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 학생인권이 교육에 묻다 오늘의 교육 총서
한낱.최형규.조영선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 반 도희가 울상이 되어 교무실로 나를 찾아 온 것은 닷새 전쯤의 일이다. 도희 말로는 선도부 언니들이 생검(생활검열)을 나와 고대기를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도희는 머리 결이 유별나서 30분 이상을 고대기로 머리를 펴야 학교를 올 수 있다고 했다. 헌데 그날은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대강만 손질을 하고 학교에 와서 마저 머리를 편 모양이었다.


어제 도희가 그 일로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나는 학생부 담당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도희의 사정을 말해준 뒤에 앞으로는 학교에 가져오지 않기로 나와 약속을 했으니 돌려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히 부탁을 드렸다. 그러자 고맙게도 학교가 파할 무렵 도희를 학생부로 보내달라는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도희에게 그런 내용을 전해주자 금세 얼굴빛이 환해지더니 내게 한 걸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이번 수련회 갈 때 고대기 가져가도 돼요?”

“너 고대기 없으면 머리가 난리도 아니라며?”

“맞아요.”

“그럼 당연히 가져가야지.”


“정말요? 근데 수련회 가면 소지품 검사할 텐데 어떡하죠?”

“소지품 검사를 왜 해?”

“하잖아요. 거기 조교들인가 그 언니 오빠들이요.”

“내가 못하게 하면 돼.”

“정말요? 근데 선생님이 어떻게 못하게 해요?”


“응, 전에도 소지품 검사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못하게 해서 안했어.”

“정말요? 그래도 만약 하면은요?”

“내가 못하게 한다니까 그러네.”

“그래도요. 선생님 안 계실 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럼 내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써. 다른 애들도 그러라고 그래. 가방 큰 거 가져갈 테니까.”


도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사실을 동료교사들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건 안 봐도 뻔하다. 나를 보는 눈길이 부드러운 편인 몇몇 후배 여교사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도 이런 얘기는 아예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도 그럴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동료교사들과 공감대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이나 태도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더욱 대화와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무언가 기본적인 지식이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나 토론은 겉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서로 감정을 상하거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전체의 그림을 보지 못하면 장님 코끼리 이야기 하는 식으로 자신이 지각한 것만을 열띠게 주장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럴 때 한 권의 책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전체의 그림을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을 얻게 되면 부분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럴만한 책이 있느냐는 것이다. 다행히도 있다.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교육공동체 벗)을 펴면 이런 글을 먼저 만난다.      


‘어느 날 인권이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지,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인지 잘 모른다. 정체를 모르니 불안하다. 언론에서는 그것이 몹쓸 것이라고 난리를 친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일단 창고에 넣어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인권을 조금 먼저 만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왜 학교에 인권을 들여야 하는지, 학교에 들어온 인권이 학생들의 삶을, 교사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낼 수 있는지, 인권이 우리에게 어떤 세상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말을 해보기로 했다. -<책을 펴내며>가운데’ 


‘학생 인권이 교육에 묻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뜻밖의 선물’로 어느 날 교문 안으로 들어온 인권이 우리가 밥처럼 물처럼 먹고 마시는 교육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촘촘히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총 3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 ‘혼란을 통한 성숙’은 경기도와 서울 등의 학생인권 조례 제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6명의 필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절만만 뿌리 내린 학교 인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영선(서울 경인고)는 ‘체벌금지와 학생인권 정책이 학교에 혼란을 주고 있고, 혼란을 주어야한다’고 역설한다. ‘이 혼란으로 약자에게 냉혹하고 강자에게 관대한 이 사회 전체에 균열을 내야한다’고도 말한다. 혼란과 균열이 미덕이 되는 사회는 문제적 사회다. 말하자면 필자는 지금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 근거는 이른바 학교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거하려는 정부의 무지몽매한 정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들은 학교 폭력이 체벌금지 조치와 학생인권 조례 제정 이후에 더욱 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2010년 11월, 서울시 교육청이 ‘체벌 전면 금지 조치’를 내린 후 언론은 연일 학생이 교사를 폭행한 기사로 도배했다. 대부분 기사의 논조는 체벌 금지 이후 무서울 것이 없어진 아이들이 교사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정당한 지도도 우습게보고 대들다가 폭행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참 재밌는 논리다.(…) 지금 언론을 도배하는 상황은 그렇게 새로운 상황이 아니다. 갈등을 해결하려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아니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 우리 사회가 길러낸 아이들의 모습일 뿐이다. (11-12쪽)’


