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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 아이들
커티스 시튼펠드 지음, 이진 옮김 / 김영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재생, 단순히 과거로만 남아있는 학창시절의 재생은 아무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실용적인 21세기의 산문 형식이 머리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켜 버린 그날의 호기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재생'까지는 아닐지언정 그 후로 내가 불러 일으켜낸 모종의
상념, 아직도 필자가 이 글을 쓰기까지 잊혀지지 않는 수많은 정신적 경험들은 대
부분이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으리라.
약간의 현기증을 동반한 어지러움과 위의 울렁거림을 뒤로 한 채 배란다를 통해
거침없이 들어오는 햇살을 아침의 배경으로 삼아 그날도 다름없이 신문을 펼치고
있었다. 거무튀튀하건만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는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역시
나 오늘도 흉흉한 소식뿐이군' 하는 생각과 함께 그냥 신문을 접어 책상에 내려놓
으려는 찰나 사뿐한 그림이, 한 교복을 입은 소녀가 학교를 풍경으로 서 있는 한
폭의 낯선 수채화가 머리속을 스치고 갔다. 그랬다. 의식적으로 신문을 빨리 넘겨
그와 함께 넘어간 내용, 어쩔 수 없는 나의 외곬적인 경향들, 합리적인 강박관념이
며 뜨겁게 부푼 허영심에 희생물이 되버린 한 소설의 광고를 나는 무의식적으로나
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대개 진부하고 통속적인 명랑소설이겠거니 하
고 넘어가지 않았던 내 태도가, 낯선 것에 대한 동경이라든지 일종의 불완전한 허
용이리든지 아무려면 좋다. 어쨋거나 나는, 필연적인 느낌으로 인해 무언가 산뜻
하고 유익한 서정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광고와의 대면을, 지금까지 내가
금기시해왔던 통속적인 미와의 교차를 스스럼없이 인정한 것이니까. 그리하여 내가
다시금 탐욕스럽게 신문을 펼친 이후로써,곧바로 그 책은 내 따스한 손안에 들어왔
다. 그렇게 [사립학교 아이들]과 나의 실제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눈 깜짝할 사
이에 지나가 버린 6개월 간의 무익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
지도 내가 결코 그날 6월 17일을 잊을 수 없는 건 무엇보다도, 특별하지만서도 일
상적인 소시민의 날들이 그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리 피오라, 그다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외모며 소박한 집안 환경, 볼품없는
사교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사립학교 생활은 마치 필자의 과거를 보는 듯했다.
가진것이라곤 예민한 성격과 함께 줄줄이 딸려나오는 공황장애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목들은 리 피오라의 학교생활이 결코 무난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자기
외에 다른 아이들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을 위선자라고 점철하면서도 그들의 시류
에 편승하고자 하는 리 피오라의 노력을 보면서 나는 대세에 합류하고자 하는 수많
은 아웃사이더 나름대로의 동경, 그렇지만 그것들을 혐오하며 그러한 이중적인 모순
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는 본인[여기에는 그들 뿐 아니라 필자 자신도 포함되
어 있다. 한 마디로 모든 그룹적 의미에서의 본인이다]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리
고 한편으로는 위선이며 거짓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가 단지 아무 권위도 가지지 못
한 자들, 이를테면 소수의 약자들로 생각되기도 했다. 작품 후반부에서 크로스 슈가맨
은 대표적인 남성 권력의 표본으로 제시되는데, 그의 친구 데빌의 말마따나 그는 학생
으로서는 공식적으로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학생 회장의 자리를 차지했고 그를
동경하는 대부분의 여성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으며 아니나다를까 좋은 성적까지
차지하여 후에 하버드에 가는 계기가 된다(물론 성적보다는 학생 회장의 위치가 그를
더욱 하버드로 이끌었음에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네 사회에 뿌리박힌 남성 위주의
권력이 나타내는 기호와 성향이 데빌의 폭로 아닌 폭로로 인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는
시점에서, 리 피오라 역시 그녀의 내면에선 어쩔 수 없이 약자로서의 단념이 사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패배적인 감정과 함께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녀의 슈가맨에 대한
감정이 실로 진심인지 럭셔리한 주류 사회에 동참하기 위한 욕구, 일종의 허영이자 자신
조차 그 실제를 파악할 수 없는 위선인지 필자가 감히 작가의 동의도 얻지 않은 채 확실
히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냉소적인 관점을 가미했을 때, 리 피오라가
슈가맨과의 육체관계를 통해 주류 사회와의 합일[合一]을 시도했다는 혐의 아닌 가능성
을 배제하지 못한다는 필자의 가설은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작품 도처에 깔린 상징성이 여러 면에서 비판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빈번하게
