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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이 공부다 - 수학천재 이수홍과 엄마가 함께 쓴 성장이야기
이수홍.허종숙 지음 / 다산에듀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p.s 설날은 단지 무의미한 동어반복일 뿐일까요. 다가오는 설날은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간다는 불길한 전조를 복선으로서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닐 테죠. 그러나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달리 보면 새롭게 완성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게 죽음을 향해 점차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다는 걸 알면서도 심히 뿌듯함을 감출 수 없는 거죠. 지난해의 내 문장의 강도는 어떠했는가라는 자기 반성적인 재정립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점차 자기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해, 영혼의 완성을 향해 저는 나아갑니다. 즐거운 설날,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설날이 되시기를.

소세키식으로 수수하고 담담하게 미학을 운치 있게 풀어놓는 글쓰기의 기법 혹은 기술적 접근에 도전한다는 생각이 몰록 들었다. 그동안 집에서 부랑무식하며 학문을 수양하기에 바빴으나, 사실 제대로 집적한 건 없지만 글을 쓰겠다는 상념 하나는 떨쳐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근자에 나에게 주어진 건 철학사상적 재능이 아니라 문학적 재능이라는 사실이 더 강하게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글쓰기의 목적론적인 성취를 위해 쓴다는 점에서 철학사상가나 문인은 다를 바가 없을 테다. 과거에는 절치부심하며 삶에 대한 걱정을 반복했지만, 지금 내가 갈 길이 뚜렷이 정해지다보니 더이상의 걱정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유명한 문인과 나를 유비할 때 기량적으로 천양지차일 테지만 그도 나도 분기탱천하여 수승함으로써 과거에 이미 쓰여진 글을 적는다는 ‘채록’의 개념을 어쨌거나 반복한다는 것은 상이하지 않은 것이리라. 나는 학문의 도정에 들어선 신입이다보니 호시우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나, 자신의 학문적 열정에 본과 권을 진중히 둔다는 점이야말로 비결락성과 불침투성의 완성일 것이라고 마땅히 점쳐본다.

 

청소년 시절에는 상사곡류에 휩싸여 내 소극성을 비하하고 자책한 나머지 고독과 좌절 그리고 회환에 빠져 오랜 시간을 낭비했지만, 이 패배의 기록이 매재되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것을 나는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내가 살아온 삶의 편린들은 비록 지금 완성된 내 자신과 비교할 때 동형성의 측면에서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허나 입전수수하면서 자기 갈 길을 가기에 나는 너무 세밀하고 사색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므로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흘러온 시간들을 현재에 밀어 넣어 새로운 자기상을 직조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세키는 내 청소년 시절의 커다란 빛이었다. 그의 인생 기록과도 같은 사적인 픽션들이 나에게는 근대의 딜레마에 빠진 한 위대한 문필가를 지켜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그를 본받아 나도 저처럼 공수래공수거로 오로지 가진 것 없이 감각 하나로 이 세상을 흝고 지나가면 그만인 것을. 따라서 검소하고 깨끗하게 사회의 온갖 더러움과 여색의 퇴폐성을 응시하지 않고 단지 학문에 빠져 세상을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참 유하고 무심에 가까운 마음으로 심미적인 문장을 유려한 필채로 그려나가면 이야말로 순문학을 쓰는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문인은 구도자와도 같아야 한다. 정아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가와바타 야스라니의 ‘설국’처럼 미묘하고 아름답게, 간명하고 절제 있게 써나가면서 순문학의 ‘순’이라는 형용명사가 진짜배기가 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미이며, 미국의 논리실증주의가 상정한 미학론의 한계에서 벗어나 그 옛날 칸트가 규준했던 진정한 의미로서의 미학만이 우리에게 진실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할 터이다.

 

우리 학계가,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많이 서구 학계에 물들었는지는 현재의 학술적 용어들로 보면 새삼 알 수 있다. 사자성어가 점차 사라지고 철학에서는 일본어들이 주구장창 날뛰며 라틴어와 프랑스어, 그리스어와 영미어만이 개념을 통칭하는 대명사들의 표준이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좀더 우리 한국어를 발전시켜서 학계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래도 학계 전체의 팽창, 공리주의식의 확대밖에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래어도 한국어로 받아들이고 이를 우리의 고유명사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언어의 변증법적 시도로 새 개념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방법론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어린 아이처럼 내가 사는 책 한권이 한국의 정신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그래서 한 달에 60만원에 가까운 돈을 책에 투자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책들을 죽기 전까지 다 읽지 못하더라도 후학인 내게 주어진 사명은 다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책을 구입해줘야 그들도 나의 책을 구입해줄 터이니.

 

오늘도 소세키의 눈과도 같이 순백색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어두컴컴한 겨울 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다시 찾아오지 않을 보기 드문 젊은 날의 추억이리라.

 

마지막을 방금 쓴 따끈따끈한 제 시로 끝마칩니다.

 

꿈의 세계

 

어릴 적부터 나는 꿈결과도 같은 세계를 반추시키고자 노력했다.

진정으로 명증이 떠오르는 꿈의 세계를 체현하길 원했던 것이다.

현실은 허상이고 꿈이야말로 진실이라는 진리를 난 소싯적부터 깨닫고 있었다.

소년 시절 나는 다른 애 띤 소년의 얼굴과 그의 걸음걸이를 상상하곤 했다.

동심과 아름다움으로 얼룩진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

유재하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어린 시절 순수하고 꿈으로 가득 찬 따스한 열정이

어린 한 소년을 생각한다. 그가 바로 나다.

지금 내 나이 22, 다시 어린 시절의 꿈결에 파묻일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

청년시절의 로맨스도 동심이 일으키는 미묘한 감각의 착란을 능가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은 단지 소싯적의 생에 대한 열정에 전복돼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색과 추억의 편린들이 마치 하나의 만화경처럼 시계視界에 아로새겨진다.

