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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즈다 ㅣ 창비청소년문학 14
로버트 코마이어 지음, 김연수 옮김 / 창비 / 2008년 12월
평점 :
......나는 지금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으며, 여기는 매싸추쎄츠 주 마뉴먼트에 있는 31번 도로이고, 버몬트 주 루터버그가 목적지인데, 지금 미친 듯이 페달을 굴리는 까닭은 이 자전거가 변속기도 없고 흙받기도 없는, 있는 것이라고는 갈라진 고무 손잡이가 달린 핸들에다 제대로 먹지 않는 브레이크와 뒤틀린 바퀴뿐인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자전거, 오래 전 아빠가 소년 시절에 타던 종류다. 페달을 밟는 동안 차가운 바람은 마치 뱀처럼 내 소매 속을 기어 올라가고 외투와 바지 다리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나는 계속 페달을 밟고 또 밟는다.......
소설의 첫단락은 소설의 끝단락과 일치한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꾸러미를 전달하기 위해 지금 막 집을 나섰다.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도움을 받지 않고 고스란히 이 여행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소년은 그간 먹었던 약까지 모두 개수대의 쓰레기 분쇄기에 쓸어박았다. 천천히 1마일씩만 나아가기로 마음 먹는 소년. 자전거 위의 소년은 쉴새없이 페달을 밟아 나아갈 때만 소년은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여행의 초입에 만난 노인은 소년에게 지도와 충고를 함께 건넨다.
"누구도 믿지 마라, 날쌘돌이"
......나는 손을 흔들고 세차게 페달을 밟으며 몸을 돌린다. 내게는 가야할 목적지가 있고, 노인은 이미 과거의 인물이다.나는 떠난다. 내 곁에는 바람과 태양이 있다. 나는 자전거이고 자전거가 나다....
소설은 자전거 여행을 통해 아버지를(혹은 부모와의 기억을 혹은 자기 자신을)찾아 나서는 소년, 애덤 파머의 여정을 그린다. 그리고 나란히, 알 수 없는 곳에서 인물 A와 T가 나누는 대화를 보고서의 형식으로 담고 있다. A는 원인이 의심스러운 (자발적)기억 상실의 상태이다. 호의와 조력의 인물, T의 질문이 이끄는 대로 답변을 꺼내 놓는 과정을 통해 A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과 마주한다. 줄곧 도망치고 회피하려 하지만 A가 포기하지 않도록, 자상함과 인내심으로 T는 질문을 거듭한다. 그러나 회를 더해갈수록 A의 도피는 당당해진다. 그는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한다. 안간힘을 써, 진정을 다해..... 숨기는 것만이 A로서는 지키는 것이다. T는 과연 조력자인가?
A와 T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문서인 OZK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록물의 내용은, 인물 A에 대한 3차 연례 질의로, 앞서 12개월의 시차를 두고 가졌던 1, 2차 면담과 일치한다. 그러나 보고서의 내용으로 보아 A는 이전에 있었던 면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소년의 출발 역시 세번째였던 것일 수 있다. 매번의 면담마다 A가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애덤은 이전의 출발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애초에 자전거 여행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A가 거주하도록 조처된 폐쇄 지역 안에는 애덤이 자전거 여행 중 만난 인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음이 소설 말미에 드러난다.) 안쓰럽게도 소년은 면담을 통해 끌어낸 기억을 매번 다시 지우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따뜻한 위로와 엄마의 손길을 찾아, 그들이 함께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모텔을 향해 자전거에 올라탄다 .
애덤의 자전거 여행은 환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애덤의 출발은 매번 저항이다. T없이, 약 없이, 주사도 없이, 꿈도 회피도 없이 애덤은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 위의 소년은 쉴새없이 페달을 밟아 나아갈 때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지 않던가. 그 천신 만고의 여행 끝에 만난 '잠시-휴식 모텔'이 애덤의 부모에 대한 기억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라 해도, 혼자서 기억의 저편으로 돌파해보려는 애덤의 도전은 (혹은 꺾이지 않고 도전하고자 하는 욕구만이) 애덤의 정체를 확증한다.
면담에서, 기관은 소년이 가진 기억의 흔적을 탐색한다. 소년은 T의 도움으로만 과거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기관이 강자일까? 소년은 자신과 가족의 역사를 재구성하지만, 기관이 원한 정보를 차단한다. 기관은 결국, A가 정보를 가졌는지 가지지 않았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 소년은 기억을 차압당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기관은 A 를 제거할 수 있으나 A상태 이상의 정보를 A에게서 확인받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저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다.)
보고서 OZK 는 A가 숨겼을지도 모르는 정보에 초점을 맞출 뿐, 소년의 안전과 삶의 평화를 도외시한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시민을 통제하고 관리하며 공공의 안녕을 핑계삼아 시민을 억류한다. 관료 체제. 그들이 지키고 싶어한 안전이란 결국 누구의 안전인가?
베트남 전과 냉전논리의 70년대 미국은 아직도 68년을 햇살과 바람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미국의 청소년들은 이 책이 흥미로웠을까? 아팠을까?
우리 사회의 소년들은 어떨까? 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을 수 있을까? 희망도 꿈도 없이, 그러나 회피도 좌절도 없이 나아갈 수 있을까? 시민적 자각을 묻어 버리고 다만 국민의 틀 안에 모든 상상력을 가두기를 요구하는 T 앞에서.
소년들에게 의지가 있건 없건, 페달을 밟을 때에만 그들은 소년의 정체를 획득할 수 있다. 때로는 희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가 누구인가' 일 수 있다.
애덤은 홀로 남겨진 치즈다. 그러나 애덤은 자전거이다. 자전거가 애덤이다. 날아가지 못해도, 나부끼기에 깃발일 수 있다고 시인은 말했다.
70년대에 쓰여졌다는 작품은 당의도 바르지 않고 이 쓰디쓴 진실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