서술되고 있는 리 파오라의 독백에서 우리는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작품의 성향이 무
엇인지, 크게 둘로 나누자면 긍정적인 방향의 제시인지 사회 전반에 대한 망치질인지 제
대로 된 독자라면 다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콘치타와의, 마사와의 관계, 그리고 크게 보아서 리가 속한 얼트의 모든 학생들의 인간
관계에 대한 시각은 상당히 정통적인 서구 방식에 맞물려 있다. 감정의 이입이 최소화 된
인간 관계, 합리성과 권위주의가 계산적인 인간 환대 방식의 최첨단에 위치한 그런 인간
관계 말이다. 필자는 리를 혹평하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누구든지 권력에 대해서
자신의 역겨운 위선을 소진하려고 하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사립학교 아이들]의 냉철한
방식을 필자는 인정해주고 싶다. 모든 인간관계를 통틀어 전인교육이 표출하는 몇 가지
입장들, 오서독스함과 불변성으로 대변되는 현실적인 것들 그리고 현재의 것들이 한 소
녀의 이기[利己]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한치의 비유와 은유도 사용하지않
고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것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사심이 섞인 논외성 글로 내 중심
생각을 풀어 쓰자면, 19세기 후반에 빛을 발했던 대표적인 문학양식인 리얼리즘을 자연
스럽게 추구한 커티든 시트펠트가, 자신의 서재에서 광기어린 속도로 글을 쓰고 있는
그녀가 필자의 눈엔 한없이 섹시하게 그려진다.
위의 단락에서 내가 리의 현실적인 인격을 조금 혹평한 감이 있는데 깊이있게 여러분
이 본 소설을 깊이있게 읽어 보았다면, 필자처럼 부정적인 방향으로 혹시라도 이끌 필요
는 없다고 생각될 것이다. 아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작품 초반부에 단연 돋보이는
오프닝적 특성인 게이츠와의 만남에서 단촐한 일상성과 소박한 긍정적 특성을 찾아보자.
리 피오라의 선배격인 그녀와의 만남으로 미묘한 동성애의 흐름이 의도적인 느낌이 아
니라 비교적 자연스러운 시각으로 피력된다. 한마디로 게이츠에 대한 리의 감정은 세상이
마치 이방인에게 부과하는 정신적인 족쇄와 꼭마찬가지로 연거푸 병적인 감정질환자라고
화자되는 동성애자의 [동성애]가 아니라 인간 사랑에 대한 초기 과정이다. 게이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식어감에따라 대상이 크로스로 전환되는 과정은 한 인간이 처음으로 동성을
좋아하게 되고 그것을 발판삼아 이성을 향한다는 평범한 사람의 사랑 공식을 말하고 있다.
필자의 주관[主管]아닌 주관[主觀]으로 다른 작품과 비견해 보자면 일본작가 나쓰메소세
키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 [마음]이 아포리즘적인 방식으로, 독백과 예민한 기교
를 섞어서 직접적으로 이것에 대해 언급했다면 [사립학교 아이들]에서는 보다 간접적으로
이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설명하고 있다. 반면 게이츠와의 산뜻한 조우는 진실성을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후에 콘치타와의 이별과 함께 극중의 아름다운 서사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
이 아닌가 한다. 역시나 명랑소설의 모태를 둔 작품인 만큼, 이 작가가 섬세하면서 여린
감정과 훌룡한 감각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콘치타와의
이별이 가져다 주는 상큼함과 깊이있는 아련함, 약간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데서 학창시
절의 순진성에 비중을 찾을 수 있는 그 아득함, 미약하나마 인간 관계에 대한 비의와 역
설성을 나타내는 콘치타에 대한 피오라의 독백, 예컨대 이 모두가 작가의 깊은 서정심에
대한 증거이며 반어적인 변증법을 여기에 대입해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작가 특유의 진실
성에의 의지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립학교 아이들]의 광고를 봄으로써 기대했던 것만큼 부[富]의 기분좋은 탁월함이나
우월성, 그리고 내심 기대하고 동경했던 특권적인 성향을 찾아볼 순 없었다. 이미 이 책
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부호의 자제라는 걸 대중매체
가 미리 전제조건으로 깔아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독특하게도 이 작품에서 리 피오
라는, 부라는 것이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삶을 풍족하게 해주며 아름답게 해준다고 말
하고 있다. 그 부분에서 나는, '야, 이거 정말 세련된 작품인데!'하고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작품상의 리 피오라, 그녀는 삐까번쩍한 검은색의 리무진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좋아
하고, 특히나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의 가난[사실 그녀의 집안이 가난한 건아니고 아마도
얼트의 아이들이 지나치게 부자이기 때문에]과 촌스러움, 세련되지 못한 데서 오는 천박
함을 극도로 부끄럽게 여기는 걸로 비춰진다. 그러나 그러한 증오는 모두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리가 자신의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건 그녀의 변덕스럽고 모순적
인 감정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알 수 있다.
