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중세 유럽 역사
신성출판사 편집부 지음, 야스시 스즈키 그림, 전경아 옮김 / 생각의집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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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세 유럽의 영웅, 신화와 전승, 농촌과 도시, 기독교회, 국왕과 영주, 환상 속 동물과 괴물 등 중세 유럽의 이모저모를 그림과 지도, 잘 정리된 연표를 통해 설명한 책이다. 온라인 서점의 책 소개 페이지에서는 이 책을 중세 유럽에 대한 ‘비주얼 도감’이라고 소개한다. 일본의 출판사인 신성출판사 편집부가 펴낸 이 책은 출판사의 노력이 엿보이는 편집을 칭찬하고 싶다. 이 편집 덕분에 중세 유럽 역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유익한 역사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중세’란 명칭은 르네상스 시대인 1600년대에 확립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대표되는 고전문화 시대와 이 고전문화가 부활한 르네상스 시대의 중간 시대라는 뜻으로 쓰였다. 보통 기독교의 지배를 받았던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계몽사상에서 보았을 때 이 시기는 계몽이라는 ‘빛’을 비춰야 하는 시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범위>

서양사의 시대구분에서 중세란 고대와 근대(또는 근세) 사이에 위치하는데, 연대로 보면 4~5세기에서 15세기까지를 말한다. 1000여 년간 지속된 이 시기는 중세 초기 - 중세 중기 - 중세 후기로 크게 세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역사적 사건으로 보면

초기 : 동서로 분열된 로마제국(395년) 또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말기 : 동로마 제국의 멸망(1453년)

으로도 나눌 수 있다.

<공간적 범위>

이 책은 로마가톨릭 교회의 영향을 받은 서유럽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폴란드, 헝가리 주변부와 서쪽, 신성로마제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 공간적 중심을 차지한다.


이 책의 구성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주제는 <중세 유럽을 빛낸 영웅들>이다. 그리고 다음 등장하는 주제는 <중세 유럽을 장식한 신화와 전승>이다. 중세 유럽의 국왕과 영주, 도시와 농촌, 기독교 사상들보다 먼저 배치된 이 흥미진진한 주제들은 중세 유럽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대중문화에서 익히 접했던 아서왕, 원탁의 기사, 로빈 후드 등과 같은 중세 유럽의 영웅들과 로키, 라그나로크, 발키리, 타락천사 등의 신화들을 먼저 소개한다. 각종 판타지 영화와 드라마,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영웅들과 신화 속 인물들을 멋진 그림으로 소개한다.



최근 몇 년간 읽어온 책들에 수없이 반복되던 단어는 근대성, 탈근대, 근대 후기 등 단연코 ‘근대’였다. 근대 이후 등장한 각종 사상과 아이디어, 과학적 발견은 지금도 여전히 여러 텍스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근대’와 관련된 글들을 읽다 보니 더 중요한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중세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 『그림으로 보는 중세 유럽 역사』가 읽고 싶었다. 무엇을 익힐 때는 항상 쉬운 텍스트부터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 3장부터 6장까지 다루고 있는 중세 유럽의 농촌과 도시, 기독교, 봉건사회 성립, 왕권 신장 등은 특히 유익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알려면 근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근대를 알려면 중세도 알아야 한다. 무려 1000년 동안 지속된 이 중세 시대는 암흑시대가 아니었다는 책도 최근 출간된 것을 보았다. 다양한 난이도의 텍스트들을 겹쳐 읽는 것은 늘 도움이 되는 읽기 방식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림으로 보는 중세 유럽 역사』는 묵직한 역사서나 문학을 읽을 때 옆에 두고 함께 읽기에 손색없는 책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서구 세계가 고전 고대 이후의 문화를 접한 것은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 세력이나 비잔틴 제국과 교류하기 시작한 11세기 말 이후의 일이다.

그 결과, 기독교 교리가 담긴 신학을 그리스 철학에 입각한 이성적 이론으로 체계화하려는 스콜라학이 융성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윌리엄 오캄 같은 신학자, 철학자를 배출했다.

