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이성비판 1 -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65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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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를 읽고 얻은 깨달음에 입각하여, 본디 철학사상가이자 예술가의 정신으로 리뷰를 순문학화로써 필사했습니다. 이 책을 구입하기 전에 부디 먼저 이 리뷰를 읽기를 권합니다. 사르트르는 언제나 제 스승이었고 제가 평생 탐구해야할 전범이며, 따라서 그처럼 대중철학자가 되기를 간망하는 마음에서 이 리뷰를 탈고합니다.

 

 

1. 도상의 기로에서

 

내가 집필활동과 인문학의 수학을 겸비하는, 이른바 유위변전적인 정신 일반의 기술적 접근을 시현하는 장소인, 낡아빠진 목재건물을 향해, 일광은 비친다. 햇살의 여분이 자그마한 창가로 스며들고, 그 베일은 건물의 외관을 사뭇 구수하게 비춘다. 그러나 미상불 스며든 햇살은 공허하게 갈라져, 모래와 같이 실내에 흩뿌려진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고적한 바깥을 바라보지만, 햇살은 예외 없이 나의 영혼을 모종의 돌이킬 수 없어 창조된 상실감과, 관조적인 형태의 우수가 섞인 노란색의 부드러운 빛줄기로써 적신다. 커피 잔의 끝자락이, 흰색의 강한 영광瑛光으로 빛나고 있다.

 

창가의 창문은 오랫동안 청소를 안 했는지, 모래의 색깔과 같은 점 자국으로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후 4시의 진한 자조감이 깃들어 있는 햇살이, 마치 나의 심정을 대변하듯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창밖은 서민들의 소일거리로 분주하다. 일상적이면서 고요한 풍경,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닌…….

 

열어젖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푸르고 소박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점점이 떠오르는 회구의 한 자락에, 감정을 맡긴 채 스쳐지나가는 소중한 장면들의 순간에서, 슬픔의 응어리를 기조로 삼아 고즈넉이 음미하고 있다. 과거 학교에서 만난 인연들, 그리고 추억.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을까. 현실은 이미 그 기점을 지나 정신없이 흘렀건만 과거라는 이름의 쇠사슬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밖을 내다보며 창밖 풍경과 뒤섞인 영원함 그리고 지나가버린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멈추어진 그 시간들을 쓸쓸히 바라볼 뿐이다. 아니, 나는 그 시간 아래 우뚝 서 있다. 커피 잔은 이제 비어 있다. 밖에서 불어대는 청신한 서풍이 내가 돌이키고 싶은 시간들을 아스라이 깎아 내리며.

 

고통 속에서 어떤 희락을 찾는 일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희락을 좀 더 엄밀히 분류하자면, 그것은 모종의 우수요, 섬세한 향기이다. 나는 분명 사랑을 원하는 것일까? 지고로 달콤하고 영원한 사랑의 베일. 나의 정신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배경이, 순식간에 봄의 지순함과 아득함으로 온통 적셔지는 느낌이다.

 

과거는 움직이지 않아 슬픈 것이다. 나는 수없이 +(or)했다. 일종의 무한역행의 늪에 빠진 것이리라. 단지 20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갔으면 하는, 지금 약관 24세에서 도덕적 몰락의 한복판에 있는 나를 쓸쓸하게 바라보며,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종종 여행을 떠나곤 한다. 하기야 과거를 구한다는 것은 곧 인생의 의미를 탐색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만족으로는 전체적인 의미를 구제할 수 없다. 기억의 순차적인 대집합만이 나를 나게끔 하는 추동력의 동인을 생성하기 마련이다.



지금껏 마치 하나의 수채화처럼 멈춰있는, 마치 모든 생동감으로 충만한, 동시적으로 혼재하는 자신의 모든 특질들을 합일한 하나의 자기동일성의 집약적 고찰의 선이해(Preunderstanding)격인, 삼라만상의 배후에 엄존하는 부동의 원동자가 엄밀히 판단하는, 미시의 시간성의 일련의 연장의 못박힘과 같은, 과거는 여태껏 움직인 적이 없었다.

