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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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서평가 이현우는 절판되었다가 15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 개정판 옮긴이의 후기에서, 2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던지는 ‘폭력’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며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동물의 세상에서 ‘폭력’이라는 화두가 사라지게 되는 날이 올까? 오히려 이 화두는 갈수록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서 가시적인 폭력(지젝은 이것을 ‘주관적 폭력’이라 명명했다)을 당하는 사람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우리는 국가권력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향해 공권력이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다짜고짜 불심검문을 당해서 몽둥이로 두드려 맞을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받을 때 신체를 훼손시키는 고문을 받을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나를 공격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요즘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두드려 패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회사에서 상관들이 아랫사람들 욕설을 사용해가며 모욕하거나 감정이 격해졌다고 정강이를 걷어차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명확히 식별 가능한 폭력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 사회 역시 분노 사회다. 우리를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게 만드는것은 우리가 구조적 폭력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무엇이 시위대로 하여금 화염병을 던지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테러 단체가 비행기를 납치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외국인 노동자를 멸칭으로 부르는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이민자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국경에 벽을 세우는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2008년 금융위기를 가져온 것일까. 무엇이 빌 게이츠가 어마어마한 기부를 하게끔 만든 것일까. 무엇이 가자 지구를 불태우도록 만든 것일까.

주관적 폭력 아래 은폐된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는 손쉬운 분노를 자아내는 주관적 폭력 아래 숨겨진 진짜 폭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지젝이 제시하는 폭력의 삼각 구도 - 주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 - 를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은 무척 유의미하다.

우리는 압도적이고 자극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을 직접 다루는 대신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을 일별하기 위해 잠시 물러서야 한다. 지젝이 설명하는 폭력으로 향하는 여섯 가지 우회로를 모두 가보아야 한다. 우리를 구조적 폭력에 둔감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먼저 지젝이 말하는 폭력은 총 세 가지로 방금 언급한 주관적 폭력이 그 하나고 나머지 두 개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다.


지젝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묶어 ‘객관적 폭력’이라 말한다. 먼저 상징적 폭력은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폭력이다. 온갖 멸칭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상징적 폭력의 예시를 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징적 폭력은 습관적인 언어 사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회적 지배 관계나 선동적인 언어 속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형태의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고,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붙는 것이다.


마지막 구조적 폭력은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에는 근본적인 구조적 폭력이 존재하다. 지젝에 따르면 이 폭력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어떠한 직접적인 사회-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구조적 폭력에 둔감하다. 나 역시 20대 시절만 해도 자기계발서나 자기위로 서적을 따위를 읽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대게 구조적 폭력은 하나도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자연스레 멀어졌다. 누군가가 일터에서 흘린 땀과 눈물, 누군가가 광장에서 쏟아낸 피와 내장들을 하나도 언급하지 않은 채, 너의 행복과 너의 감정만 돌보라고 말하는 책들은 나를 끝없이 생각에 빠트린다. 이 책의 출간된 시대적 역사적 정치 경제적 배경에는 어떠한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 책은 어떠한 구조적 폭력을 강화하고 기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 집 위에 드론 폭탄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출신 국가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시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은 길거리에서 거의 보지 못한다.(구조적 폭력은 서로 가하고 있겠지만) 대신 은퇴 이후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은 가끔 한다. 이 년 전부터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포함한 일체의 동영상을 시청하지 않는다. 오로지 읽고 읽고 또 읽는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실린 챕터 중 구조적 폭력을 다룬 <1장 SOS 폭력>이 현재의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느꼈다. 왜냐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무척 인상 깊기 때문이다.

코스피가 7,000이라는 숫자가 은폐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은 무엇일까. 삼성전자 노사가 성과급 배분을 놓고 노사 협상에 들어갔지만 서로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정유회사 4사의 영업이익이 950억에서 5조 9635억으로 급증했다고 한다. 다음 달에 지방 선거를 앞두고 역시나 막말이 넘쳐흐른다. 나는 지젝의 『폭력』을 읽으며 인식의 도구를 훈련한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 상징적 폭력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이 책에서 지젝이 소환하는 온갖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이론과 개념을 내 것처럼 사용하고 싶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인’이라는 근대적 주체에게 삶의 모든 것은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영역이라 명령한다(너의 삶은 너의 것이라 말한다). 우리는 일단 본인의 탓을 한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고 그래서 나의 능력이 미천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을 책임감 있는 태도라 말한다. 능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조적 폭력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설계해 놓은 세상에서 일과 자율성의 노예가 되어 삶을 일에 통째로 갖다 받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서 일터를 구한 운이 좋은 몇몇들은 ‘경쟁’에서 성공하고 오늘날 사라지고 있다는 중간계급으로 도약한다. 그러고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이 되어 간다.

