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나는 현대미술 - 21세기가 사랑한 예술가들
김슬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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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 현대미술』은 매일경제신문 문화부 김슬기 기자가 쓴 현대미술 안내서로, 21세가 사랑한 예술가들 24명에 주목하고 있다.

1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초현대미술 작가들>에서는 1980년대생이 주류가 된 미술 시장 새로운 슈퍼스타 12명(니콜라스 파티, 플로라 유크노비치, 아드리안 게니, 조너스 우드, 헤르난 바스, 비플, 매튜 웡, 캐롤라인 워커, 록카쿠 아야코, 엠마 웹스터, 아모야코 보아포, 루시볼)을 다룬다.

2부 <컬렉터가 사랑한 20세기 거장들>에서는 20세기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해 여전히 미술 시장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동시대 거장 12명(게르하르트 리히터, 데이비드 호크니, 필립 거스틴, 조안 미첼, 루이즈 부르주아, 피터 도이그, 조지 콘도, 나라 요시토모, 스콧 칸, 우고 론디노네, 세실리 브라운, 론 뮤익)을 다룬다.

지은이는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푸념이, “현대미술은 너무 어려워.”였다고 한다. 이 책은 현대미술 슈퍼스타 작가 24명의 작품과 삶에서부터 미술 시장의 작동원리까지 두루 살피며 현대미술 작품을 음미하는 안목을 키워준다.

이번 독후감에서는 가장 강렬했던 작가 한 명과 ‘아 이 작품이 이 작가의 것이었구나’하고 드디어 알게 되어 반가웠던 작가 한 명을 소개한다.



📍공포와 비극을 재료 삼는,
👤아드리안 게니(Adrian Ghenie)

아드리안 게니는 1977년 루마니아 북서부의 광산업 도시 바이아 마레에서 태어났다.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정치적 격변은 게니로 하여금 슬픔과 좌절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은 침묵하는 세계에 린치를 가한다.

그는 코믹한 영화적 표현을 통해 권력자를 희화하고 그들의 권위를 무력화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역사 속 인물들도 등장한다. 과학자, 예술가, 독재자 등 20세기를 형성했고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두운 역사를 작품에 담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유산과 모든 형태의 파시즘의 유령에 집중한다.

나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어두운 면,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 슬픈 역사에 더 끌린다. 그래서인가 게니의 작품에 시선을 빼앗겼다.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 담론을 형성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게니의 그림은 우리 시대의 폭력과 야만을 보여준다.



📍시선을 강탈하는 극사실주의 인간 조각,
👤론 뮤익(Ron Mueek)

론 뮤익은 1958년 호주 멜버른에서 독일 이민자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인형 공장을 운영했고, 뮤익은 어릴 적부터 인형 모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린이 영화와 TV 프로그램용 모형과 인형 제작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은둔 작가로, 돈 버는 걸 포기한 것처럼 작업 속도가 느리고 방식이 꼼꼼하다고 한다.
30대 후반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조각을 시작했지만 그가 내놓는 작품의 희소성 때문에 경매에 출품되는 화제를 모았고, 금세 스타가 된다.

그의 작품에는 현대인의 외로움, 취약함, 불안감 같은 내면의 감정이 녹아 있다. 보기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조각을 통해 공감의 예술을 펼친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인스타그램에 도배되어 있다. 이번 책을 통해 나의 시선 역시 빼앗았던 강렬한 조각 작품이 바로 론 뮤익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작가들의 드라마틱한 삶들이 가득하다. 어떤 작가는 미대의 비싼 등록금과 재료비를 아무 고민 없이 낼 수 있는 금수저를 문채로 태어나지 못해 쓰레기통을 뒤지며 학교를 다녔고,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에 투쟁하며 그림을 그린다(아모아코 보아포). 어떤 작가는 홀로코스트와 전쟁이 가져온 비극으로 얼룩진 가족사 속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필립 거스틴).

현대미술 경매 시장에서 천문학적 금액으로 팔려나가는 작품들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 진면목을 일깨운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작가들을 보면서 현대 사회의 거품과 욕망을 엿본다. 문득 온갖 복잡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매력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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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
앨러스테어 레이놀즈 지음, 이동윤 옮김 / 푸른숲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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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은 하드 SF의 대가로 손꼽히는 영국 SF 작가 앨러스테어 레이놀즈의 장편 SF 소설로, '균열'과 미지의 구조물을 찾아 떠나는 데테메르호의 이야기를 다룬다. 자 이 문장에서 벌써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체 '균열'이 무엇인가?