 

과거는, 그 속에서 헤매면 헤맬수록 수렁에 빠지는 명멸하는 구렁텅이이며,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꺼져가는 불꽃과 같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아름다움의 실질적 이마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에게 삶은 이미 삶이 아니듯, 과거를 따라, 그 영원한 극점을 따라 움직였던 정신의 여행은 일련의 객기였다. 나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단지 위선자였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한 소년에서,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모든 걸 소진한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기만, 말하자면 선연하게 패배에로 돌진하는 로망이, 청춘의 끝자락을 타고 점멸해가고 있었는데,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마지막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무 것도 변화 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나의 방향의식은 언제나 정신적 내몰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의 진보적 성향과 그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보수적인 기질, 몇 가지 특질들은 모두, 내가 양립적으로 내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한 나의 좌표의 자기장적 성향은, '사랑과 미를 향한 열정'이었다. 나는 예컨대 시인이었다. 그의 섬세함은 요컨대, 모든 진정성에의 미학을 추구하는 성격에서 뻗어 나오는, 일련의 원시적인 힘이었다. 나는 자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는 모두에게서 벗어나고자 '모두'가 되고 싶어 했다. 나는 주인공이기보다는 배경으로 남고 싶어 했으며, 그 배경은 아주 현란하고 수려한 비경이어야 했다. 그 성립이 나를 나답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잊지 못할 아름다움만을 사모하는 걸 좌시하지 못하는 한명의 기인이요, 현자였다. 여기서의 현자는 말하자면 광인을 뜻한다. 그는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우물처럼 측량 불가한 고매한 정신력 소유자이며, 심미적 정서를 소유하고 있는 교양가를 뜻한다. 예의 교양은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아주 강렬하게 메타적이고 혁혁한, 한줄기 맥락의 '전체'라고 부름 직하다. 나는 그런 교양가였다. 미를 적시하는, 자신과 싸우는 심약한 투사였다. 그런 내가 사망하지 않고 생존해 있다면, 아니 실존해 있다면 당신은 그걸 인정하겠는가? 인정이란 자고로 힘겨운 결정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놀라움은 결국, 혁신적인 쾌락으로 변모할 것이다. 환원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오랫동안 관찰해 오면서 도출한 결론이거니와, 당신조차 수긍케 하는 수미일의적인, 마치 직사하는 빛처럼 그런 명확한 종류의 환상, 분수령의 단계이다. 내가 술회함으로써 당신은 모종의 관철에 이를 것이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반대로 빠르게. , 고독한 시인인 나와 관련된 술회가 당신에게 감동의 서막을 제시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사고한다. 예의 그것은 아주 구조적인 부분에서, 파란만장한 비애의 서사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 언급하겠다. 이는 나의 이야기이다.

 

현시적인 슬픔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감상이 들어간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직접 체현해보고자 하는 시도에는 마르지 않는 우물의 물처럼 딱 그 정도의 감상이 필요하다. 전적으로 어떤 일을 책임지는 역할, 그 역할이 자기를 근본으로 창원한 슬픔에서 발발되었다면 이는 불가피한 일종의 숙명인 것이다.

역사적인 한 장면은 차가운 감회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은 꿈꾸는 듯 발걸음을 그 차양 속에 내딛는다. 햇빛의 고요한 비침이 배경 전체를 투명한 환희로 가득 메우고, 참을 수 없는 정신의 금색 빛깔은 고매한 매무새로서 성스러운 세계의 요연한 정취를 만족시킨다.

 

