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교사인가 - 윤지형의 교사탐구 윤지형의 교사탐구 1
윤지형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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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교사인가


물음이 당혹스럽다. 가령, ‘교사로 산다는 것은?’ 혹은 ‘교육 불가능 시대, 교사는 가능한가?’ 이런 정도의 물음이라면 좀 덜 당혹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데 왜라니? 이 다분히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음이 외려 너무 빤해보여서 그랬을까? 그것도 그렇지만, 이 물음(혹은 책 제목)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은 짜증도 났다. 도대체 뭘 묻는 거야? 이런 걸 물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등등.   


‘최근 한 중학생의 자살 사건으로 나라 전체가 또다시 슬픔과 분노와 혼란에 빠졌다. 학교 폭력, 집단 괴롭힘. 성적 비관 자살이 새삼스런 사건은 아닐진대 우리는 이를 내부로부터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다. 이번만은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게 무망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책을 펴내며 5쪽)


저자 윤지형(부산 내성고, 국어)도 알고 있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그래서 ‘병든 사회가 병든 학교를 만든다는 것’을. ‘그러기에 누군가가 “학교는 죽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사회의 죽음, 인간의 죽음을 경고, 증언한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왜 교사인가’라니? 너무 한가한 질문이 아닌가. 아니, 이것은 교사에게 불편하고 무서운 질문일 수도 있다. 한국 교육의 총체적 난국의 책임을 교사 집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저간의 움직임에 기름을 끼얹는. 저자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다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아이들은 학교에 오고 간다. 학교가 죽었든 살았든, 교육이 가능이든 불가능이든 간에 초중고 학생 700만여 명이, 전국 방방곡곡의 1만 1천여 학교에, 밤하늘의 별들처럼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6쪽)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교사라면 누구도 이 엄연한 사실을 비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늦은 밤 우르르 학교를 빠져나가는 아이들, 교문을 나서면 대기한 봉고차에 실려 학원으로 직행하는 아이들, 아침 조례 시간이면 졸음과 피곤에 못 이겨 겨우 고개를 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곤 한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6쪽)


고맙긴 한데, 그 다음이 문제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우리 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사가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여야 가까스로 살아 있는 아이들을 계속 살아남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안고 저자 윤지형은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교사들을 만난다. 그들을 계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틈만 나면 교사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 대는 세상을 향해 “이런 교사를 보라”고 외치고도 싶었고, ‘세상이 학교를, 교사를 조금은 따듯한 마음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라서’였다. 그래야 ‘벽의 학교 벽의 교사들도 변화해갈 것’이라는 슬프고도 희망찬 생각을 하면서.


<나는 왜 교사인가>(교육공동체 벗)는 지난 2002년과 2005년 두 해 동안 월간 《우리교육》에 〈윤지형의 교사탐구〉라는 꼭지로 연재한 내용과 2009년과 2010년 새롭게 인터뷰한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더불어 길게는 10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 교사들의 열정적인 삶의 모습이 어떻게 전개되어 변화하고 발전되었는지 책 속의 주인공들이 직접 쓴 편지를 통해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다. 저자가 발품을 팔아 만난 교사들에게서 전염된 아픔이기도 했다. 이 아픔은 개인의 아픔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아픔이었다. 책이 저자의 인터뷰 기사와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책의 주인공들로부터 받은 편지로 구성되다 보니 갈수록 인간의 꼴을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험한 세월의 아픔도 보태졌다. 헌데 묘하게도 그 아픔과 부끄러움 속에 치유의 길이 보였다. 이 땅의 교사들에게, 학부모들에게, 혹은 조숙한(?)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1부 ‘어쨌든 아이들이 좋다’, 2부 ‘교사로 산다는 것’ 3부 ‘바람에 맞서거나, 바람이거나’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첫 꼭지의 제목이 ‘보리밭, 작은 연못, 풀벌레 그리고 미술시간’이고 3부 마지막 꼭지가 ‘래디컬한 인문주의자가 된 까닭’이다. 꼭지 제목만으로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교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임종길 교사는 (경기 수원 대평중, 미술) 어느 날, 학교에 보리밭을 일구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게 생각이나 하고 말 일이지 어디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인가? 무릇 농사란 자연의 때를 거스를 수 없는 법. 우선 내년 보리농사를 위해서 올 가을에 땅을 일구고 파종해야 한다. 겨울엔 보리밟기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임 교사는 동료교사들과 학생들을 설득하여 기어이 그 일을 해내고 만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보리밭으로 뭔지 모를 생기가 돌면서 싹이 트고, 그것이 하루가 다르게 힘껏 쑥쑥 올라오면 아이들은 그 싱싱한 초록의 생명을 보고 느끼고 또 그린다. 그림도 번듯한 도화지에 그리지 않는다. 우유팩을 재활용한다. 그걸 쫙 펼쳐 씻어 말리고 안쪽의 얇은 비닐을 벗겨 내면 튼실한 그림 종이가 된다. 어느 틈에 풀벌레, 메뚜기도 날아든다. 들꽃도 잡초도 보리와 함께 자란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삼삼오오 보리밭으로 달려간다. (15쪽)


