


+ 이 밖에도 책에는 아우를 기리는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아마..., 아우를 먼저 보낸 것 같다. 그 상심의 글들이, 덤덤한 듯 사무치는 글들이 참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낸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것 같다. 언제나 처음처럼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 어쩌면 책 <사랑의 기억>은 저자가 아우에게 쓰는 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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