(중략)

그전까지는 학문을 배울 곳이 교회에 부속된 학교밖에 없었으나 대학이 생기면서 부유해진 서민의 자제가 신학과 이슬람권에서 들어온 법학, 의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에 대학교육은 문법, 수사학, 변증법, 산술, 천문학, 기하학, 음악의 ‘자유칠과’를 일반 교양으로 배운 뒤에, 신학과 법학, 의학 등을 상급 학부에서 배우는 형태가 확립됐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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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낙원
김상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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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낙원』의 저자 김상균은 인지 과학자이자 경희대 교수로 메타버스, 인공지능 등의 주제로 활발한 저작 활동과 대중 강연을 펼치고 있다. 인지과학과 산업공학, 로보틱스 등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강단의 교수가 쓴 SF 소설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김상균 교수의 『기억의 낙원』은 인간의 의식과 인지능력을 조작해 주는 상품을 판매하는 '더 컴퍼니'라는 회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SF 소설이다.  삶이 주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컴퍼니를 찾는다. 예를 들면 평생을 무능력한 남편과 성인으로서 제 몫을 해내지 못하는 자식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으나 병을 얻어 시한부가 되어버린 아내를 위해 남자는 더 컴퍼니를 찾는다. 남자는 아내가 행복한 기억을 안은 채 삶을 마감하기를 바란다. 더 컴퍼니는 돈을 받고 남자의 아내에게 조작된 것을 주입하고 안락사로 이승에서 삶을 종결한다. 그리고 어떤 부모는 자녀가 의사가 되길 원하는 욕심으로 별다른 꿈이 없는 자녀에게 스스로 의사가 되길 원한다는 가짜 의지를 주입하려 한다. 한 의뢰인은 자기 가족의 행복을 망가 뜨린 작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를 하려 한다. 한편 더 컴퍼니는 고객이 요청한 서비스에 얽힌 윤리적 도덕적 문제에 대한 가치 판단에 관여하지 않는다. 판단과 선택은 오로지 고객의 몫이다. 『기억의 낙원』 소설의 주인공이자 더 컴퍼니에 취업한 하람을 통해 소설의 초반부터 독자에게 더 컴퍼니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얽힌 윤리적 문제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하람의 옛 연인이자 신문기자인 소이를 등장시켜 더 컴퍼니가 판매하는 서비스를 추적하면서 소설에 서스펜스를 더한다.



이번 책이 내게 준 재미는 인지과학과 뇌과학 지식들이 소설의 소재로 활용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사피엔스가 가진 뇌의 생물학적 사회적 특징을 분석한 대중 교양 과학서들이 많이 나와있다.   '작화증', '브로카 영역' 등 뇌과학 분야의 흥미로운 발견들이 『기억의 낙원』의 소재가 된다. 사피엔스의 뇌는 진짜로 겪은 것과 상상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한부 아내의 마지막 길에 조작된 행복 기억을 주입한다. 또 사피엔스의 뇌는 영혼이 깃들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허파나 간처럼 인체의 장기이다. 이 책의 도입부에 소설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장교수가 사랑하는 아내의 뇌를 분리하는 실험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그간 내가 읽어온 논픽션 글들이 픽션으로 탈바꿈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만약 이 책이 영화화되어 시각적으로 펼쳐진다면 어떨까 상상했다(참고로 사피엔스의 뇌는 영상을 볼 때는 주로 시각적 영역이 활성화되지만 문자로 읽을 때는 뇌 전반의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니 이 소설은 신뢰가 가는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럴듯한 이야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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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낙원
김상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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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자가 쓴 SF 장편소설이라 기대가 된다. 인간의 기억은 애틋하고 아름답고 슬프지만 동시에 왜곡과 모순 투성이며 때로는 파괴적이다. 과연 소설가로서의 김상균 교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놀라게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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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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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펭귄 하이웨이』 은 제31회 일본 SF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표지부터 너무나 귀여운 이 소설은 내용 역시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교외에 있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4학년 아오야마이다. 아오야마는 스스로를 머리가 매우 좋은 데다가 공부도 열심히 해서 크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도 많이 읽고 메모도 열심히 한다.