어린 시절 나는 꿈을 위해서만 살았었다. 현실은 허구일 뿐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한은 가히 동양적 미의 정수이자 순수한 서정의 세계이거니와 시인이자

소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꿈은 꿈을 불러일으키고, 그 꿈이 영원히 존속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 때, 그때에

비로소 나는 자유의 몸으로 재림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죽을 때, 사후에 우리는 여태껏 보지 못한 밝은 빛이 성스럽고

정아하게 비추는 꿈의 세계에 입적할 것이리라.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깊은 밤의 와중에 ‘미석 임미종’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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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이집트가 드디어 급진세력에 넘어가는 혁명의 순간을 맞게 되었군요. 과거의 프랑스 혁명과 나치 혁명, 미국의 독립 혁명처럼 또 하나의 평등을 지향하는 계기가 꽃처럼 피어오릅니다. 반미세력은 더 확장되어야 합니다. 소련이 내걸었던 모토가 미치광이 고르바초프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지만, 이러한 마르크시즘-레닌이즘의 선진적 좌익 급진성이 세계 도처에서 유지될 때 사회주의는 여전히 우리 생활에서 살아 숨쉬는 위대한 것이겠지요. 우리 역시이집트와 같이 이명박의 퇴진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공화성이 너무 발달한 공화제 국가인 남한입니다. 아쉽게도 자본의 물결에 온통 휩쓸려 모두가 바쁜 시점에서 우리는 MB의 보수주의적 독재에 대항할 어떤 무기도 찾지 못하고, 단지 대항논리만이 담론적으로 배태될 뿐, 친미/친일을 위시한 반동 분자들의 움직임에 기를 못 쓰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 글은 학문이 모든 기술과 현명함의 원천이라는 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소천한 제 글을 읽어주신 많은 알라딘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일천한 지적인 재량/실력으로 첨단을 달리는 번역에 윤문을 가미한 인문학서를 나름 윤독해 나가다 보면 재삼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거기에 담긴 다의성/다층성의 모호함과 심도 있는 층위의 독보/독자성에 놀라 내가 그동안 사변과 이론을 얼마나 공소히 여겼나 책망하게 된다. 가령 좌파 이론에서 대종을 이룬 마르크시즘에 착근하면서 새로이 그 뜻을 면밀하고 정치한 측면에서 보다 확실시하는 착종 단계에 이르게 되면, 나는 새삼 타자들과 담론이라기보다는 격론에 가까운 대담을 한 것이 은근 신경 쓰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도, 나도 명증한 변증법적 실증의 도출을 가늠해보지 못한 데서 오는 일종의 자괴감과 자신의 한계성에 대한 깊은 회환이 마치 일련의 운위와도 같이 드리워지는 데서 오는 비근함과도 같아, 한결 한숨과 질식의 어두움을 맛보게 되는 것이므로. 이리하여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의 대로란 사정없이 애매모호한 것이어서 모종의 일희일비의 연쇄에 시달릴 수 없는 기구한 운명에 당착하고, 결국에는 내면적으로 축 늘어져 비애와 회한으로 일생을 탕진하는 것이리라. 이를테면 순문학에서는 인간 내면의 정념이나 정동을 멋있고 로맨스적으로 표현하지만, 프랑스 상징주의나 독일 낭만주의에 비해 한국 근대문학은 전체주의적인 내선일체를 주장하여 한국문학의 국수주의성과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일명 ‘더러운 문학’이라는 일면을 간과할 수 없었다. 비애와 회환도 단적으로 보면 지극히 인간지옥에 다름 아닐 테지만 예술가들에게 있어 이는 삶의 의미를 도출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코드로서 예술적 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자기완성으로의 도정의 하나이다. 물론 내가 언급하는 정치적 문학의 ‘비속성’이란 단순히 정치적 문학이 통속적이라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는 더 나아가 정치가 문학에 위임되면 순문학의 시성과 질적으로 순백과 같은 시나리오의 진선미가 파탄나고 마침내 계몽주의적 성격을 띈다는 것을 경계하는 측면에서 그리하다. 따라서 문학이 정치에 이용당하는 양태를 나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학에 정치성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것 또한 문학의 위상이 급락하는 사태에 귀결될 것이므로 순문학을 분류함에 있어 ‘휴머니즘적 감수성’의 문학과 ‘계몽적 정치성’의 문학, 사르트르식 ‘철학적 추상성’의 문학, 이렇게 삼고봉으로 되어야 할 터이다. 물론 대다수의 뛰어난 문학들은 혼종적인, 계열의 접합을 선호한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희곡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치와 철학이, 소세키식으로 계몽과 감수성이 뒤섞이는 뉴에에지가 탄생하곤 한다. 그러므로 순문학의 정의에 이렇다저렇다할 적절한 이론적 배경을 깔아 놓을 수 없는 게 문학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집적한 경험칙을 토대로 어떤 적실한 판단과 행위를 세상이라는 둘레에서 윤허시켜야 하며, 우리가 대뜸 생각 없이 내던지는 언술이 화용론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위험을 직시할 정도로 기민해야 한다. 하기야 유대 담론식으로 어설프게 자신의 진리치를 선언하고자하는 종교인들과 사상가들을 우리는 밥 먹듯 자주 마주치지만, 그들은 자신의 언어가 고유한 발화수반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종교와 같은 영지적인 것은 대개 변증론적 영역에 존속하는 형이상학적이고 가치형태론적으로 선험적이기는 하나 이를 우리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당연 칸트의 말대로 ‘순수이성 밖’의 미시적 현상, 이른바 인간 조건의 피안, 따라서 종합하자면 이 모든 게 통정적인 것에 다름 아닐 테다. 무한성과 유한성이 병존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제약의 우주에서 이율배반의 회로에 자신의 삶이 걸려 있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살면서 우리 비천한 인간이 일으키는 대오각성이나 돈오란 단지 변증론의 세계에서 보자면 실로 미소한 것이며, 우리는 기투를 함으로써 오류추리의 변증법을 따라 삶을 새롭게 정립하고 또 재정립하며, 마침내 합이라는 완성의 기틀을 축조한다. 그래서 헤겔식 변증법이란 기실 억양법적인 사유적 수사의 놀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사고, 소위 종단적 사고에 익숙해진 한국사회가 반례하는 편견과 아집, 타성과 무식 일변도는, 마르크스가 설파했던 횡단적 사고, 즉 변증법적 유물론식 사유라는 집적회로의 구동을 실천하지 못한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이 무식과 아집으로 인한 지리멸렬한 분열에 딱 맞는 처방은 단 하나, 인문학과 이공학에 대한 철저한 습득이다. 이리하여 내부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면 우리는 그 외부성 즉 기술과 보편적인 도덕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철학자들의 변증론에 대한 지독한 열정이 지금의 21세기 첨단문화를 낳았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처럼, 패러다임이라는 ‘거대한 유물론과 관념론의 총합적인 관점’ 역시 수많은 개별자들의 의사소통과 인과론적 관계가 창출한 유산임에 진배없으리라. 그러니 우리는 무엇보다 실사구시의 학문을 창도했던 조선 선비의 아량과 폭넓고 당찬 학문에 대한 열정을 억겹의 시간이 흘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한국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최대의 화두는 오직 하나, ‘순수학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자신의 이성을 규제적으로 사용하여 미래에 세상을 재편할 이상을 갖는 도정을 걷는 것이리라. 따라서, 지금은 학문에 문을 두드릴 시간이다.