소설은 19세기의 한 범선, 데테메르호, 위에서 시작된다. 이 배에 고용된 영국 웨스트컨트리 출신의 44세 가난한 의사 사일러스 코드는 원정대와 함께 탐험을 떠난다. 앞서 말했듯 이 범선의 목적은 '균열'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구조물을 찾는 것이다. 소설은 '균열'이 무엇인지 독자를 서서히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균열에 가까워진 순간 정체불명의 난파선 유로파호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사일러스가 죽어가는 순간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여 사일러스를 은근히 무시하여 독자의 마음도 다소 불편하게 만든 캐릭터인 '코실 부인'은 이렇게 말을 던진다.

"오, 코드 박사님." 이렇게 죽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이제 한층 더 궁금해진다. '코실 부인'은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이 사람은 정체는 무엇인지? 부인은 무엇을 알고 있으며, 작품 속에서 무슨 역할이지? '균열'에 대한 힌트를 얻기 원하는 내게 작가는 질문만 던진다.

102페이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사이러스는 103페이지에서 멀쩡히 깨어난다. 이제 사일러스 코드는 '증기선'을 타고 있다. 앞선 이야기에서 사이러스는 소설 쓰기로 취미로 가지고 있고, 그의 소설에서 '증기선'에 대해 나온다. 당시에는 증기 추진 선박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증기선은 사일러스의 작가적 상상력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런데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한 사일러스가 바로 증기선 위에서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사일러스는 증기선에서도 죽고 비행선에서 깨어난다. 소설은 촘촘히 퍼즐을 짜놓고, 독자를 계속하여 궁금하게 만든다. 소설의 해설을 쓴 심완선 SF 평론가는 '이 책은 의미심장한 단서를 흩뿌려 놓은 입체적인 퍼즐'이라고 표현했다. 평론가의 적확한 표현처럼 이 소설을 읽어가는 것은 무언가 퍼즐을 푸는 느낌을 준다. 소설의 결말을 읽고 나면 이 작품이 마치 추리소설과 같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이게 이 말이었구나, 이 단서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이 소설의 제목인 '대전환'은 수학적 개념에서 가지고 왔다. 위상수학의 '구면 전환'은 3차원 공간에서 구면의 내부와 외부를 온전히 뒤바꾸는 방법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 소설에서 데테메르호 원정대의 지도 제작자이자 수학 천재인 레이몽 뒤팽은 구면 전환 문제에 집착한다. 소설을 결말을 읽고 나면 '대전환'이 결국 '대반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의 수수께끼들은 다 풀리고, '떡밥들은 다 회수된다'. 한바탕 몰입해서 읽으면 우리는 사일러스 코드 박사의 정체에서부터 균열에 대해서도 알수 있게 된다.

“ 그 목표물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일은 저속한 미신에 대한 지성의 승리였다. 그리고 우리의 탐조등이 심연을 더듬으며 목표물에 좀 더 많은 빛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집단적 의지는 보상을 받았다.”___209쪽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대전환 #앨러스테어레이놀즈 #푸른숲
#하드SF #장편SF
#SF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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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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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증언』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응교 선생님이 쓴 책으로, 1923년 9월 일본 간토 지역에서 벌어진 참극 조선인 대량 학살의 기억을 복원하여 진실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용서화 화해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진도 7.9강진이 도쿄와 간토 일대를 강타했다. 지진 발생 세 시간 후, 오후 3시경부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타고 있으며, 조선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습격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한다.
9월 2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조선인 폭동설’이 시작된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집단 학살이 일어난다. 나라시노 기병 연대, 헌병들, 경찰들, 자경단은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민간인들도 조선인을 죽이는데 동참한다. 한인이라면 아이, 여자, 노인, 노동자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조선인으로 오해받는 일본인들도 살해당했다.
1923년 12월 5일 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학살로 인한 피살자 합계를 총 6,661인이라고 보도한다. 이 숫자는 실종자를 포함한 숫자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가장 포괄적인 조사였기에 유의미하다고 평가한다.