그러던 어느 쾌청한 5월의 어느 날, 아오야마의 동네에 있는 '오리너구리' 공원에서 느닷없이 펭귄 무리가 목격된다. 왜 나타난 것일까? 똑똑한 아오야마는 아버지가 사준 빨갛고 단단한 표지를 가진 노트에 펭귄을 관찰하여 꼼꼼히 메모를 한다. 우선 펭귄들이 아델리펭귄이라는 것은 금방 파악했다. 이 펭귄들은 남극과 그 주변 섬에 서식한다고 책에 쓰여있는데 교외의 주택에 왜 나타난 것인가? 공부할 것도 많고 관찰해야 할 것도 많은 아오야마의 최우선 연구과제는 이제 펭귄 연구가 된다. 아오야마는 펭귄 출현에 대한 탐구의 제목을 '펭귄 하이웨이'로 한다. 펭귄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올 때 으레 지나가는 루트를 '펭귄 하이웨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어떤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아오야마는 펭귄이 나타난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하여 가설도 세운다. 한편 아오야마는 동네 치과의 누나를 좋아한다. 비범하기로 치면 아오야마는 치과 누나에 범접할 수 없다. 치과 누나에겐 엄청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치과 누나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풀어 놓으면서 이 책이 SF 판타지 장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내게 이 책의 재미 요소는 아오야마의 문제해결 능력이었다. 아오야마는 그 어떤 사건 앞에서도 진지한 꼬마 과학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는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연구한다. 이 똑똑한 아오야마는 때때로 본인의 명석함을 지나치게 의식하는데 이것조차 귀엽다. 아오야마의 반응들은 내겐 웃음 코드였다. 소설은 아오야마가 펭귄의 출현과 치과 누나와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리고 아오야마가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는 늘 그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었으며 지혜를 건네주었던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등 어른들이 있었다.

검색해 보니 일본에서는 2018년 8월 17일에 애니메이션 영화로 개봉을 했고, 국내 첫 상영은 그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치과 누나 목소리는 아오이 유우다. 티빙에서 이용권을 구입하면 볼 수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보아야겠다.




* 출판사 서포터즈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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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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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러시아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히는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삶과 운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되는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이 대작은 독일군이 스딸린그라드를 포위한 1942년 9월 말부터 1943년 4월까지 약 육 개월 남짓한 시간을 담고 있다. 국내의 많은 작가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데, 올해 6월 창비 출판사의 창비세계문학 시리즈로 3권 세트로 출간되었다. 『삶과 운명』은 두 전체주의 세력인 독일의 파시즘과 스탈린 체제의 공산주의 정권, 그리고 전쟁에 희생된 인간의 삶과 찢겨 나간 시대를 다룬다.

『삶과 운명』은 총 3부로 이루어졌고 각 장은 독립된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방대한 작품을 요약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세 가지 축을 들자면 독일과 소련의 수용소, 스딸린그라드 전투, 물리학자 시뜨롬과 그 가족들이다. 이 대작에는 수백 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며 실존했던 인명도 언급된다. 이 작품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한계란 없다는 것을 증명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시대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전체주의 체제는 인간성 자체를 벗겨냈다. 그간 프리모 레비의 책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에디트 에바 에바 에거의 <나는 마음감옥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등 수용소 문학을 통해 나치가 벌인 제노사이드는 글로는 접했다. 인간은 '우리'와 '그들'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종이다. 인간성이 미치는 영역은 '우리'에 한정한다. 거칠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간 나치를 통해 우리가 '그들'을 대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목격했다면, 이번 작품을 통해 스딸린 정권이 보여준 우리가 '우리'를 대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알게 되었다. 가령 스딸린의 집단화 정책은 그의 체제에 속한 농민들을 굶겨 죽였다. 배를 곯다가 미쳐 버려 엄마가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었다. 가족 내 식인 행위가 상상 이상으로 빈번했던 시기였다. 스딸린 체제에서 나름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굶지는 않았겠지만 스딸린의 신임, 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우정, 사랑, 관계 같은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다. 즉 진정한 당성 의식은 역설적으로 희생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전체주의는 인간이 당성 의식과 충돌될만한 것 자체를 보존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제 자식이라도 당의 노선에 위배되는 언행의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것이 아주 사소할지라도 언제든지 신고할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


현대 러시아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히는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은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삶과 운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되는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이 대작은 독일군이 스딸린그라드를 포위한 1942년 9월 말부터 1943년 4월까지 약 육 개월 남짓한 시간을 담고 있다. 국내의 많은 작가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데, 올해 6월 창비 출판사의 창비세계문학 시리즈로 3권 세트로 출간되었다. 『삶과 운명』은 두 전체주의 세력인 독일의 파시즘과 스탈린 체제의 공산주의 정권, 그리고 전쟁에 희생된 인간의 삶과 찢겨 나간 시대를 다룬다.