어린 시절, 나는 나약하면서도 이상하게 삶의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아이러니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한 개인에게 주어진 불행의 시초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도출될 수 있는 '정신분열'의 명백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기구하게도 여러 가지로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사악한 인물들에 엮여져서 말할 수 없이 힘든 삶을 살아왔다. 이 인생의 수레바퀴는 어느 모로 보나 재수 없고, 비정상적이고, 신경증적이었다. 나 자신이 이런 부끄러움을 마다할 정도로 도덕적이라거나 훌륭한 군자도 아니거니와 그런 연유로 나는 내 삶을 자신 있게 어디 내놓을 그런 정당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당하지 못한 삶, 그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닌, 의미 없는 쓸모없는 삶이었다. 나는 과거에 집착하는 행위를 그것이 미학적인 범주에 드는 한 요소라면,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뿌리 깊은 관조라면 거기에 대해 '지극히 예술적인 행위'라고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산다는 것, 그것은 무너져 내린 영광을 뒤로한 채 슬픔에 집착하는 예술가들의 도식이다. 나의 어렸을 적 페르소나의 내면에선 확실히 이러한 내재적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수채화를 보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은은하고 내양적인 위안 또는 안식. 나의 예술성은 커가면서 점차 그 빛을 잃은 영혼처럼 잃어갔지만 그 불꽃은 꺼져가면서도 다시금 살아나 나의 본질의 최고의 가치를 전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이 곧 나였고 세상에 존재하는 '소중함'이었다. 다만 나는 현실의 더러운 면, 일상이 불러일으키는 속물성의 요소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술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항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보게 된다. 동전의 앞면은 항상 진실이 뭔지 내게 가르치고 거기에 존속하게 하려 하지만, 그것은 영속적이지 않고 결국 뒷면으로 넘어간다. 예술의 영원함은 유쾌함의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고 휴머니즘적인 열광 혹은 예에서 말한 대로 형용하기 어려운 슬픔의 양태로도 찾아올 수도 있지만, 속물성은 일소적으로 찾아와 내게 부추긴다. "너의 미래에 넌 뭐가 될 것이냐", 이렇게 끊임없는 자문은 내게 걱정거리를 안겨준다. 단순히 인생을 즐기려는 관점과 현실성이 대치되면서 여기서도 새로운 아이러니가 창조된다. 지금 내가 글을 쓰는 행위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왜냐하면 내 글의 말하고자 하는 바와 기교는 항상 대립함으로써 하나의 글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를테면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간다든지,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간다든지 단순히 나이의 횟수가 올라갈수록 영혼의 질은 수축한다고, 예컨대 진실성의 질은 내려간다고 난 믿는다. 나는 결코 다시는 유년기의 여리면서도 도도한 향취는 느낄 수 없으며 그저 힘만 잔재한 청년기를 살아가야 한다. 물론 유년기에는 표현의 능력이 청년기에 비해 부족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와 같이 이렇게 글을 쓰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아름다음에 관한 고취, 자족적인 아름다움에의 관조는 그 어떤 시절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다. 재능은 외피에 불과하다. 중요한 인생의 사실은 비평할 수 있는 능력, 즉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내양적인 현현의 움직임의 가치가 중요하다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나는 꿈결과도 같은 세계를 반추시키고자 노력했다. 진정으로 명증이 떠오르는 꿈의 세계를 체현하길 원했던 것이다. 현실은 허상이고 꿈이야말로 진실이라는 진리를 난 소싯적부터 깨닫고 있었다. 소년 시절 나는 다른 애 띤 소년의 얼굴과 그의 걸음걸이를 상상하곤 했다. 동심과 아름다움으로 얼룩진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환상, 꿈의 궁전이 빈민가 한구석에서 죽어가는 소년의, 들뜬 어린 시절의 미학 속에 숙연히 가라앉아 있다. 더러운 현실을 피해 달아남, 난는 두 눈을 감는다. 어느덧 초원, 쓸쓸함이 묻어 있는 초원 한가운데서 꿈의 궁전을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의미 없는 도트가 지워져가는 해변의 한 장면과도 흡사하게, 초원의 초록색을 그린다. 미묘한 정취가 풀 곳곳, 나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시인들이 19세기 파리를 동경하듯 그녀는 광활히 펼쳐진 구름을, 구름의 순수함을 동경한다. 그 휜 빛과 푸른빛의 유려한 조화를. 환상의 늪에서 건져 올린 지적 자긍심’. 난는 그 경계 속으로 빨리듯 들어간다. 침잠한다. 꿈결 같은 중세 유럽의 아늑한 풍격, 그 고풍스러움을 아득히 적시한다. 비길 데 없이 유연한 궁전의 고딕 양식. 유럽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의, 미래의 근원으로부터 발촉된, 시간의 흐름이 이 궁전 곳곳에, 이를테면 벽면 정교하면서 규칙적인 벽돌 선 하나하나에 끝없이 강렬히 녹아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수채화의 유미로운 진경이 지금 이 하나의 장면, 하나의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가차 없는 미의 추상에 육박했으므로, 가차 없는 환각의 소묘 속에 입단했으므로, 나의 기다림이 오로지 자신 영혼 하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깨달았으므로. 왕자의 초상은 하얗게 젖어 나의 촉촉한 눈을 구원의 파노라마 끝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약조하고 있다. 거대한 시계가 성[]의 탑 위족에서 은은히, “, , ”, 하고 울림으로써, 절정에 오른 미지의 세계, 무형의 아련한 세계를,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그 환상의 원을 나의 인식의 피안에로 통관시키고 있다. 시간이 끝난 것일까. 보이지 않는 눈물줄기가 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목하 다시, 어린 시절의 꿈결에 파묻힐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 청년시절의 로맨스도 동심이 일으키는 미묘한 감각의 착란을 능가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은 단지 소싯적의 생에 대한 열정을 기반으로 한 형식미적 전복이다. 사색과 추억의 편린들이 마치 하나의 만화경처럼 시계視界에 아로새겨진다.