대규모 조선인 학살이 가능했던
몇 가지 동기

이 책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가능했던 몇 가지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두려움은 혐오를 만들고, 혐오는 폭력을 만든다.
2. 일본의 노동 시장을 조선인이 빼앗는다는 불안이 넓게 퍼졌다.
3. 조선인을 비하하는 ‘후테이센진‘이라는 이미지
4. 계엄령과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혐오성 유언비어가 결정적이었다.
5. ‘자경단’이라는 훈련된 예비 학살 조직이 있다.
6. 일본만이 최고라는 국가주의가 세뇌되어 있었다.


김응교 선생님은 조선인 학살이라는 집단적 광기의 발단에는 계엄군이라는 국가의 묵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 당국은 지진으로 인해 정부로 향하는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을 조선인에게로 향하는 불안과 공포로 바꾸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국가적 폭력의 참혹한 사례이다.



‘15엔 50전’과 조센징 사냥

당시 간토에 살고 있었던 조선인들은 일본에 체류한 지 몇 년 안되는 노동자가 대부분이어서 일본어를 정확히 발음할 수 없었다.

“15엔 50전”

이 두개의 일본어 단어에는 일본어의 탁음이 들어있는데, 일본어에 서투른 한인들은 일본 본토 사람처럼 발음할 수 없었다.

“쥬우고엔 고쥬셴”이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추우코엔 코츄센”이라고 발음했다면,
총칼로 찔려 살해를 당했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이 발음을 할 수 없었던 말더듬이나 오사카, 오키나와 사람 등 지방 사람들도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되었다.

이 책에서는 이를 두고 ‘집단적 오락’(69쪽)이라고 표현한다. 이 광기의 오락의 다른 표현은 ‘조센징 사냥’이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시인 쓰보이 시게지(1898~1975)가 쓴 작품 『15엔 50전』 전문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간토대진재의 조선인 학살을 테마로 한 장 시로 김응교 선생님이 전문을 번역하여, 이 책에 실었다.



삭제되는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간절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본 학자들,
학살당한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본 시민들

책의 <들어가며>에서 김응교 선생님은 “이 책은 반일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기원하는 책입니다.”라고 썼다.
이 책에서는 간토대진재의 기억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한일 두 나라의 연대를 위한 노력도 담고 있다.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 자행한 만행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현 일본 정부의 노력에 맞서 이 기억들을 발굴하여 복원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이어가는 일본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존재한다.


****
이 책을 읽는 것은 힘들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는 것과 비슷했다. 이 책에는 김응교 선생님이 20여 년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현지를 답사하여 기록해온 간절한 증언이 담겨 있다. 이 증언들은 1923년 9월의 간토로 데려간다. 간토 대로변에서 불갈구리로 찔려 자기가 흘린 핏물 웅덩이에 쓰러진 조선인들과 치비치리 동굴 속에서 죽어간 오키나와 사람들은 계속하여 떠올린다.

김응교 선생님의 담담하게 쓰인 문장을 읽어가다 군데군데 호흡이 멎는 것 같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벽돌들이 내 명치에 계속하여 쌓여가는 것 같았다. 이 참혹하고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복원하는 일본의 지식인들과 사비를 털어 추모비를 세우고 학살의 현장을 지키는 일본 시민들의 간절한 노력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러한 사람들의 수는 비록 적을지언정 그들의 존재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희망을 엿보았다.

이 책에서는 국가적 폭력으로 잔혹한 죽임을 당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나온다. 간토대진재에서 학살당한 조선인들, 1945년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학살당한 오키나와 민간인들. 국가적 폭력은 심지어 민간인들이 서로를 죽이도록 극단으로 치닫는다.

