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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이불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59
앤 조나스 지음, 나희덕 옮김 / 비룡소 / 2001년 1월
평점 :
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쓰고 아이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슴슴한 웃음이 배인 눈에 따뜻한 초콜렛 빛깔의 피부. 얼굴색과 잘 어울리는 살구빛 잠옷 위로 덮인 조각 이불. 몸을 반쯤 일으킨 아이의 겨드랑이 아래로 이불이 만드는 부드러운 그늘. 이불을 뒤집어 쓰고 들어갔을 때 만나는 그 부드럽고 무정형이던 어둠을 바다 속으로도, 우주로도, 동화의 숲 속으로도 느껴봤던 이라면 누구라도 이 그림책의 표지를 예사로이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을까?
다섯 살인 딸이 아직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 책을 만났었다. 아직 아기도 없으면서 그림책을 사모으는 (비싼 ㅎㅎ) 취미를 가졌었다. {옛우물}에서 오정희는 꼭 같은 모양의 인형이 크기를 달리 해서 겹겹이 들어 있는 러시아 민속 인형의 이미지를 말하지만, 정말이지, 그가 누구이건 유년기의 씨앗을 배꼽 깊이 감추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이를 두고 6년 쯤 더 나이든 나는, 아직도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넘긴다. 그림들은 나를 웃게 하고, 두렵게 하며, 꿈꾸게 하고 길 떠나게 하며, 모험하게 하고, 잊었던 지혜의 칼을 찾아 손에 쥐어 준다. 내 곁에 앉은 작은 여자아이와 내 안에 오래 있어온 작은 여자 아이는 함께 그림책을 읽는다.
책을 열면, 속표지는 조각 이불의 안감, 녹두빛 바탕에 잔잔하게 붉은 사방 꽃무늬다. 검은 옛날 재봉틀 앞에 온갖 색이 꿈틀거리는 조각이불이 있다.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일어서서 니나는(책 속표지의 '니나에게'라는 헌정사 때문에, 난 아무래도 표지의 소녀가 니나인 듯하다.) 말한다. "내게 새 이불이 생겼어요." 이불을 끌고 걸어가는 니나. "커다란 새 침대에 덮을 거예요." 물씬물씬 자라나 이불도 침대도 새 것으로 바꾼 니나는 요즘 한참 크고 있는 모양이다.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우주복 디자인의 옷을 보면 절대 그보다 더 되어 보이지는 않는 이 작은 소녀는 실컷 '새 것임'을 뿌듯해 해놓고 이내 이불을 이룬 조각들이 쓰던 것임을 자랑한다.
태어나서 처음 썼던 커튼과 침대 이불, 아기 적에 입던 잠옷, 강아지 인형을 만들 때 썼던 헝겊과 제일 좋아하던 바지까지 이어붙인 조각 이불. 니나의 엄마 아빠는 지난 시간들을 모아서 니나의 꿈을 덮어 주려는 모양이다. 성장(成長)으로 얻게 된 새 이불을 자랑했지만, 성장의 빛과 과거의 시간은 퀼트 이불처럼 나란히 꿰매어진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디디지 않고는 꿈에 닿지 못한다. 연달아 이어진 조각들을 넘나들면서, 엎드린 니나가 추억의 결을 쓰다듬는 듯이 보일 때, 퀼트 조각 속에 잠자던 색채들이 자유로워지고, 헝겊 조각 속에 묶여 있던 풍선들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니나는 쑥색 코르덴 조각에서 빨간 벽돌 무늬 조각으로 건너뛰듯이 추억을 벗어나 꿈의 다른 공간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장판지의 추상무늬를 보고 개울의 흐르는 물 위에 누웠다고 상상하며 잔물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꽃으로 엮은 광주리 속에 앉아 날아와 앉는 새들의 고민을 들어준 건 또 어느 집에서의 꽃무늬 벽지 때문이었는지. 세수대야 하나 가득 물을 담아 끝없이 일렁이던 반사광만으로도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었는데...... 사물들은, 시침을 떼고 딱딱하고 근엄하게 어깨를 굳히고 눈을 감고 있거나 혹은 낡고 빛이 바래 졸 듯이 늘 그 자리에 걸려 있는 듯해도 쓰다듬을수록 많은 이야기와 생생한 감각으로 표정을 바꾼다. 오래된 것들이 가지고 있는 새보다 자유롭고 망아지보다 활기찬 힘.
내가 내 과거를 쓰다듬는 동안 니나는 강아지 인형 샐리를 찾아 꿈속의 마을을 여기 저기 헤맨다. 모든 부모가 아기의 삶이 풍요롭기를 소망하지만 그러나 엄연히 아이의 몫의 삶이 있다. 때로 무시무시한 터널을 지나야 할 것이고, 캄캄하고 음습한 숲을 지나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걷고 달리면서 아이는 어둠을 빠져 나오는 길을 익힐 것이다. 샐리를 찾아 나선 니나의 꿈여행은 노랗게 햇빛이 가득한 창과 함께 끝난다. 조각 이불을 감고 있는 니나는 참 따뜻해 보인다. 기억을 소중히 여긴 니나의 엄마 아빠는 기억되는 시간을 꽉 채운 사랑이 커가는 니나를 강하고 풍요롭게 할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책의 색상은 전체적으로 따뜻하다. 점점 깊어가는 밤,꿈과 현실, 환하게 밝은 아침이 니나 방의 창을 통해 표현되고 창 밖의 광선에 따라 변하는 방 안의 색채들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날개를 표지쪽으로 바깥에서 펼치면 니나의 조각이불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니나의 꿈 속 여정을 이불 무늬로 찾아 가는 것도 재미 있다. 짧고 적은 문장이지만 니나의 밝은 목소리와 자연스러운 숨이 살아 나도록 한 우리말 번역이 자꾸 눈에 시원하다 싶더니,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의 나희덕이었다. 시인의 나즉하고 맑은 목소리가 니나와 겹쳤던 모양이다.
조각 이불을 하나 샀다.
우주가 내게 또 다른 아이를 보낼까? 그 아인 사내아이일까, 계집아이일까? 물려받을 옷들을 모두 입어낸 다음에야 니나의 것과 같은 조각이불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이불 저쪽은 내가 세 살 되던 생일날에 입엇던 윗옷으로 만들었고요. 이불 이쪽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바지로 만들었어요. 모두가 너무 작아진 옷들이에요. 엄마가 샐리를 만들 때 썼던 헝겊도 여기 어디쯤 있을 거예요"..p7
"무시무시한 터널이에요! 빨리 뛰어 터널을 빠져 나가야겠어요. 샐리! 샐리! 샐리!...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