제 2부의 제목은 ‘교육과 인권, 그 사이’이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최형규(수원 유신고)는 교육과 인권 사이에 낀 교사의 딜레마를 털어놓는다. 그는 좋은 교사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교사라고 스스로 고백한다. 비록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지만 ‘교사는 학생의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학생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생각에 ‘그 만큼 교사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내면화하는데 일말의 회의나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학생인권을 만난 뒤로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그는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러다 ‘학생인권’을 만났고 요즘 내 머릿속은 ‘인권’ 문제로 가득하다. ‘인권친화적인 교사의 모습은 무엇일까’가 가장 큰 고민이며 과제다. 명쾌하게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교육을 하면 되지.’하고 말하기에는 교사로서 딜레마가 크다.(99쪽)’


듣기 싫은 수업을 거부하는 것도 인권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깨워 수업을 듣도록 만드는 게 교사의 역할인가? 여기에 교사의 딜레마가 있다.(101쪽)’  


수업시간에 졸고 있는 아이를 깨워야 하는가, 그대로 둬야 하는가. 이런 상황은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에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아이들이 책상에 엎어지는 이유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고서는 교사는 대강의 상식선에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 헌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학교에 인권이 들어온 뒤에 생긴 변화이다. 이제 교사는 그 상식 너머를 사유해야만 한다.    


이혁규(청주교대 사회교육과)는 ‘학생의 탄생과 인권의 유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학교 제도와 함께 근대적인 아동에 대한 관념이 생겨났지만 서양의 경우 그 과정이 아주 급격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한국사회에서 학교 제도는 세상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팽창하였고, 학교의 팽창과 더불어 학생이라고 불리는 집단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굳이 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제 한국사회에서 ‘학생’은 그 연령대의 아이들을 지칭하는 일종의 귀속적 호칭이 된지 오래이다. 다만, 필자는 거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왜 많은 사람들은 학생과 인권을 연결하는 것을 낯설어할까? 아마도 학생을 미완의 존재로 파악하고 성인기를 위해 학생들의 현재적 욕망이나 권리를 유보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통념이 우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를 위한 준비기로서만 학생 시기를 이해하면 할수록 학생들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학생들에게 당연히 보장되어야할 인권을 유보 혹은 박탈하는 기제로 작용한다.(112쪽)’


제 3부에서는 ‘인간적인 학교는 어떻게 가능한기’를 사유한다. 한 낱(인권교육센터 ‘들’)은 소비되는 인권과 유행하는 인권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들먹인다. 지금 ‘인권교육은 분명 그 어느 때보다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인권 교육인지는 모르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열악한 인권 현주소를 이렇게 아프게 짚어준다. 


‘2011년 5월,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경기 지역 청소년들이 <우리는 허락받아야만 인권의 자격이 생기나요?>라는 이름으로 항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에 따라 ’학생참여위원회‘를 모집하는 도교육청이 학교장 직인과 부모 동의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일부 학생들이 직인 없는 신청서를 접수하기 위해 민원실에 찾아가자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므로 받아줄 수 없다는 장학사의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164쪽)’


길은 멀지만 가야한다. 그 먼 길 끝에 고작(?) 고대기를 되돌려 받고 싶어 하는 한 아이가 서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소박한 견해를 ‘욕망은 인권의 다른 이름일 수 있기 때문이며, 학교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기 이전에 삶을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요약 정리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에필로그의 부제는 ‘학생인권조례가 탄생하기까지’이다. 여기에 소개된 세 꼭지의 글 모두 주목을 요한다. 뜨겁고 아픈, 그리고 아직은 걸음마에 불과한 우리나라 학생 인권의 역사가 한 눈에 밟힌다. 제목만이라도 일별해보자.