[사립학교 아이들]은 기존의 숭고하고 탐미적인, 그러면서도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고전 문학들과는 달리 [사립학교 아이들]은 확실한 시대의 풍조에 거슬러 올
라가고 있는 동시에, 역사깊은 문학사조[文學思潮]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 혁신적인
지(知)의 도전 혹은 새로운 형태의 진보라고 불릴법한 이 용감한 작품에서 우리는 실로
꾀까다로운 도시적 아방가르드의 전범[典範]을 맛 볼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영미 문학사에서 꾸준히 스포라이트를 받아왔던 냉소성 문학의 대
표격인 [호밀밭의 파수꾼]이 관통해왔던 기득권과 기성 세대의 위선을 시튼펠트 나름대
로의 경험에서 휙득한 자격지심을 바탕으로 그녀만의 독특하고 세련된 방식으로써 [또다
른 관통]을 시도하고 있다.
얼트에서의 생활에 대한 그녀의 최종평가에서 그녀는 자신의 예민함과 좋지 못한 집안
사정, 슈가맨과의 원하지 않는 이별들을 통해 자신의 수년간의 학교생활이 불행하며, 그
불행 속에는 늘 긴장과 기대감이 서려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숨막히는
청춘의 순정과 우정, 냉소와 사랑이 공존하는 인식 체계를 돌이켜 보며 자신은 결국 행
복한 과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시간을 보내든 저런 시간을 보내든, 화려한 삶
을 살든 부족한 삶을 살든, 행복한 삶을 살든 불행한 삶을 살든 결국에는 모든게 아름답
고 소중하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고대 동양사상과도 일치하는 이 인간적이며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아포리즘적 관념을 그녀가 통찰 했다는 것은, 그렇다. 그녀는 성숙한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숙을 지켜보는 필자의 마음에 잔잔한 슬픔의 바다가 가득 흘
러넘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이에 대해서는 책의 후반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리가 얼
트에서의 생활이 영원할 것 같이 느끼곤 했던 것이 어느새 자신이 고대해 왔던 졸업의
순간이 임박해 오는 걸 알아채고는 흠칫 시간에 대해 숙고하는 장면에 필자의 모든 슬픔
이 의거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유년 시절, 청소
년기 그 외에 많은 소중한 시간들이 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학창시절을 논외로 하고는 소
중함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꺼낼 수 없을 겁니다"라고. 그런데 리는 영민하게도 자신이
지금껏 얼트에서 겪었던 순간들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란 것을 졸업하기 직전에 퍼뜩 깨
달았으니 늙은 후에 과거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일보다는 훨씬 슬픈 방식을 선택한 것
이리라. 지나간 순간의 안타까움, 결코 흘러간 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법칙속에서 예민한 소녀 리는 고민했고 필자 역시 다름없이, 사립학교 아이들을 끝까지
읽고나서 몇 시간 동안이고 이불 속에서 흐느낌과 함께 깊은 후회를, 말하자면 끝없이
아련하면서도 결코 기분좋은 아련함은 아닌, 비극과 우울이 한데 어울려 자아내는 불행
이 선사하는 끝없는 슬픔과 주위에 아름다움이 잔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몰골로
남은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깊은 죄책감을 경험했다는 점을 이 리뷰에서 밝히고 싶다.
치즈와 생선으로 여학생을 구분하는 미국 고등 학교의 청소년 문화의 역사는 유구하다.