 


 


양주시 덕계동 개인의 서재에서 도둔산을 보며 '미석 임미종'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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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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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 문득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동장군이 양주시를 습격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배란다에 나가 뻐끔버끔 담배를 피웠다. 이 가련한 백면서생에게는, 다만 남들의 사상을 수미일관 개량하여 맞불을 놓는 게 아니라, 고대철학의 전통을 계승·보전하여 독자적인 자기 노선을 개설하는 하나의 역전현상, 곧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뭔가가 있었다.
  추위와 혹한은 육체를 쪼그라들게 만들지만 오히려 인간의 정신에는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원측적으로 우리가 의식의 표면에만 안주하려고 하여 그 밖에는 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의식이 외부에 대상을 둔다는 것은 곧 의식의 전환을 뜻한다. 우리가 공공연히 근시안적으로 일을 대할 때, 우리는 감옥에 갇힌 죄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좀 더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파악함과 동시에 심오한 내적 필연성을 지향해야만이 인간이란 동물과는 다른 고유한 영혼존재로서, 거기 있어야말 존재론적 당위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리라. 따라서 이 글에서 살펴볼 내용은 철학의 새삼스러운 중요성에 대해서이다. 생활에 있어서, 시대에 있어서 철학이 얼마나 핵심 이를테면 뼈와 살이 되는지 우리는 누구보다 정확하고 명증하게 그것에 대해 꿰맞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경향적 모순들을 귀일하여 하나의 순일한 일자(一者)에 원리의 체계적 총체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추운 겨울이 다가올 조짐이 보인다. 추위의 고통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더욱 고양시킨다.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리라.    





- 본론

1.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다.

사르트르는 머리로 사유하지 않았다. 그는 글, 곧 언어로 이러쿵저러쿵 갈겨쓰고 재정리함으로써 하나의 구조를 설계하고, 입체적으로 조망해 새로운 이론으로 뻗어나가는 신기원을 이룩할 수 있었다. 코난도일의 소설에 나오는 셜록홈즈도 물론 사방팔방 증거를 찾거나 하는 동태적인 수사법을 갖지 않은 채,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골방에서 간추리고 분석하여 종합함으로써 연역적으로 접근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의 총체로 구성하여 사건의 심층적인 전체적 구조도를 도식화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칸트 역시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57세라는 늙은 나이에 철학을 시작하여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관념의 사유를 통해 철학 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에 등극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장소와 시간, 나이와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골방에서 사고(思考)와 사유를 거듭하는 것은 일견 미네르바를 떠오르게 한다. 미네르바는 인터넷으로 서적들을 시키고, 음식은 배달로 하여 골방에서 사유의 정점에 올라 정부를 뒤흔들어 우리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던 골방사상가이다. 요근래 조기유학을 위시하여 자녀를 해외의 선진문화를 학습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사실상 ‘문명의 충돌’을 경험한 자녀들이 세상의 패러다임을 읽는 능력이 발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필자도 같은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그 돈으로 고급 양서들을 구입하여 어릴 적부터 학문적인 조숙함을 자녀에게 각인시킨다면 그보다 더할 가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리라. 하기야 공감각적 경험의 패러다임의 개선과, 학문에의 사변이성관의 성숙의 절충 이른바 정체성의 양대산맥의 교집합적 종합이 더 바람직한 보편타당의 지성을 확립시킨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가령 뼈없는 이론가는, 실재적인 실천의 측면에서 여행인이나 경험자가 체험하는 교묘하고 정치한 측면의 다각도적인 순간적 직관의 깨우침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곳에서 사업적 자문을 받아도, 직접 사업에 뛰어들어보면 그 형태와 질적인 차이가 전혀 진배없음을 알아채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어중이떠중이들이 자신의 이론적인 선입견을 앞세워 진술한 책들이 가져오는 편견보다는, 행동이 공인의 인증을 받고 설파한 책들이 산출한 실천적인 생활관을 지향하고 거기에 방향성을 두어 숙고해야 할 것이다. 무릇 언행일치야말로 지식인의 보배라고 할 수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상가들의 언론을 통한 감언이설적인 간접적 정치참여는, 마땅히 배척되고 피고인으로서 심판대에 설 그런 중요한 안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우리는 우리의 앞에 살았던 이 예술가의 말마따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른바 자기본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야흐로 범신론과 무신론이 이항대립을 이루는 시대이다. 유신론과 이신론은 이미 과거의 문헌이 돼버렸다. 요컨대 범신론과 무신론의 대두 혹은 득세는 현대철학을 논하면서 단연코 빠뜨릴 수 없는 화두의 근원이 되었으며, 만약 범신론과 무신론을 이어주는 가교가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식론에 대한 우리의 성찰의 내용에 있을 것이리라. 예의 관건은, 세상을 과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사회를 비롯한 삼라만상 즉 전우주를 철두철미하게 하나의 총체로 규정지어, 메타적인 세계 즉 인간조건의 피안에 위치하는 세계를, 우주 너머의 혹은 우주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미시적이면서도 복잡다단하고 불가해한 신의 저편을, 보기를 거부한 채 지적방기를 자행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뼈저린 후회를 심어줄 그런 ‘거시적인 패턴으로서의 관조’이다. 가령 현대과학의 색안경은 주조된 지 2세기가 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대 과학을 규정하는 자들을 비롯하여 이 시대 모든 얼빠진 자들은 자신들의 자구책을 도구로 하여 교조적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 그로 인해 변질된 사물들이 마치 진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분명 시대적인 오류이다. 한시적으로 어떤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조각이나 연결고리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몰지각한 방법이다. 우리는 거기서 좀더 큰 그림을 관찰해야 할 필연적인 철학의 열정을 자각한다. 세상이라는 큰 그림의 거대한 총체를 직시하기 위해서는, 한시적인 패턴을 쫓아가기보다는 보다 원시적이고 고전의 기법을 체득하는 것이 낫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을 선택하는 것이며, 철학만이 전우주와 거기에 내재하는 미시세계라는 엄청난 전대미문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저주받은 인간존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될 것이다. 비단 시대정신이나 시대사조에 입각한 철학만이 유행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대철학인 플라톤이 신플라톤주의로 변용되어 득세하는 것을 관찰한다면 고대철학에 본을 두고도 현대철학과 백중지간으로 어깨를 겨룰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철학에 본을 두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자는 공론에 가까운 관념적인 사유가 현대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키는가에 대해 의아해할 것이다. 요컨대 기술적·물리적 진보가 아니면 결코 현대사회의 상승이 아니라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선입관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필자는 변양 혹은 진일보한 세계에 대해 논급하는 것이 아니다. 미상불 글의 서두에서 이성에 대한 중요성을 논한 이유는 로고스 즉 이성이야말로 철학의 중심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이 무엇인가를 이성적으로 사유할 때만 알 수 있다. 사유의 과정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현실에 적용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성이 하나의 틀과 체계로 굳어지면,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이성이 아니다. 현실을 떠나 체계화된 이성은 개념의 납골당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은 우리가 당대를 사상 속에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시대에는 현대를 반성적으로 가로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호가 각인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이 우리에게 단순이 주어져 있다고 전제한 전통 형이상학의 전제에 강한 물음표를 붙이면서, 이성이 자신과 대립하는 타자를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만약 이성이 권력, 욕망, 무의식과 불가분의 짝을 이루고 있다면, 이성비판은 그 갈림길에 세워져 있는 길 안내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만약 이성 스스로가 이성과 반이성,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서양 중심주의와 문화상대주의를 산출한다면, 이 대립을 가로지르는 길이 바로 보편적 이성을 통해 세계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성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비판적 대결을 통해 살아 있는 이성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철저한 이성의 탐구뿐이다. 이성 자체가 하나의 길과 과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성과 대치되어 하나의 이항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철학의 핵심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이다. 그러니 우리는 존재에 대한 사유를 무엇보다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존재사유, 즉 존재에 대한 생각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그 존재에 대한 생각은 매우 다양하게 개진될 수 있다. 고대 소아시아 지역에서 체계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철학적 사유는 이러한 존재사유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이 부단하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였고, 언제나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최초의 철학자들이 제기하였던 생각들은 한 개인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세계관적 사유로까지 발전되었다.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오랫동안 철학의 중심 주제로 여겨져 왔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과학과 철학의 분립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철학은 시민들에게 있어 자명이 과학적인 학문이었고, 모두가 이를 의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자연철학으로 불릴 정도로,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체계적으로 사유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자연을 물질론적인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정신이나 신적인 것 역시 간과하지 않았다. 앞에서 필자가 지적하였듯이 현대인들은 이를 망각하기 십상이다. 탈레스가 상정한 ‘신적인 것’이나 아낙사고라스의 ‘누스’는 물질적인 것과 단절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면서 서양의 중세는 신 중심적 사고로 물들었다. 중세의 철학은 자연 존재의 궁극적 원인에 대한 관심이 주도하였으며, 모든 것을 바로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제1원인에 대한 탐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보편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는 신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세의 신학자들은 자연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을 선성(善性)이나 신성이 결여된 것으로 파악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이와 같은 자연존재의 결함을 신에게 전가시키지 않기 위하여 변신론적 논리의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물질론자들은 우주의 근본원리가 물질성에 있다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글의 서두를 장식한 골방철학자 칸트는 근대의 경험론적 사유와 이성론적 사유의 의미를 수용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심하지만, 두 사상 체계에서의 문제들을 자기 자신의 철학 체계 속에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물론 칸트 직전의 철학자들, 특히 영국의 경험론자들과 프랑스의 이성론자들은 경험과 이성이라는 인식 수단을 내세우면서 보편적 존재의 존재 여부 및 인식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확신하는 입장을 각각 개진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모든 시도를 넘어서서 보편 존재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가능성을 유보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가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신은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불가해한 존재였으며, 불가지론에 의거하여 신은 우리 인식 피안에 자리잡고 있는 보편적인 존재이며 그런 연유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를 인식하려고 하지만 거기에 다가설 수는 없는 상태에 있다. 칸트는 신이라는 형이상학의 가장 우위의 핵심에 자리잡은 존재가 인간의 하찮은 이론에 이리저리 논파되는 걸 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의 형이상학, 즉 자연형이상학과 도덕형이상학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안한 선험철학, 특히 경험의 가능성 조건들에 대한 인식논리적 탐구들은 사실상 물자체의 문제와 이성 요청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이론적인 지식과 실천적인 지식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는 경험적 장치들 속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형이상학적 전제들이 무비판적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칸트가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유랑하지 못한 무경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일 테다. 이런 한계성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경험과 사변이성의 종합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가 서두에서 말했듯이 ‘공감각적 경험의 패러다임의 개선과, 학문에의 사변이성관의 성숙의 병존’이 앞으로의 학술계의 후학들에게 제1이념으로서 다가와야 할 것이다.  
    