얼마나 실하고 아름다운 풍경인가? 하지만 이것은 오래 전 그가 중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이야기다. 저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는, ‘새벽같이 등교해서 밤늦게까지 전혀 자율적이지 않은 야간 자율학습과 지나친 규율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인 인문계고’로 옮겨온 뒤였다. 다행히도(?) 임 교사는 꿈에도 그리던 그때 그 학교로 다시 발령을 받게 된다. 하지만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임 교사가 저자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4년 전 지금의 학교로 왔습니다. 오랜만에 담임을 했는데 중학교 생활은 마치 하루가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성능 좋은 컴퓨터와 비싼 기자재가 들어찬 학교지만 학급당 학생 수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 선생님들은 불필요한 업무가 많아 아이들과 이야기 한 번 여유롭게 할 수 없고 아이들은 더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 무한경쟁에만 내몰린 아이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지요.(31쪽)


하지만 임 교사는 이곳에서도 화단과 연못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다행히 옥상과 빛이 잘 들어오는 복도가 있어서 그것이 임 교사와 아이들의 새로운 터전이 되어준다. 처음에는 경계심을 갖던 교장선생님도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어주는 바람에 빗물 저수통을 설치해서 수돗물 대신 빗물을 모아 화단과 작은 연못을 가꿀 수 있게 된다.


임동헌 교사(광주 전자공고)는 ‘왜 선생이 되었는가?’라는 저자의 ‘진부한’ 질문에 주저 없이 대답을 한다. ‘생계형 교사’로 시작했다고. 전문계고 교사인 그는 학교에서 야간에 운영하는 산업체 특별학급과 관련된 학교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면서 선생이 되는 공부를 톡톡히 하게 된다. 그는 ‘학생들에게 카리스마를 보여주기 위해 항상 짧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다녔다. 이른바 문제반 담임은 임 교사의 몫이었고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선배 교사들도 그를 대견하게 여겼고 그도 자기가 잘하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한 지 4년이 된 제자 하나가 그를 찾아오면서 그의 교사로서의 삶이 확 달라진다. 그를 찾아온 졸업생이 단단히 마음먹은 듯 던진 한 마디. “선생님은 아직도 애들을 무자비하게 때리세요?” 순간 임동헌은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몸이 굳어 버린다. 긴 침묵 끝에, “미안하다….” 한 마디를 던지고 정신없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술부터 찾으며 한없이 울고 만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임동헌 교사가 인권 교사로 거듭나고 청소년 노동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기까지의 스토리는 영화 속의 이야기 같다. 


나는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다. 어느 날 제자가 찾아와서 “선생님은 아직도 애들을 무자비하게 때리세요?”라고 물으면 누구라도 그런 영화 같은 스토리가 만들어질까? 물론 내 스스로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그럼 무엇이 그를 변화시킨 것일까? 그것은 “나는 왜 교사인가”라는 물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교사 임동헌은 그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나는 왜 교사인가?’ 라는 물음은 <가르칠 수 있는 용기>의 저자 파거 J 파커가 제기한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저자가 발굴(?)해낸 임 교사를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은 그 물음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물음이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을 때 와주지 않고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와 줄 수도 있다. 그것이 세월의 힘이겠지만 그런 지혜를 얻기까지는 진한 아픔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담임 전문가이자 수업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는 박춘애(광주 서광중/현 운리중)’ 교사와 “국어에 관한 한 나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라. 학원에 갈 필요 없다.”라고 호언장담할 만큼 전문 교육노동자로서의 자긍심이 하늘을 찔렀던 김명희(경북 안동여중/현 복주여중)교사 이야기는 의외로 다소 어두운 빛깔을 띠고 있다.


한때 박 교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담임 전문가요, 수업 또한 가히 예술가 수준이었다.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동료교사들의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그 혁혁한 공을 다 소개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 교사는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저자 윤지형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다.  


‘저는 여전히 교사로서 행복하고 싶고 담임으로서 행복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교실 안에서의 자치 경험과 공동체 교육을 통해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요즘 좀 괴롭습니다. 지금 학교는 교사에게 기다릴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나에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경우 나는 그 아이가 마음을 열 때까지 배려고 하고 인내도 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뭐든 당장 해결해야합니다. 경고 몇 번 주고, 그 다음은 선도위원회, 그 다음은…하는 식이지요.’(48쪽)


김명희 교사(당시 안동여중 근무)는 한 술 더 떠서 저자가 인터뷰를 하러 안동으로 김 교사를 찾아가고자 전화를 할 때부터 이런 넋두리에 가까운 힘 빠진 고백을 한다. 