학생조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파란만장 학생인권 조례운동이 던지는 질문들


학생인권은 왜 우리를 뜨겁게 하지 못했나

-전교조 키드‘교사가 본 참교육과 학생인권


학생인권조례는 착한 어른들의 선물이 아니다

-학생들의 저항과 학생인권 제도화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름 아닌 ‘서울시 학생인권 사용 설명서’이다. 필자인 이형빈(전 서울 이화여고 교사)은 자신이 학교에서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학생인권 조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다음은 그 맛보기이다. 


 체벌금지


초보 담임 시절, 난 무모한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 교사였다. 모든 아이들을 사랑해야한 할 것 같았고, 모든 아이들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한 녀석이 담배를 피우다 걸렸다. 큰일이 난 줄만 알았다. 그 아이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 아차 싶었다. 그 아이의 종아리에 빨간 회초리 자국이 났다. 그 아이는 “왜 담배를 피웠느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느냐?”는 식의 나의 어설픈 추궁에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난 사실 그 아이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체벌은 그 아이와 나의 소통을 완전히 가로 막았다. 그 예쁜 종아리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회초리 자국이 내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다.


제6조(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①학생은 체벌, 따돌림, 집단 괴롭힘, 성폭력 등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260-261쪽)


강제 보충 야자 금지

강제 보충수업이 버젓이 시행되자 이제는 별별 반인권적인 작태가 벌어졌다. 소수 상위권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심화반 보충수업’, 소수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제공되는 ‘야간 자습실’ 운영 등 눈에 보이는 차별이 부끄럽지 않게 진행되었다. 강제 보충 야자에 저항하던 학생들도 아제는 스스로를 성적 경쟁에 내던지며 그 차별선 안쪽에 서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자발적 복종’이란 그러한 경쟁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제 9조(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교육 활동의 자유)

③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학생 의사에 반하여 학생에게 자율 학습, 방과 후 학교 등을 강제해서는 아니 되며,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교육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어서는 아니 된다.(263쪽)


차별받지 않을 권리


우리 반 아이 중에 학생인권운동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괜한 겉멋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진지했고, 다른 학생들의 인권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 아이는 성소수자, 흔히 말하는 동성애였다. 자기 안의 ‘마이너리티’로 인해 타인의 소주사성과 남모를 아픔에 대해 감수성이 깊은 아이였다. 그 아이와 나는 서로 못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그 아이는 자기가 동성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도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양성애자’라는 표현을 썼더니 그 아이는‘범성애자’가 옳은 표현이라고 고쳐 줬다. “양성애‘는 세상의 성을 여성/남성으로만 나누는 이분법적 표현이기 때문에 ’범성애‘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제 5조(차별받지 않을 권리)

①학생은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275쪽)

 

이쯤해서 다시 도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왜 수련회 때 고대기를 가져가려는 도희를 적극적으로 돕는 역을 자청했을까? 은연중에라도 나는 도회가 머리를 예쁘게 손질하고 싶은 욕망을 당연한 것으로(혹은, 건강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도희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한 행위는 아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 것뿐이다. 그런 나를 동료교사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낯설게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많은 사람들이 학생과 인권을 연결하는 것을 낯설어 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어제 도희는 수련회 때 고대기를 가져갈 수 있게 되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남학생들이랑 함께 수련회를 가는데 잠자고 일어나 머리를 제대로 손질하지 못하면 얼마나 마음이 찝찝할까? 그것이 도희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권이 학교에 들어 온 이후 우리 사회가 치르고 있는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비하면 도희 이야기가 너무 한가한, 적절하지 못한 예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랴? 나의 인권 감수성이 그쯤에 있는 것을. 그리고 나에게 인권이란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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