2. 인문학은 진정 죽었는가?

  불현듯 이런 생각에 잠긴다. ‘인문학은 죽었다. 과학기술의 진보에만 매달린 골이 빈 사람들은 혹은 배부른 돼지들은 인간을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셜록홈즈처럼 식물성알칼로이드를 조사하기 위해 코카인과 모르핀을 자기 혈액에 주사하는 그러한 실천적인 탐구정신을 가진 사람이 몇 되는가? 오늘날에는 문학이 단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된다. 그리하여 진정한 문인들은 자신의 이웃에게 자신이 다만 소설가일 뿐 그 어떠한 책무도 맡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은 철학자를 마치 점술가나 역술가 보듯이 취급하여 불쾌하기 짝이 없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진정 죽었는가?’.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인문학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시렁대고 다닌다. 과연 인문학은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듯싶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가 다수의 지식인이 아닌 극소수의 지식인에게는 오히려 만인에 대한 분노와 그에 따른 반동으로서 힘을 실어주며, 요컨대 이런 역설적인 증상은 도리어 난세에 영웅이 생기듯 새로운 대가(大家)를 창출하기 마련이다. 대가의 신출현은 새로운 국면을 빚어내며 난세를 타개하고 새로운 주의(主意)를 생성한다. 가령 2차 대전 후의 프랑스의 실존주의나, 이것의 열풍이 사그라들 때 쯤 다가온 구조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패턴변화는 항시 영웅의 의해 좌지우지되는 법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현대인들의 철학적·사상적 영웅은 누구인가? 21세기를 대표하는 신지성은 누구인가? 바로 지젝이다. 글쓰는 속도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빠르다는 학계의 농담을 계급장처럼 달고 다니는 그는 실로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금세기 전유럽을 통틀어 최고의 두뇌를 가지고 있다. 지젝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그 누구와도 비견할 바가 못 되어서, 6개월을 멀다하고 새로운 저서를 발표하고 있는 중이다. 인종청소가 자행되던 유고내전을 뒤로하고 쏟아내는 그의 저서들이 어느덧 의미 없는 반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실천적이지도, 그렇게 이론적이지도 않은 그의 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웠고 영화이론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으며 정신분석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론적이었고 정통 철학자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임상적이었다. 그런 그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걸까? 단지 일시적인 유행, 수사의 외양이 화려한 유행철학자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리일까? 그리고 그러한 판단이 한계 많은 우리의 전형적인 실수였음을 간주하게 된다면 그의 위대한 저서, 지젝을 이 시대의 가장 실천적인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하게 만든 책, 그를 존경하게 된 책, ‘시차적 관점’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하여튼 지젝이 논거를 이용하고 풀어내는 방식은 여타 철학자와는 달리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하며, 이런 특유의 그만의 방식은 21세기 철학이 걸어가야 할 길의 표본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많은 세계의 학생들이 책을 경원시하고 스크린과 인터넷에 빠진 게 근래의 현실이지만, 오히려 인문학 하나에 몰두하고, 현재 자본시장에 적은 돈만 내면 구입할 수 있는 방대하고 질 좋은 그럼에도 저렴한 저서들을 구입하여 독학하고 있는 인재들의 유비무환은 곧 닥칠 ‘인문학의 새로운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3. 인문학의 중심, ‘철학’.