1장에서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로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등이 등장한다. 이 책이 20여 년 전쯤 출간되었으니 나는 여기에 샘 올트만, 일론 머스크, 젠슨 황 등의 이름들을 추가하여 읽었다.

우리가 온갖 매체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폭력적인 이미지 아래 도대체 어떠한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불의에 가득 찬 온갖 사건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는 손쉬운 분노에 휩싸인다. 우리는 무엇에 의해 이 분노가 촉발된 것인지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상징적 폭력을 가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때 우리는 지젝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시점에 이 책 『폭력』을 읽어야 한다. 지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칫하면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처럼 보이는 구조적 폭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한발 물러서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 책에서 전 지구적 문제를 다루면서 독자에게 말을 건다. 인도주의적 위기 사태를 보면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지만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 보라고 말이다. 왜냐면 우리가 느끼는 급박함과 분노는 어쩌면 가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폭력, 즉 객관적 폭력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한발 물러서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독자들은 읽고 읽고 또 읽기로 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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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번영과 낙관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았는가
앤드루 로스 소킨 지음, 조용빈 옮김, 신현호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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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4~5명 중 1명꼴로 주식을 보유한 코스피 6000 시대, 1929년 대폭락의 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과 시사점은 무엇일까. 월터 아이작슨은 “소킨이 또 해냈다”고 말한 이 책은 너무나 기대되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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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 파괴자들 - AI 시대의 변곡점을 발견하고 미래를 선점하는 법
마이크 메이플스 주니어.피터 지벨먼 지음, 신솔잎 옮김 / 부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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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트위치, 리프트, 에어앤비 등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시작은 언제나 틀을 깨고 비주류가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익숙함을 떠나 불확실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 전체를 조망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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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젊은 시인이 보낸 편지 - 릴케와 카푸스 왕복 서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프란츠 크사버 카푸스 지음, 최성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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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젊은 시인이 보낸 편지』는 그 유명한 릴케의 서한집이다. 테레지아 육군 사관학교 생도였던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1883-1966)는 밤나무 고목 아래서 릴케의 시집을 읽다가 우연히 릴케가 사관학교의 선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카푸스는 갓 스물도 되지 못한 젊은 청년으로 군인의 길에 접어든 상태였지만 릴케와 마찬가지로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일곱 살 많은 선배이자 흠모하는 위대한 시인 릴케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릴케에게 답장을 받는다. 그 두 사람은 1908년까지 서신을 교환하다가 점차 소원해졌다.

릴케가 시인 지망생 카푸스에게 보낸 편지들을 엮은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하 『편지』)는 전설과도 같은 책이 되었다. 특히 문학계와 예술계에서 이 책은 필독 도서로 여겨졌다. J.D 샐린저는 이 책은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성경 같은 책이라 말했고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그 특유의 수줍지만 카리스마 있는 말투로 이 책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팝가수 레이디 가가는 그녀의 콘서트에서 이 책에 나온 어느 구절 전체를 직접 낭독했다고 한다.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을 음미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편지』는 각별하게 다가온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젊은 시인이 보낸 편지』는 기존의 『편지』에서는 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젊은 시인'인 카푸스가 릴케에게 보낸 편지도 함께 싣고 있다. 을유문화사의 책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위대한 시인 릴케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그 젊은 시인이 주고받은 서신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편지』의 내용을 더욱 온전히 흡수한다.