“몇 년 전부터 감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지요. 근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답니다.”     


그는 인터뷰 날짜를 뒤로 미루었으면 한다. 아니, 가능하면 인터뷰 약속 자체를 없던 일로 할 수 없겠느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저자로서는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 교사가 ‘걸어 다니는 감탄사’요 ‘감동의 명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호소에 가까웠다.


“도무지 할 말이 없는 걸요.”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일차적인 진단 결과, 여자의 생리적 나이가 주범으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에 수긍하지 않고 더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그녀의 화려하고 행복했던 이력을 샅샅이 뒤지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저자는 김 교사가 한 사람이 성취해놓은 것이라기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교사로서의 성실성과 상상력을 고루 발휘해온 성공 케이스라는 사실만을 확인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진다. 그래서 꼭지의 제목을 미래 소망형인 ‘다시 활짝 펴질 그 마음의 파라솔’로 정한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두 여교사의 진한 아픔이 내게 전해지면서 책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공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슬픔이나 절망의 공감 같은 것은 흔해빠진 유행가 가사처럼 돼 버린 지 오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를 책 속으로 더욱  빠져 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저자 윤지형이 그랬듯이, 나도 그 답을 빨리 찾은 것을 포기해야할 것 같지만, 여기까지 책을 읽고는 다시 책 제목으로 눈길이 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할 것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나는 왜 교사인가?’ 당장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헤매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나는 왜 교사인가?’ 하는 물음은 ‘나는 왜 인간인가?’ 라는 물음과 별단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이 책에는 ‘체육의 창(窓)으로 철학하는 한 체육교사의 꿈’(이명준, 서울 목동중/현 경상대 체육교육과)와 ‘나는 수학(數學&修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김홍규, 서울 광신고)와 같은 교과와 관련된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소개된다. 그런가 하면, 미술 교사이지 예술 노동자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그 자신도 영어의 몸이 된 김인규 교사(충남 에니메이션고/현 천안 오성고)며, 0교시 폐지와 학교 학생생활규정을 개정하기 위해 분투한 조향미(부산 금정여고/현 개금고)교사와 홍은영 교사(경기 안성여중/현 공도중)의 반인간화교육의 바람에 맞서 싸워온 생생한 투쟁의 기록과 사례들도 만나 볼 수 있다. 이들이 저자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보면 마음이 바닷속처럼 숙연해진다.


여기에, 어느 학교를 가든 자신이 구상한대로 도서관을 끝내 변화시키고야 마는 도서관의 달인 여태전(경남 진주 삼현여고/현 창원 태봉고) 선생님의 좌충우돌과 그런 류의 사람들이 흔히 겪는 아픔과 번민. 그리고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스스로 래디컬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 시대의 잠수함 속의 토끼인 이계삼 선생님(경남 밀양 밀성고)의 교육철학과 교사로서의 고민들이 책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들을 필경 “나는 왜 교사인가?” 라는 물음을 끼니처럼 먹고 살았을 것이다. 길을 찾기 위해 길을 잃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소개할 박원식(경북 군위 부계중) 교사는 지금 하늘나라에 있다. 지상에 있는 동안 그는 관객(학생)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배우(교사)가 되지 않기 위해 느닷없이 가발을 쓰고 교실에 들어가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를 짜낸다. 어느 날인가는 자장면 배달부가 들고 다닐법한 철가방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가는 ‘깜짝쇼’를 벌인다. 틈만 나면 엎어져 자는 게 일과인 녀석들까지 철가방에 초점이 모아지자 은근슬쩍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다가 이렇게 화룡점정을 찍는다.    


“철가방 속에서 짜장면만 나온다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책이 나올 수도 있다. 책은 영혼의 양식이다. 그래서 나 오늘 국어 40인분 배달 왔다.”(130쪽)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편지를 쓸 수가 없다. 대신 저자 윤지형이 그에게 바쳤던 ‘고별의 편지’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유달리 눈물을 많이 노래했던 시인 박원식, 너는 사이버 공간에 ‘눈물 사이트’를 연 적도 있었다. 학생들에게 누구보다도 사랑과 찬탄과 존경을 받았던 교사 박원식. 너는 책과 분필과 사탕이 든 철가방을 들고 교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 7년 전 네가 ‘숨바꼭질이야/제발/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 줘’라고 노래했듯이, 술래잡기하다가 잠깐 숨어버린 어린 동무처럼 늘 우리 곁에 살아 있을 원식아, 부디 잘 가라. 잘 가라.(144쪽)


이제 나에게 물을 차례이다. 나는 왜 교사인가?


지면 관계상 미처 전하지 못한 선생님들의 눈부신 활약상과 같은 교사로서 본받고 싶은 참된 마음가짐들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전국방방곡곡으로 발품을 팔아서 만난 이 어두운 시대의 희망이요, 등불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 선생님들을 달랑 책 한 권으로 만나게 해주신 저자 윤지형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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