  으레 그렇듯 인문학의 으뜸, 제 1학은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모든 학문 중에 제일 유서 깊은 학문이어서, 철학적인 의제를 탐구하는데서 문화에 대한 고찰을 염두해 두지   않고서는 그 진면목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껏 철학이 연구를 주력하는 대상은 뭐니뭐니해도 ‘인간’이었다. 한 인간을 철저히 탐색하고서는, 그 연구결과를 우주의 한 연결고리로 파악하고서는 그 고리로 말미암아 우주 전체를 통괄하는 역사적인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문명의 아주 기초적인 제반의 핵심 이른바 인프라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이것을 좌시하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기필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어설프게 자신의 미래를 암중모색하는 수많은 청년과 처녀들이 상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항시 그들의 자아와, 그에 대립하는 불가해한 난제들의 연쇄로 점철된 미래의 형상은 마치 창가에 비추어지는 풍경처럼 필수불가결하게 엮여지기 마련이어서, 우리는 그러한 오롯하게 상보적인 병존의 관계를 이항이라는 뚜렷한 이분법으로 구분할 게 아니라, 좀 더 항구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런 양분의 귀결을 하나의 변용하는 패러다임으로 결정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삼라만상의 엄존함에서, 무엇보다 그것이 있어야하는 근거를 파헤치는 데 주력을 가해야 한다손 치면, 그것이야말로 ‘철학함’이 강구해야하는 문제의식의 근원이므로, 우리는 요컨대 사유라는 도정의 결과가 임박하기 전의 일련의 도상의 연쇄가, 그 과정 중의 일희일비하는 관찰자의 관념의 유추 즉 연결고리로 온갖 번뇌와 사고를 순환시키는 과정에서, 과정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고 역사적 현실로써 하나의 입체를 완성시키는 것이리라. 이로써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미론적인 요소에 대해서 상정해보았다. 우리가 철학을 우리의 중심에 두고 즉 밑바탕에 하고 세상과의 전투에 임할 때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고 우리의 이념에 마땅한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규범과 가치판단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영원불멸한 인간존재의 표식이 될 것이리라.

- 결론 :   우리 삶 저변에 철학이 두루 깔려있다. 철학은 요컨대 시대에 관한 논쟁 즉 담론이라 할 수 있겠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의문점을 간파하게 해주며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해준다. 우리가 일벌레로서 고군분투하여 악착같이 사는 이유는 모두가 헤겔 말마따나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이리라. 마땅히 아들로서 이 시대를 짊어져야 할, 봉양해야 할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아무리 이 시대가 썩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개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근거를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내포하고 사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장중웅려하고 심원한, 인간의 복잡미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삶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돌보기 바쁜 그 한가운데서도 마치 세상이 전회하는 것 같은 대오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리라. 필자가 이 글에서 해명하고 싶은 안건은 바로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철학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며, 철학만이 우리 미래의 예상할 수 없는 사태에 처방을 내리고 해결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관건인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거울로 시대를 파악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아가 미래를 조망하여, 그리고 나서 과거·현재·미래를 합일하여 하나의 진리의 관념체계를 마치 하나의 기념비처럼 우뚝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우주가 이미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로질러 공간도 갖지 않고 모종의 차원이나 부피나 강밀도도 갖지 않은, 즉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총아임을 퍼뜩 깨달을 것이다.    


                                                 양주 덕계 푸르지오 서재에서 도둔산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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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 아이들
커티스 시튼펠드 지음, 이진 옮김 / 김영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재생, 단순히 과거로만 남아있는 학창시절의 재생은 아무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실용적인 21세기의 산문 형식이 머리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켜 버린 그날의 호기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재생'까지는 아닐지언정 그 후로 내가 불러 일으켜낸 모종의

상념, 아직도 필자가 이 글을 쓰기까지 잊혀지지 않는 수많은 정신적 경험들은 대

부분이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으리라.

  약간의 현기증을 동반한 어지러움과 위의 울렁거림을 뒤로 한 채 배란다를 통해

거침없이 들어오는 햇살을 아침의 배경으로 삼아 그날도 다름없이 신문을 펼치고

있었다. 거무튀튀하건만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는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역시

나 오늘도 흉흉한 소식뿐이군' 하는 생각과 함께 그냥 신문을 접어 책상에 내려놓

으려는 찰나 사뿐한 그림이, 한 교복을 입은 소녀가 학교를 풍경으로 서 있는 한

폭의 낯선 수채화가 머리속을 스치고 갔다. 그랬다. 의식적으로 신문을 빨리 넘겨

그와 함께 넘어간 내용, 어쩔 수 없는 나의 외곬적인 경향들, 합리적인 강박관념이

며 뜨겁게 부푼 허영심에 희생물이 되버린 한 소설의 광고를 나는 무의식적으로나

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대개 진부하고 통속적인 명랑소설이겠거니 하

고 넘어가지 않았던 내 태도가, 낯선 것에 대한 동경이라든지 일종의 불완전한 허

용이리든지 아무려면 좋다. 어쨋거나 나는, 필연적인 느낌으로 인해 무언가 산뜻

하고 유익한 서정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광고와의 대면을, 지금까지 내가

금기시해왔던 통속적인 미와의 교차를 스스럼없이 인정한 것이니까. 그리하여 내가

다시금 탐욕스럽게 신문을 펼친 이후로써,곧바로 그 책은 내 따스한 손안에 들어왔

다. 그렇게 [사립학교 아이들]과 나의 실제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눈 깜짝할 사

이에 지나가 버린 6개월 간의 무익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

지도 내가 결코 그날 6월 17일을 잊을 수 없는 건 무엇보다도, 특별하지만서도 일

상적인 소시민의 날들이 그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리 피오라, 그다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외모며 소박한 집안 환경, 볼품없는

사교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사립학교 생활은 마치 필자의 과거를 보는 듯했다.