개인적인 사랑, 정신적이며 감정적인 사랑, 조건과 권력 관계에서 벗아난 사랑에서 탈
피하여 비인간적이며 육체 관계며 활동에 기본적으로 강한 집착을 둔 사랑은 작품에서
고발되고 있는 가장 큰 미국 문화의 왜곡성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자국의 문화에 대
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소리겠지만, 현재 미국 자본주
의는 섹스어필로 굉장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브스에서 선정
하는 억만장자 순위의 상위권에 불법포르노 사업의 창업주가 머무르는 경우를 보듯이
현재 미국의 추세는 재론의 여지도 없이 가히 [섹스 어필]이라고 할 만하다.
크로스와 데빌의 난봉짓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본능에 대한 집착을 우연적인 사건 형
식으로써 고발하고 있고 수행평가로 인해, 다든과 그의 친구들이 경합하는 연극, 다든이
포주로서 많은 여자 애들을 소유하고 있는 뒷편에서는 그녀들에게 "오빠"라는 소리를 듣
는 그 낮부끄러운 연극의 내용도 이와 같은 경우의 선상에 위치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작
품으로 하여금 미국의 질퍽한 문화만 욕할 게 아니라 세계 전체가, 인류 전체가 반성해야
할 문제일 지도 모른다. 아시아만 돌아봐도, 그 중에서도 일본은 현재 비도덕적이며 비인
간적인 성인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가 수출 시장과 함께 전체 경제 시장의 대부분을 주름
잡는다. 로마의 쇠조에 대해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성의 문란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입
을 모으 듯 우리도 이미 망쳐진 조상의 쇠퇴의 본보기에 교훈적인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초 선진국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본을 두고 있고, 그들이 무너지면 그들이
추구하는 학설과 사상도 끝이며 또한 아직 인간이 민주주의의 껍질을 벗을 시기에는 너무
이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멀고, 걸어온 길도 얼마 채 되지 않는다.
[사립학교 아이들]은 이런 점에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찰성에 많은 기여를 하고있다.
그리고 얼트의 학생들과 선생님들 간의 아슬아슬하게 밀고 땡기는 학칙과 규율의 게임
에서 작가는 진보와 보수의 공존에 대한 불가피성을 얘기하고자 한다. 법이나 기술, 학술,
예술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이나 인간의 자아 그리고 서로의 관계, 그러므로 세상 거의 모든
것에는 슬프도록 부득이할 정도로 진보와 보수가 살아 숨쉬고 있다. 이 두 파벌은 서로에
게 조금의 관용과 용서도 허용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을 차마 내입으로 현재 도시인의 실
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주위의 시선이 너무 무섭게 느껴진다. 얼트 학교에서의 학칙은 이른
바 세상에서의 법이라고 불리는 정치 도구와도 같은 것인데, 작가는 얼트 학교 당국을 날
카롭게 설명하면서 그들의 전통과 역사의 굴레에 리를 곧추세운다. 독자들도 자기 나름의
학교 생활을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대체로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권력체계며 정치체계의 비
인간성과 비 개인성의 쓴맛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이 더 예민한 사람이라면.
진보나 보수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어린 나이였겠지만 느낌으로나마 여러분은
그들의 공존관계와 그럼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모욕과 억압을 거리의 네온사인처럼
즉흥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로써 가슴속에 와닿았을 것이다. 그것이 심해지면 이유는 다
르지만 리처럼 학교에 들어 온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장인 [학칙은 살아있다]
에서는 전통적인 정치체계에 관한 작가의 예민한 지적이 다분히 절정에 이른다. 과연 시튼
펠트가 얘기하고자 하는 점이 단순히 소박한 청춘 얘기는 아니었을 게다.