『편지』는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을까

예술을 소명으로 하지 않는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도 이 책은 왜 이토록 영속되는 영향을 주는 것일까. 나는 문학 전공자가 아니고 아직은 문학 애호가라고도 말할 수 없다.(나는 그러나 문학을 동경하고 흠모한다) 또한 예술이나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다. 단 나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읽기 위해 산다고는 말할 수 있다. 나는 『편지』에 실린 예술과 창작에 대한 릴케의 조언은 삶과 읽기에 대한 조언으로 종종 바꾸어 읽기도 한다. 내게는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 가능한 비평-미학 나부랭이는 읽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생명력 없이 돌처럼 굳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편파적인 것들 혹은 교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아, 오늘날 그중 한쪽의 견해가 옳다 한들 내일이면 뒤집히기 일쑤입니다.”
_릴케, 1903년 4월 23일



나는 위 문장을 온갖 버전으로 변용하여 읽는다. 나는 문학작품에 실린 해설이나 해제는 꼭 읽고 이름난 작가나 사상가 들이 쓴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도 종종 찾아 읽는다. 그러나 나는 수전 손택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조언을 명심한다. 문학작품을 내 맘대로 해석한다. 무지와 편견에 가득 찼지만 어쨌거나 나는 내 식으로 해석한다. 거기에 릴케의 조언을 함께 명심한다. 나는 소위 '지식인' 내지는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언어놀이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지...

“슬플 때면 스스로 고독한 채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미래는 언뜻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이는 '마비된' 순간에 바깥에서 일어나는 시끄럽고 우발적인 사건들보다 훨씬 더 삶에 다가가 있습니다.”
_릴케, 1904년 8월 12일


나는 신자유주의에 염증을 느낀지 오래고 소비와 물질의 신은 내게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나는 관계에 미숙하고 비대한 자아를 가진 한없이 천박한 영혼을 가진 현대인이다. 나는 권태에 빠진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현대인이지만 자본주의식 삶이 별로 살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그래서 무가치한 내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종결하는 방법으로 자살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런 내게 릴케의 서한들은 이 세상에 좀 더 존재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조언이 내게도 한밤의 등대가 되어준다. 이 감동과 뭉클함, 그리고 먹먹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릴케의 서한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은 그가 읽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고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을 걸어 오기 때문이다. 릴케의 조언은 보잘것없는 내 삶이라는 것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창조적 생산이 가능한 대상이라고 알려준다. 허무와 회의에 빠진 수십억 인간동물 중 한 개체인 나는 릴케의 『편지』를 읽다가 가슴에 꼬옥 안았다. 아.. 이것이 바로 『편지』의 전설과도 같은 감동이구나.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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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세계의 역사 - 인류의 기원부터 현대까지, 600가지 지도로 살아나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
크리스티앙 그라탈루 지음, 정미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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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역사지리학자 크리스티앙 그라탈루의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역사』 는 세계사의 흐름을 무려 600여 개에 이르는 지도와 인포그래픽을 통해 공간에서 펼쳐 보이는 역사지리학 책이다. 프랑스의 유명 역사학자인 파트리크 부셰롱은 이 책의 추천사 성격의 글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역사를 쓴다는 건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물과 시대 상황, 사건들의 인과 관계는 글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지만 시간이 공간에 남긴 흔적을 풀어내는 것은 훨씬 어려우며, 역사학자는 시간과 공간이 충돌하고 얽히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역사 지도'라 불리는 것으로 시도한다고 설명한다.

이 지도책은 기원전 3000년에서부터 2023년까지의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 이 책의 초판본은 2019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 이 기획은 프랑스에서는 거의 40년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새로운 형식의 지도책이었다고 한다. 이 지도책은 책의 공동 출판사이자 역사 전문 월간지인 <역사 L'Histoire >에서 수십 년간 축적해온 정밀한 역사 지도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책은 출간과 동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3개 언어 40개국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한국에서도 출간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역사 지도책이라는 명성에 맞게 나와 같은 독학자를 비롯하여 학생, 선생님 모두가 평생 곁에 두고 활용할 책이다. 나는 이 '지도책'을 텍스트 중심의 다른 세계사 책들과 함께 활용한다. 각각의 책들은 서로를 보완해 주며 나만의 세계사 선생님이 되어준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이 잡지의 더욱 향상된 지도 제작 역량 덕분에 개정판에는 더 풍부하고 정밀한 인포그래픽을 담은 100장이 넘는 새로운 지도가 추가되었다. 그라탈루는 제2판 서문에서 이 책은 서구 중심의 관점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누이트의 이주 경로나 폴리네시아 문화의 확산과 같이 서구 중심의 역사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주제들을 담았다. 한편 저자는 이 책이 유럽 중심의 서사를 벗어난다고 해서 '역사를 지도 위에 담는 작업 자체를 멈출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책은 21세기의 관점으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려 하지만 책의 구성에서 몇 장은 유럽에 할애되어 있다.