가진것이라곤 예민한 성격과 함께 줄줄이 딸려나오는 공황장애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목들은 리 피오라의 학교생활이 결코 무난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자기

외에 다른 아이들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을 위선자라고 점철하면서도 그들의 시류

에 편승하고자 하는 리 피오라의 노력을 보면서 나는 대세에 합류하고자 하는 수많

은 아웃사이더 나름대로의 동경, 그렇지만 그것들을 혐오하며 그러한 이중적인 모순

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는 본인[여기에는 그들 뿐 아니라 필자 자신도 포함되

어 있다. 한 마디로 모든 그룹적 의미에서의 본인이다]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리

고 한편으로는 위선이며 거짓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가 단지 아무 권위도 가지지 못

한 자들, 이를테면 소수의 약자들로 생각되기도 했다. 작품 후반부에서 크로스 슈가맨

은 대표적인 남성 권력의 표본으로 제시되는데, 그의 친구 데빌의 말마따나 그는 학생

으로서는 공식적으로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학생 회장의 자리를 차지했고 그를

동경하는 대부분의 여성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으며 아니나다를까 좋은 성적까지

차지하여 후에 하버드에 가는 계기가 된다(물론 성적보다는 학생 회장의 위치가 그를

더욱 하버드로 이끌었음에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네 사회에 뿌리박힌 남성 위주의

권력이 나타내는 기호와 성향이 데빌의 폭로 아닌 폭로로 인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는

시점에서, 리 피오라 역시 그녀의 내면에선 어쩔 수 없이 약자로서의 단념이 사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패배적인 감정과 함께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녀의 슈가맨에 대한

감정이 실로 진심인지 럭셔리한 주류 사회에 동참하기 위한 욕구, 일종의 허영이자 자신

조차 그 실제를 파악할 수 없는 위선인지 필자가 감히 작가의 동의도 얻지 않은 채 확실

히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냉소적인 관점을 가미했을 때, 리 피오라가

슈가맨과의 육체관계를 통해 주류 사회와의 합일[合一]을 시도했다는 혐의 아닌 가능성

을 배제하지 못한다는 필자의 가설은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작품 도처에 깔린 상징성이 여러 면에서 비판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빈번하게

서술되고 있는 리 파오라의 독백에서 우리는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작품의 성향이 무

엇인지, 크게 둘로 나누자면 긍정적인 방향의 제시인지 사회 전반에 대한 망치질인지 제

대로 된 독자라면 다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콘치타와의, 마사와의 관계, 그리고 크게 보아서 리가 속한 얼트의 모든 학생들의 인간

관계에 대한 시각은 상당히 정통적인 서구 방식에 맞물려 있다. 감정의 이입이 최소화 된

인간 관계, 합리성과 권위주의가 계산적인 인간 환대 방식의 최첨단에 위치한 그런 인간

관계 말이다. 필자는 리를 혹평하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누구든지 권력에 대해서

자신의 역겨운 위선을 소진하려고 하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사립학교 아이들]의 냉철한

방식을 필자는 인정해주고 싶다. 모든 인간관계를 통틀어 전인교육이 표출하는 몇 가지

입장들, 오서독스함과 불변성으로 대변되는 현실적인 것들 그리고 현재의 것들이 한 소

녀의 이기[利己]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한치의 비유와 은유도 사용하지않

고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것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사심이 섞인 논외성 글로 내 중심

생각을 풀어 쓰자면, 19세기 후반에 빛을 발했던 대표적인 문학양식인 리얼리즘을 자연

스럽게 추구한 커티든 시트펠트가, 자신의 서재에서 광기어린 속도로 글을 쓰고 있는

그녀가 필자의 눈엔 한없이 섹시하게 그려진다.
     
  위의 단락에서 내가 리의 현실적인 인격을 조금 혹평한 감이 있는데 깊이있게 여러분

이 본 소설을 깊이있게 읽어 보았다면, 필자처럼 부정적인 방향으로 혹시라도 이끌 필요

는 없다고 생각될 것이다. 아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작품 초반부에 단연 돋보이는

오프닝적 특성인 게이츠와의 만남에서 단촐한 일상성과 소박한 긍정적 특성을 찾아보자.

  리 피오라의 선배격인 그녀와의 만남으로 미묘한 동성애의 흐름이 의도적인 느낌이 아

니라 비교적 자연스러운 시각으로 피력된다. 한마디로 게이츠에 대한 리의 감정은 세상이

마치 이방인에게 부과하는 정신적인 족쇄와 꼭마찬가지로 연거푸 병적인 감정질환자라고

화자되는 동성애자의 [동성애]가 아니라 인간 사랑에 대한 초기 과정이다. 게이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식어감에따라 대상이 크로스로 전환되는 과정은 한 인간이 처음으로 동성을

좋아하게 되고 그것을 발판삼아 이성을 향한다는 평범한 사람의 사랑 공식을 말하고 있다.

  필자의 주관[主管]아닌 주관[主觀]으로 다른 작품과 비견해 보자면 일본작가 나쓰메소세

키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 [마음]이 아포리즘적인 방식으로, 독백과 예민한 기교

를 섞어서 직접적으로 이것에 대해 언급했다면 [사립학교 아이들]에서는 보다 간접적으로

이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설명하고 있다. 반면 게이츠와의 산뜻한 조우는 진실성을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후에 콘치타와의 이별과 함께 극중의 아름다운 서사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

이 아닌가 한다. 역시나 명랑소설의 모태를 둔 작품인 만큼, 이 작가가 섬세하면서 여린

감정과 훌룡한 감각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콘치타와의

이별이 가져다 주는 상큼함과 깊이있는 아련함, 약간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데서 학창시

절의 순진성에 비중을 찾을 수 있는 그 아득함, 미약하나마 인간 관계에 대한 비의와 역

설성을 나타내는 콘치타에 대한 피오라의 독백, 예컨대 이 모두가 작가의 깊은 서정심에

대한 증거이며 반어적인 변증법을 여기에 대입해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작가 특유의 진실