수천 명의 조선인들과 수십수만의 일본인들의 죽음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최대한 생생하게 복원하여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 모두는 언제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무고한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무지한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총검으로 사람을 찌르는 사람만이 가해가 아니다. 우리의 거친 말들과 편견과 혐오에 사로잡힌 생각들은 타인을 해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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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미래 - 언제나 최적의 선택을 찾아내는 우리 뇌의 비밀
정민환 지음 / 심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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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생명과학과 교수이자 뇌인지과학과 겸임교수인 정민환의 첫 책 『기억의 미래』는 인간의 상상력과 추상적 사고 능력의 작동 원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현대 뇌 과학이 이룬 상상과 추상적 사고에 관한 주요 발견과 통찰을 정리한다.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소위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명은 인간 종의 특징인 고도의 추상적 사고 능력에서 나온다. 인간의 문명사회는 계속되는 과학, 기술,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계속되는 혁신 덕분에 발전한다. 저자는 이 혁신의 원동력은 바로 인간의 '뇌'가 가진 '추상적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상상' 능력이라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뇌 과학은 뇌가 외부 감각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저장하는지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을 제어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상상력과 창의성에 관련된 뇌의 작동 과정인 내적 사고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왔다. 그러다가 2007년 뇌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논문이 발표된다. 바로 해마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측두옆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해마가 기억을 회상할 때뿐만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과정에도 관여한다는 것이었다. 해마는 단순한 기억 저장소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데 관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마 연구는 인간의 고차원적 추상화와 관련된 연구 등 뇌과학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이 연구 덕분에 2007년 이후 과학자들은 '기억은 어떻게 저장되고 인출되는가?'라는 질문 대신 '기억과 상상은 어떻게 이뤄지는가?'로 바꾸어 묻기 시작했다.

혁신적인 생각, 디폴트 네트워크, 그리고 '해마'

인간 뇌는 외부 자극에 반응해 특정 과제를 수행할 때 활성화되는 '과제 네트워크'와 백일몽을 즐기거나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상황처럼 내적 사고를 할 때 활성화되는 '디폴트 네트워크'를 따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멍하게 쉬는 순간에도 디폴트 네트워크는 활발히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유레카'의 순간들은 산책을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화분에 물을 주다가 떠오른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들은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있을 때 떠오르고, 해마는 디폴트 네트워크의 주요 구성 요소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주로 해마의 기능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해마가 어떻게 이 기능을 수행하는지 알아본다. 그리고 저자 정진환 교수 연구팀의 주요 연구 성과인 '모사-선택'이론에 대해서 비중 있게 설명한다.

모사-선택 이론
정진환 교수 연구팀은 해마의 기억 기능과 상상 기능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모델로 '모사-선택 이론'을 제시한다. 해마는 서로 다른 몇 개의 하위 신경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치상회, CA3, CA1이 해마의 핵심 영역으로 간주된다. CA3 신경망은 다른 뇌 부위에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회귀투사가 풍부한 신경망인데, 바로 이 CA3 신경망은 해마의 경로 재생 및 상상 기능과 관련된 가장 유력한 후보로 손꼽힌다. 그리고 CA1 신경망은 상상한 내용을 평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밝혀졌다. 즉 해마는 단순히 기억과 상상을 떠올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상상한 내용을 평가까지 수행하는 종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뇌는 이를 통해 상황에 맞는 의사 결정과 행동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한 내용이 바로 '모사-선택'이론의 핵심이다. 정리하자면 CA3 신경망은 경험한 사건들의 재생과 더불어 경험하지 않은 사건들을 모사(시뮬레이션)하고, CA1 신경망은 CA3 신경망에서 재생되고 모사된 사건들 중 효용가치가 높은 사건을 선택적으로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모사-선택 이론의 핵심은 동물이 비활동적인 상태일 때 여러 이동 경로를 시뮬레이션하고 평가함으로써 출발 지점과 상관없이 임의의 목표 지점까지 최적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111쪽)


기억은 상상과 창의성의 재료
책에서는 새로운 상상은 기존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하게 설명한다. 우리 뇌는 과거 경험 요소들을 자유롭게 추출하고 재조합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미래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창의성은 필연적으로 기억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해마라는 뇌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과학자들은 기억의 범위와 강도, 상상 순간의 해마 신경망 상태, 해마로 투사되는 조절성 신경세포들의 활동 등 다양한 요소를 연구하고 해마의 기능과 역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의 기원을 찾으려 노력한다.

“디폴트 상태에서의 상상은 무작위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그 내용은 결국 우리가 평소 어떤 정보를 학습하고 사고했느냐에 의해 달라진다. 다시 말해 상상의 재료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상상의 질과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_209쪽

창의성과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
디폴트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는 독서

책에서는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평소 의미 있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깊이 있는 사고를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한 분야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폭넓은 지식을 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방금 말한 것은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새로운 연구 결과는 계속하여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평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지식을 쌓아온 사람이나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협력할 때 기존의 사고를 깨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당연한 말이지만 평소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은 창의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되지만 개인이 경험으로 지식을 쌓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도 이 한계를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독서'를 강조한다. 혁신이란 기존의 틀을 깨는 과정으로 어떤 경험이나 지식의 혁신의 출발점이 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을 쌓아가고 탄탄한 토대를 구축해 놓아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할 수 있다.