책은 총 13장으로 구성되었다. 책은 전 지구적 관점에서의 역사 서술, 각 지역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 전체 구성에 대한 기초 틀 제시, 16세기 이후까지 존속했던 고립 사회에 대한 조명, 15세기를 기점으로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가는 세계를 중심 축으로 구성되었다.


전 지구적 관점의 역사 서술에 해당하는 장은 1장(단 하나의 인류/기원전 3000년), 3장(구대륙의 네트워크/신석기 시대~15세기), 7장(유럽의 세계 정복/16~18세기), 9장(유럽의 세계 식민지화), 12장(서구가 지배한 세계/1914~1989년), 13장(1989년 이후의 세계/1989~2023년)이다. 각 지역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에 대한 장은 4장(구대륙의 네트워크/신석기 시대~15세기), 5장(구대륙의 사회들/7~15세기), 8장(유럽/16~18세기), 10장(유럽 이외의 강대국들/18세기 후반~19세기), 11장(유럽의 역사/1789~1914년)이다.
전체 구성을 아우르는 기초 들은 2장(독립적으로 발전하는 세계들)이고, 이 책의 구조적 중심축에 해당하는 장은 6장(15세기의 세계)이다.

이 방대한 역사지도책의 내용을 요약한다는 것은 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 이 책의 구조적 중심이라는 6장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6장<15세기의 세계>가 왜 이 책의 구조적 중심축이 되었을까? 15세기는 흔히들 말하는 '대항해 시대'였다. 15세기는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이다. 이 시기에 국제 정서는 매우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했으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교역망이 다양해졌다. 특히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우회하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교육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대서양의 여러 섬으로 진출도 활발해졌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건설은 이러한 교역 확장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세계사 책에서는 종종 이런 가정을 한다. 만약 15세기 초 중국의 정화의 대함대가 원정(정화의 항해는 1405에 시작되어 1433년에 끝났다)을 계속했다면 역사의 흐름은 바뀌었을까? 중국은 해양 진출 정책을 중단했고 신항로 개척의 주도권은 유럽 국가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역사책에서 마르고 닳도록 들은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가 펼쳐진다. 이 책은 그러니까 이 지도책은 르네상스를 지도로 보여준다. 나는 그간 수없이 많은 책에서 르네상스를 오로지 텍스트로 읽었다. 물론 문자들 사이에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그림과 건축물에 대한 이미지도 보긴 했다. 이 책에서는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두 지도를 보았다. 여행하는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뮈스의 주요 여행 경로'를 그린 지도에서 존 콜렛, 토머스 모어,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과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이름을 함께 발견한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의 문화에 대한 지도'를 통해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 스페인 등과 유럽 각국의 르네상스 중심지가 어디였는지 어떤 나라에 영향을 미쳤는지 한눈에 확인한다.

이 책과 비슷한 인포그래픽 역사지도책으로는 2008년 구입해서 지금까지도 종종 펼쳐보는 『르몽드 세계사』가 있다. 현대 세계의 역사와 우리 시대의 지구적 이슈와 쟁점을 탁월한 역사 인포그래픽으로 펼쳐 보이는 이 책을 정말로 아꼈다. 현대사 중심이었던 『르몽드 세계사』와 달리 크리스티앙 그라탈루의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역사』 는 호모사피엔스 시대부터 2023년까지를 다룬다. 알제리 내전(1990년대), 르완다와 부룬디(1959~1994년),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2022년) 등 인문교양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무수히 많은 글에서 만나게될 이 아픈 역사, 지금도 진행중인 이 아픈 역사를 지도로 만날 수 있다.

또한 한국 사람으로서 12장에 포함되어 있는 '일본의 만행(1931~1945년)' 지도, '한국 전쟁(1950~1953년)' 지도에도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이 압도적인 역사지도책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역사』는 한 마디로 열공 욕구를 불태우는 책이다. 평생 저와 함께 해요!


📚출판사 이벤트에 응모하여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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