성에의 의지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립학교 아이들]의 광고를 봄으로써 기대했던 것만큼 부[富]의 기분좋은 탁월함이나

우월성, 그리고 내심 기대하고 동경했던 특권적인 성향을 찾아볼 순 없었다. 이미 이 책

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부호의 자제라는 걸 대중매체

가 미리 전제조건으로 깔아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독특하게도 이 작품에서 리 피오

라는, 부라는 것이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삶을 풍족하게 해주며 아름답게 해준다고 말

하고 있다. 그 부분에서 나는, '야, 이거 정말 세련된 작품인데!'하고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작품상의 리 피오라, 그녀는 삐까번쩍한 검은색의 리무진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좋아

하고, 특히나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의 가난[사실 그녀의 집안이 가난한 건아니고 아마도

얼트의 아이들이 지나치게 부자이기 때문에]과 촌스러움, 세련되지 못한 데서 오는 천박

함을 극도로 부끄럽게 여기는 걸로 비춰진다. 그러나 그러한 증오는 모두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리가 자신의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건 그녀의 변덕스럽고 모순적

인 감정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알 수 있다.

  [사립학교 아이들]은 기존의 숭고하고 탐미적인, 그러면서도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고전 문학들과는 달리 [사립학교 아이들]은 확실한 시대의 풍조에 거슬러 올

라가고 있는 동시에, 역사깊은 문학사조[文學思潮]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 혁신적인

지(知)의 도전 혹은 새로운 형태의 진보라고 불릴법한 이 용감한 작품에서 우리는 실로

꾀까다로운 도시적 아방가르드의 전범[典範]을 맛 볼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영미 문학사에서 꾸준히 스포라이트를 받아왔던 냉소성 문학의 대

표격인 [호밀밭의 파수꾼]이 관통해왔던 기득권과 기성 세대의 위선을 시튼펠트 나름대

로의 경험에서 휙득한 자격지심을 바탕으로 그녀만의 독특하고 세련된 방식으로써 [또다

른 관통]을 시도하고 있다.

  얼트에서의 생활에 대한 그녀의 최종평가에서 그녀는 자신의 예민함과 좋지 못한 집안

사정, 슈가맨과의 원하지 않는 이별들을 통해 자신의 수년간의 학교생활이 불행하며, 그

불행 속에는 늘 긴장과 기대감이 서려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숨막히는

청춘의 순정과 우정, 냉소와 사랑이 공존하는 인식 체계를 돌이켜 보며 자신은 결국 행

복한 과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시간을 보내든 저런 시간을 보내든, 화려한 삶

을 살든 부족한 삶을 살든, 행복한 삶을 살든 불행한 삶을 살든 결국에는 모든게 아름답

고 소중하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고대 동양사상과도 일치하는 이 인간적이며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아포리즘적 관념을 그녀가 통찰 했다는 것은, 그렇다. 그녀는 성숙한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숙을 지켜보는 필자의 마음에 잔잔한 슬픔의 바다가 가득 흘

러넘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이에 대해서는 책의 후반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리가 얼

트에서의 생활이 영원할 것 같이 느끼곤 했던 것이 어느새 자신이 고대해 왔던 졸업의

순간이 임박해 오는 걸 알아채고는 흠칫 시간에 대해 숙고하는 장면에 필자의 모든 슬픔

이 의거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유년 시절, 청소

년기 그 외에 많은 소중한 시간들이 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학창시절을 논외로 하고는 소

중함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꺼낼 수 없을 겁니다"라고. 그런데 리는 영민하게도 자신이

지금껏 얼트에서 겪었던 순간들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란 것을 졸업하기 직전에 퍼뜩 깨

달았으니 늙은 후에 과거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일보다는 훨씬 슬픈 방식을 선택한 것

이리라. 지나간 순간의 안타까움, 결코 흘러간 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법칙속에서 예민한 소녀 리는 고민했고 필자 역시 다름없이, 사립학교 아이들을 끝까지

읽고나서 몇 시간 동안이고 이불 속에서 흐느낌과 함께 깊은 후회를, 말하자면 끝없이

아련하면서도 결코 기분좋은 아련함은 아닌, 비극과 우울이 한데 어울려 자아내는 불행

이 선사하는 끝없는 슬픔과 주위에 아름다움이 잔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몰골로

남은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깊은 죄책감을 경험했다는 점을 이 리뷰에서 밝히고 싶다.

 치즈와 생선으로 여학생을 구분하는 미국 고등 학교의 청소년 문화의 역사는 유구하다.

개인적인 사랑, 정신적이며 감정적인 사랑, 조건과 권력 관계에서 벗아난 사랑에서 탈

피하여 비인간적이며 육체 관계며 활동에 기본적으로 강한 집착을 둔 사랑은 작품에서

고발되고 있는 가장 큰 미국 문화의 왜곡성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자국의 문화에 대

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소리겠지만, 현재 미국 자본주

의는 섹스어필로 굉장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브스에서 선정

하는 억만장자 순위의 상위권에 불법포르노 사업의 창업주가 머무르는 경우를 보듯이

현재 미국의 추세는 재론의 여지도 없이 가히 [섹스 어필]이라고 할 만하다.

  크로스와 데빌의 난봉짓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본능에 대한 집착을 우연적인 사건 형

식으로써 고발하고 있고 수행평가로 인해, 다든과 그의 친구들이 경합하는 연극, 다든이

포주로서 많은 여자 애들을 소유하고 있는 뒷편에서는 그녀들에게 "오빠"라는 소리를 듣

는 그 낮부끄러운 연극의 내용도 이와 같은 경우의 선상에 위치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작

품으로 하여금 미국의 질퍽한 문화만 욕할 게 아니라 세계 전체가, 인류 전체가 반성해야

할 문제일 지도 모른다. 아시아만 돌아봐도, 그 중에서도 일본은 현재 비도덕적이며 비인

간적인 성인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가 수출 시장과 함께 전체 경제 시장의 대부분을 주름

잡는다. 로마의 쇠조에 대해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성의 문란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입

을 모으 듯 우리도 이미 망쳐진 조상의 쇠퇴의 본보기에 교훈적인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초 선진국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본을 두고 있고, 그들이 무너지면 그들이

추구하는 학설과 사상도 끝이며 또한 아직 인간이 민주주의의 껍질을 벗을 시기에는 너무

이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멀고, 걸어온 길도 얼마 채 되지 않는다.

[사립학교 아이들]은 이런 점에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찰성에 많은 기여를 하고있다.