특히나 눈에 띄는 인물은, 얼트 사립학교에서 거의 그 숫자가 미미한 아시아계의
학생인 신준이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아시아계임에도, 작품에서의 출현에 꽤 상당
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일본인도, 아메리카 대
륙에서는 이미 수많은 동포를 두고 있는 중국인도 아닌 소수의 한국인이, 우리의
한국인이 이렇게도 작품속에서 스포라이트를 받다니! 바로 지금 우리가 누워있고
앉아있고 서있는 South Korea에서, 유일하게 아시아인의 대표로서 물 건너 등장하
는 외로운 황인 소녀 신준. 21세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세계의 대학이 국가의 경제
체제와 긴밀이 연계되었고 현재 미국대학의 기부시장은 3000억달러에 달한다. 대학
은 이미 교육의 성지를 넘어서 국가경쟁력의 수단이며 세계화의 촉진제 노릇을 톡
톡히 함과 동시에 IT시장 못지않게 거대한 제계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작품에서의
신준의 등장은 아마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작품에 자연스러움과 현실감을 배가
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한다. 예컨데 신준이라는 캐릭터를 아시아의 상징적
인물 혹은 얼트 사립 고등학교의 다민족에 대한 포용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허나
포용이라는 말보다는 편견없는 탁월한 잇속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 하다.
그녀는 초반부터 기분나쁜 혐의에 몰린다. 그것은 다름 아닌 며칠 전부터 진동하는
오징어 냄새의 주범이 그녀라고 디드가 그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가며 지적하는 점인
데, 디드의 주장이 전혀 실증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아시아계
에 대한 서양인의 편협한 오만과 방종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결코 원하지는 않았지만 필자의 편집증적 예상에 입각하여, 사실은 필자에
게는 신준의 존재감이 너무 거대했던지라 그녀가 범인임이 확정된 것은 필자에게는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 기분은, 마치 나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
게 긁어주는 데에 따른 모종의 상쾌함이었다. 하지만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불쌍한 이 황인 소녀를 작가는 후반부, 아니 거의 작품 전체를 통틀
어 한시라도 가만히 냅두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자살 미수 사건이 정
말로 급작스럽게 발생하여 그로인해 리 피오라는 그녀의 병원에 가게 되는데, 우연
적으로[작가의 의도에는 필연성만이 만장일치를 이루었겠지만] 예의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그녀와 그녀의 동성친구 클라라와의 끈적끈적한 관계를, 대부분의 다른 동성
애 작품이 다루고 있는 은밀한 형태의 노출 방식과 꼭마찬가지로 리 역시 진부한
형식으로 그 둘의 성관계를 포착하게된다[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좀 더 색다른 방식으
로 이런 금기의 노출 장면을 제시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덩달아 리는 결코 받지
않아야 할 신선한 충격(?)까지 받게됨에 따라 신준은 작품의 결말까지, 리 뿐만 아니
라 다른 이들에게조차 별로 좋지 못한 이미지, 이를테면 정상에서 벗어난 끔찍한 괴짜,
나약하고 병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소녀, 그들의 사회에서 떨어져 탈락해버린 학생으로
써 남게 된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참으로 씁쓸함을 감추기 힘들다. 물론 <뉴욕 타임
스>에서 전격적으로 주목받는 작가인 커티스 시튼펠트가, 자기 작품의 냉철한 검토와
엄격성도 없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대로, 자기만의 편견에 대한 무지성을 자신의 소중
한 <사립학교 아이들>에 갈켜 써 넣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단순히 이 작품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독자 자신부터 냉정을 찾는다면, 스스로의 비평에 대하여 그 시
작점이 작가부터가 아닌 중립적 관찰자인 자기 안에서부터 호기심 많은 독자의 보편적
인 지평[地平]으로까지의 출발을 시도한다면, 어떤 외국 작품을 읽어나갈 때 인종적인
주체의식을,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한도내에서 최대한의 인위성을 발휘하여 그것을 억
제한다면, 분명히 새롭게 문학적 중립성을 찾는 길의 끝자락에서 험악한 도정을 멈추고
한 권의 소설을 펼쳐든다면,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문학의 본질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
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직은 미숙한 이 작가를 "인종주의적 위선자"라고 혹평만 할게 아니라 이 신인에 가
까운 여류 작가 커티스 시튼펠트가 표현하고자 하는 블랙유머를, 그녀가 우리에게 전가
하고자 하는 현실론과 왁자지껄하면서 명랑한, 그럼에도 항상 슬픔과 우수를 담고있는 한
소녀의 학창시절에 대한 속깊은 파노라마를 짠히 느껴보자.
그리고 어차피 나와 동류일 따름에 다름없는 독자들이여, 누구보다 어린 시절 순수
함과 아련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고, 누고보다 숭고함과 고귀한 인격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그대 독자들이여. 나와 마찬가지로 그대들 역시 [사립학교 아이들]을 읽어 내
려감으로써 <자기만의 학창시절>을 재발견 할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