“요즘은 간접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경로와 형식이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유튜브와 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 과학, 문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쉽고 빠르게 습득할 수 있다. 영상 콘텐츠는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지만 정보를 숙고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이 부족하다. 하지만 책과 같은 활자 매체는 다르다. 읽는 과정에서 특정 문장을 곱씹으며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거나 앞서 읽은 내용을 다시 찾아보고 비교하며 잣니의 지식과 신념 체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과정이 자주 일어난다. 반면 영상 콘텐츠를 시청할 때는 앞뒤로 이동하며 내용을 비교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일방향으로 계속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_212-213쪽


“시간을 두고 숙고하며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과 일방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더군다나 책은 여러 날에 걸쳐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서 사이 시간에 자연스럽게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될 기회를 갖게 된다. 앞서 누누이 설명했듯이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 동안 우리의 기억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합되고 이를 통해 기존 지식과 새로운 정보가 연결되면서 창의적 사고가 촉진된다. ” _213쪽

『기억의 미래』의 맺음말에서 저자는 이 책은 결국 우리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해 주는 특징인 고차원적 추상화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뇌과학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관련 학문의 연구를 살펴본다. 4부 <상상과 추상을 넘어서>에서는 1~3부에서 설명한 최신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개인 수준과 집단적 수준 양쪽에서의 창의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한다. 또 4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저자는 범용 인공지능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거품이 끼여 있고, 인공지능의 창의성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이 책을 통해 재확인한 것은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나의 상상력과 행동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의 이로움, 새롭고 낯선 경험과 지식에 계속하여 노출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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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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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은 서울여대 철학과 문성훈 교수의 철학 에세이로 니힐리스트로 살아온 경험과 니힐리스트 철학자로서의 생각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은 니체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니체가 생각한 니힐리스트란 '자유 정신'의 소유자다. 자유 정신이란 절대적 진리도 없고, 영원한 사실도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니체는 자유 정신을 뱀이 주기적으로 껍질을 벗고 새 껍질을 얻는 '탈피'에 비유하는데, 탈피하지 못하는 뱀이 죽을 수밖에 없듯이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못하는 인간의 정신 역시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니힐리즘은 흔히 허무주의로 번역되는데, 허무주의라는 번역어는 인간 삶과 세상만사가 다 허무하다고 들리게끔 한다. 그러나 니체가 말한 니힐리스트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삶에는 그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지만 이것은 오히려 삶의 무한한 가능성과 지속적 자기 창조의 기회가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정한 니힐리스트란 세상만사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고,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사람이며, 이를 위해 삶을 긍정하고, 삶에 대한 자기 지배를 강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현직 철학과 교수님이 쓴 책이라 그런지 이 책은 아주 쉬운 서양철학 교양강좌처럼 읽혔다. 이 책은 노자 『도덕경』, 『장자』, 불교 철학의 '연기' 개념, 공자의 『논어』 등 동양의 철학과 사상도 소개하지만, 서구의 철학 중심으로 쓰였다. 니체의 철학을 중심에 두고 스피노자,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미국의 현대 철학자 마이클 왈처, 쇼펜하우어, 플라톤, 중세 기독교 성직자, 마르크스, 헤겔, 키르케고르, 에리히 프롬, 사르트르, 애덤 스미스, 악셀 호네트, 카뮈, 푸코, 토마스 쿤, 에밀리 로티, 존 롤즈 등 다양한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호출된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와 포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 중국 당나라 시대의 한시들도 인용된다.



이 책에서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은 미셸 푸코의 존재의 미학과 존 롤즈의 정의의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삶의 다양성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각자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자기 창조적 삶을 사는 것, 어떤 특정한 삶의 목표나 가치가 특권화되지 않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비정상, 옳고-그름의 이분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 이것이 책의 지은이가 바라는 사회이자 니힐리스트로서의 삶이다.




@woojoos_story 모집, #이소노미아 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클럽_철학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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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우주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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