  그리고 얼트의 학생들과 선생님들 간의 아슬아슬하게 밀고 땡기는 학칙과 규율의 게임

에서 작가는 진보와 보수의 공존에 대한 불가피성을 얘기하고자 한다. 법이나 기술, 학술,

예술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이나 인간의 자아 그리고 서로의 관계, 그러므로 세상 거의 모든

것에는 슬프도록 부득이할 정도로 진보와 보수가 살아 숨쉬고 있다. 이 두 파벌은 서로에

게 조금의 관용과 용서도 허용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을 차마 내입으로 현재 도시인의 실

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주위의 시선이 너무 무섭게 느껴진다. 얼트 학교에서의 학칙은 이른

바 세상에서의 법이라고 불리는 정치 도구와도 같은 것인데, 작가는 얼트 학교 당국을 날

카롭게 설명하면서 그들의 전통과 역사의 굴레에 리를 곧추세운다. 독자들도 자기 나름의

학교 생활을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대체로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권력체계며 정치체계의 비

인간성과 비 개인성의 쓴맛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이 더 예민한 사람이라면.

진보나 보수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어린 나이였겠지만 느낌으로나마 여러분은

그들의 공존관계와 그럼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모욕과 억압을 거리의 네온사인처럼

즉흥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로써 가슴속에 와닿았을 것이다. 그것이 심해지면 이유는 다

르지만 리처럼 학교에 들어 온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장인 [학칙은 살아있다]

에서는 전통적인 정치체계에 관한 작가의 예민한 지적이 다분히 절정에 이른다. 과연 시튼

펠트가 얘기하고자 하는 점이 단순히 소박한 청춘 얘기는 아니었을 게다. 
   
  특히나 눈에 띄는 인물은, 얼트 사립학교에서 거의 그 숫자가 미미한 아시아계의

학생인 신준이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아시아계임에도, 작품에서의 출현에 꽤 상당

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일본인도, 아메리카 대

륙에서는 이미 수많은 동포를 두고 있는 중국인도 아닌 소수의 한국인이, 우리의

한국인이 이렇게도 작품속에서 스포라이트를 받다니! 바로 지금 우리가 누워있고

앉아있고 서있는 South Korea에서, 유일하게 아시아인의 대표로서 물 건너 등장하

는 외로운 황인 소녀 신준. 21세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세계의 대학이 국가의 경제

체제와 긴밀이 연계되었고 현재 미국대학의 기부시장은 3000억달러에 달한다. 대학

은 이미 교육의 성지를 넘어서 국가경쟁력의 수단이며 세계화의 촉진제 노릇을 톡

톡히 함과 동시에 IT시장 못지않게 거대한 제계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작품에서의

신준의 등장은 아마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작품에 자연스러움과 현실감을 배가

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한다. 예컨데 신준이라는 캐릭터를 아시아의 상징적

인물 혹은 얼트 사립 고등학교의 다민족에 대한 포용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허나

포용이라는 말보다는 편견없는 탁월한 잇속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 하다.

  그녀는 초반부터 기분나쁜 혐의에 몰린다. 그것은 다름 아닌 며칠 전부터 진동하는

오징어 냄새의 주범이 그녀라고 디드가 그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가며 지적하는 점인

데, 디드의 주장이 전혀 실증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아시아계

에 대한 서양인의 편협한 오만과 방종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결코 원하지는 않았지만 필자의 편집증적 예상에 입각하여, 사실은 필자에

게는 신준의 존재감이 너무 거대했던지라 그녀가 범인임이 확정된 것은 필자에게는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 기분은, 마치 나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

게 긁어주는 데에 따른 모종의 상쾌함이었다. 하지만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불쌍한 이 황인 소녀를 작가는 후반부, 아니 거의 작품 전체를 통틀

어 한시라도 가만히 냅두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자살 미수 사건이 정

말로 급작스럽게 발생하여 그로인해 리 피오라는 그녀의 병원에 가게 되는데, 우연

적으로[작가의 의도에는 필연성만이 만장일치를 이루었겠지만] 예의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그녀와 그녀의 동성친구 클라라와의 끈적끈적한 관계를, 대부분의 다른 동성

애 작품이 다루고 있는 은밀한 형태의 노출 방식과 꼭마찬가지로 리 역시 진부한

형식으로 그 둘의 성관계를 포착하게된다[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좀 더 색다른 방식으

로 이런 금기의 노출 장면을 제시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덩달아 리는 결코 받지

않아야 할 신선한 충격(?)까지 받게됨에 따라 신준은 작품의 결말까지, 리 뿐만 아니

라 다른 이들에게조차 별로 좋지 못한 이미지, 이를테면 정상에서 벗어난 끔찍한 괴짜,

나약하고 병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소녀, 그들의 사회에서 떨어져 탈락해버린 학생으로

써 남게 된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참으로 씁쓸함을 감추기 힘들다. 물론 <뉴욕 타임

스>에서 전격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인 커티스 시튼펠트가, 자기 작품의 냉철한 검토와

엄격성도 없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대로, 자기만의 편견에 대한 무지성을 자신의 소중

한 <사립학교 아이들>에 갈켜 써 넣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단순히 이 작품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독자 자신부터 냉정을 찾는다면, 스스로의 비평에 대하여 그 시

작점이 작가부터가 아닌 중립적 관찰자인 자기 안에서부터 호기심 많은 독자의 보편적

인 지평[地平]으로까지의 출발을 시도한다면, 어떤 외국 작품을 읽어나갈 때 인종적인

주체의식을,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한도내에서 최대한의 인위성을 발휘하여 그것을 억

제한다면, 분명히 새롭게 문학적 중립성을 찾는 길의 끝자락에서 험악한 도정을 멈추고

한 권의 소설을 펼쳐든다면,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문학의 본질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

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직은 미숙한 이 작가를 "인종주의적 위선자"라고 혹평만 할게 아니라 이 신인에 가

까운 여류 작가 커티스 시튼펠트가 표현하고자 하는 블랙유머를, 그녀가 우리에게 전가

하고자 하는 현실론과 왁자지껄하면서 명랑한, 그럼에도 항상 슬픔과 우수를 담고있는 한

소녀의 학창시절에 대한 속깊은 파노라마를 짠히 느껴보자.

  그리고 어차피 나와 동류일 따름에 다름없는 독자들이여, 누구보다 어린 시절 순수

함과 아련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고, 누고보다 숭고함과 고귀한 인격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그대 독자들이여. 나와 마찬가지로 그대들 역시 [사립학교 아이들]을 읽어 내

려감으로써 <자기만의 학창시절>을 재발견 할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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