『삶과 운명』은 총 3부로 이루어졌고 각 장은 독립된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방대한 작품을 요약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세 가지 축을 들자면 독일과 소련의 수용소, 스딸린그라드 전투, 물리학자 시뜨롬과 그 가족들이다. 이 대작에는 수백 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며 실존했던 인명도 언급된다. 이 작품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한계란 없다는 것을 증명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시대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전체주의 체제는 인간성 자체를 벗겨냈다. 그간 프리모 레비의 책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에디트 에바 에바 에거의 <나는 마음감옥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등 수용소 문학을 통해 나치가 벌인 제노사이드는 글로는 접했다. 인간은 '우리'와 '그들'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종이다. 인간성이 미치는 영역은 '우리'에 한정한다. 거칠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간 나치를 통해 우리가 '그들'을 대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목격했다면, 이번 작품을 통해 스딸린 정권이 보여준 우리가 '우리'를 대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알게 되었다. 가령 스딸린의 집단화 정책은 그의 체제에 속한 농민들을 굶겨 죽였다. 배를 곯다가 미쳐 버려 엄마가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었다. 가족 내 식인 행위가 상상 이상으로 빈번했던 시기였다. 스딸린 체제에서 나름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굶지는 않았겠지만 스딸린의 신임, 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우정, 사랑, 관계 같은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다. 즉 진정한 당성 의식은 역설적으로 희생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전체주의는 인간이 당성 의식과 충돌될만한 것 자체를 보존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제 자식이라도 당의 노선에 위배되는 언행의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것이 아주 사소할지라도 언제든지 신고할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은 군인과 시민이 모두 동원된 총력전이었고, 전무후무한 무차별 살육이 자행된 전쟁이었다. 저자 바실리 그로스만은 우끄라이나 유대인 지식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평생 스딸린 체재의 검열과 압제에 시달렸다. 저자가 처음부터 반체제 작가는 아니었다. 처음엔 친체제 작가였고,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자원하여 종군기자가 되었다. 그는 스딸린그라드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몸으로 체험했다. 나치가 저지는 만행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한 뒤 독일인들에게 저지른 만행도 목격했다. 저자는 나치즘과 스딸린주의를 거울처럼 비추고, 히틀러와 스딸린을 형제로 간주한다. 전체주의는 개개인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하고 영혼까지 노예화시켜 체제 유지의 도구로 활용한다. 전체주의가 인간성을 벗겨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까지 대할 수 있는지 『삶과 운명』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물론 이 작품이 인간의 악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강을 불태우고 인간의 육신을 찢어 발기지만 그 속에서도 웃음과 낭만을 잃지 않는 소련군과 부하들을 뻔히 보이는 사지에 내몰지 않기 위해 당의 지시를 거역하는 간부도 있다. 수용소에서도 서로에게 빵을 양보하는 이들은 존재했다. 사람들이 낙관적이면 낙관적일수록 더 작은 것에 연연하고 이기적으로 구는 모습을 보인다는 문장을, 속에 지닌 슬픔이 크면 클수록 생존의 희망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 많음이 넓고 더 선하고 더 훌륭한 사람이더라는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삶과 운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문장들이 형태를 갖추어가며 조금씩 뭉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사놓고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아만 두었던 역사 관련 책들도 다시 펼쳤다. 스딸린그라드의 강이 불타는 장면을 읽다 보니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가 상세히 알고 싶어졌다. 『삶과 운명』은 역사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깊게 읽고 싶은 마음을 안겨주었다. 양차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시대가 저버렸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냈던 인간들의 삶과 이 평범한 인간들이 행한 선악을 읽고 나니 이전의 나에서 몇 발짝 옆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책은 읽기 전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도록 한다. 『삶과 운명』은 내게 그런 책이다.



*출판사 이벤트에 응모하여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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