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 - 열린 정치와 소통하는 리더십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오긍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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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관정요를 읽고

 

군주 된 자가 말을 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소!”

 

왜 일까? 군주로서 옳은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군주로서 옳음이란 또 무엇인가? 경전에 기록되었거나 고사에 등장하는 옛 성현들의 언행이다. 그렇다면 옳지 않음이란 무엇인가? 진시황이나 수양제처럼 욕 많이 먹는 왕들의 언행이다.

 

정관정요는 군주의 옳은 언행을 이야기 한다. 책의 부제는 옳음을 열림과 소통으로 풀었다. 시대를 읽은 탁견이다. 문제는 옳음의 기준이 뭇 백성의 눈으로 볼 때 지극히 상식 수준이라는 점이다. 평범한 상식적 행동이 고도의 윤리적 행위로 전환되는 것은 오직 군주라는 신분 때문이다. 중국의 황제가 약혼자가 있는 여자와 결혼하지 않는 것, 약속된 절차와 순서를 따르는 것, 과도한 사치를 하지 않는 것, 자신을 비방하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등이 높이 칭송되고 후세에 전할 만한 열림과 소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단순하다. 황제니까! 천자니까! 황제는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니까! 황제께서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한 것 아니냐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옳음의 기준이 사람마다 달라진다면, 즉 상대적이라면, 그 옳음은 기준으로서 이미 죽은 것이다. 사람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달라지는 자와 저울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와 뭇 백성의 윤리적 행위가 다르게 평가되는 것이 당연히 접수된다는 사실은 친()권력적인 편향된 윤리기준이 이미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이런 논의는 정관정요의 주인공을 당태종 이세민이라고 볼 때 가능한 비판이다. 하지만 필자가 볼 때 정관정요의 사실상의 주인공은 300번 넘게 간언하고 있는 위징이다. 보자. 이세민이 누구인가? 형과 아우를 계획적으로 살해하고 패권을 차지한 극악무도한 황제다. 아무리 공자와 맹자의 말씀을 술술 외우더라도 신하된 자로서 두려울 수밖에 없는 치명적 과거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이세민의 덕치(德治)와 인치(仁治)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나아가 이징이 누구던가? 이징은 이세민의 라이벌이었던 형님의 책사이다. 형님과 패권을 경쟁할 때는 실로 눈엣 가시였다. 이징의 사리분별력을 고려할 때 이세민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징은 이세민의 가족들 문제부터 태종의 공적을 높이고자 하는 행사까지 사사건건 반대한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시시콜콜 옳은 말만 한다.

 

이쯤 되면, 정관정요를 지은 오긍의 속내가 보인다. 오긍이 정관정요를 지어 바치고자 했던 중종은 공포정치의 대명사 측천무후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자다. 오긍은 무후의 전횡에 대해 비판 의식을 가지고 뭔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황후 위씨에게 시해되고, 정관정요가 빛을 본 것은 당나라 현종 때였으며, 오긍이 이 때 지은 정관정요의 서()가 번역되어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긍은 절대 권력의 전횡에 맞서 어떤 대안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걸까? 오긍이 보기에 당시 당나라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 군주의 통치술이나 개방적이고 군자다운 면면보다는, 위징처럼 눈치 보지 않고 입바른 소리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등장이었다. 신권이란 무엇인가? 왕권의 영원한 라이벌 아닌가? 신권도 당시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지방 명문세력에서 출발하여 성장한 신권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통하여 중앙에 등용된 이른바, () 계층이 그것이다.

 

오긍은 태어날 때부터 절대 왕권이 기고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오긍은 위징을 앞세워 사() 계층의 등용과 성장만이 현재 당나라를 보다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임을 정관정요를 통해 완곡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읽힌다. 게다가 정관정요에 등장하는 대화는 불과 50여 년 전, 당나라를 세운 태종의 일이니 상투적으로 거론되는 고사의 미담과는 차원이 다른 최신 모범 사례인 셈이다. 오긍은 현재 당나라의 왕권을 견제하고 균형 잡기 위한 합리적 신권이 없음을 알리면서 그 신권의 부흥을 책임질 사람으로 자신과 같은 사()계층을 자천(自薦)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긍은 현종에게 바친 서문에서 정관정요의 목적은 권선징악이라고 했다. 여기서 선과 악을 가르는 현실 정치의 기준은 다름 아닌 죽은 신권을 되살릴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었을까? 그렇다. 정관정요의 핵심 주제는 절대왕권의 신권 보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었을 현종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오긍은 옆구리를 꾹 찌르면서 말한다. “신하는 군주하기 나름이다.”

 

열린 정치와 소통하는 리더십의 고전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정관정요. 사실상 열릴 수 없는 절대 왕권의 시대에 신권의 부활을 꿈꾸는 한 사관(史官)의 신선한 도전이 돋보인다. 심리적 관계론인 유학 속에서 피어난 전략적 글쓰기의 모범으로, 오히려 한비자보다 오묘하고 영리하다. 이러한 고전번역을 새벽마다 하신 지 20년이 넘으셨다는 김원중 교수님의 노고에 머리가 숙여진다. 책의 번역이나 해제 그리고 편집까지 나에겐 전혀 손색이 없다. 위징 뒤에 숨은 오긍과 이야기했던 기억이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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