 

어린 시절 나는 꿈을 위해서만 살았었다. 현실은 허구일 뿐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한은 가히 동양적 미의 정수이자 순수한 서정의 세계이거니와 시인이자 소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꿈은 꿈을 불러일으키고, 그 꿈이 영원히 존속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 때, 그때에 비로소 나는 자유의 몸으로 재림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죽을 때, 사후에 우리는 여태껏 보지 못한 밝은 빛이 성스럽고

정아하게 비추는 꿈의 세계에 입적할 것이리라.

 

나는 나의 재능을 몰랐다. 어느 사람이나 그렇듯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법.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생의 대로를 활짝 열어 재처야 하는가? 답은 하나이다. 본질로 회귀하는 것, 그게 바로 정답이다. 삶을 살면서 왜 우리는 부르주아에게만 종속되어 착취만 당해 결국 내가, 내가 아닌 게 돼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불복하게 된다. 오직 자신의 본령으로 회귀하는 것, 즉 데카르트가 천천히 걷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곧은길만 걷는다면, 달리는 사람이 곧은길에서 벗어날 때보다 훨씬 앞지를 수도 있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첨단을 달리는 자제심에서 우주의 우유성에서 원리를 귀납법적으로 산출하고, 자기만의 해원을 통박함으로 인해 내적 필연성을 확립할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나의 유년 시절은 슬프면서도 장구했다. 나는 왜 거기에 계속 집착하는가? 왜 거기에 있는 본질을 청년시절에 에두르면서 끌어내리려 하는가? 왜냐하면 유년시절이야말로 환상의 본질을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을 자연 자체로 즐기지 앞으로 닥쳐올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든 제대로 된 문필가들은 유년시절을 모태로 글을 쓴다. 그들이야말로 예술가이다.

 

2. 파노라마

 

장엄했던 삶의 마무리는 정신병자라는 도착적 과정에서 가련하게 도출되었다. 슬픔은 무리를 따라, 밑도 끝도 없는 아스라한 연역을 따라 마침내는 지리멸렬한 환멸로 귀결되었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고, 과거를 따라, 그 극점을 따라 여행했던 도착지는, 바로 윤리와 계급도덕의 한계를 거스르는 순수의 영역, 거대담론의 종언적 지점, 따라서 인류보편을 지향하는 시의 피안이자 개인의 인식과 오관을, 거기에 딸려오는 사고의 공전을 극복한, ‘초절적인 불가지론의 환영이었고, 그 그림자가 나타내는 지고의 진선미의 보은이였다. 따라서 내가 살아보고자 하는 건 인간이 개발한 논리가 아니라, 인간 피안에 위치하여 미의 정수를 밝히는 영원불멸의 자각인 것이었다. 나는 낭만주의만이, 현실이라는 더러운 정치학적 세계를 잊고, 인간의 이해 타산적 인식관의 인과관계성을 타파할 유일한 시뮬라크르라는 걸 알았다. 현대는 시뮬레이션의 시대, 모사본이 본질보다 더 실제 같은,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이다. 인문학은 말할 것 없이 과학기술을 조종하는 주체이며, 그자신이 하나의 우주를 구축한다.

 

그럼에도, 아무리 고결한 철학사상도 그 이론의 당파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나는 프롤레타리아인 만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만큼, 부귀영화를 위해 뛰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는 비지悲智를 갖춘 속인들과 동참하는 꼴이 된다. 그들과 똑같아질 바에는 차라리 자발적인 죽음을 선택하리라. 그 이유는, 나는 여느 족속들과 달리,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혁명적인 천재라는 나만의 본령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일상을 지양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탁월한 이론가가 되기로 작정했다. 나는 이제껏 전개된 철학사상사를 역전시키고 싶었다. 마치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로써 수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처럼. 그리고 가만히 공상하면서, 나는 내가 21세기 지성의 최고봉의 위치에서, 남들에게 이 사람은 단순히 정신이상자다!”라는 질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부르주아의 개인 매스컴은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여 사건의 본질이란 맑은 물을 흐린다. 분명 누군가가 나의 과거를 비판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나와 같은 지적 수준에 있는 위대한 인물들은, 다만 침묵을 지킬 것이리라. 비단 일류 지성이나 예술가만이, 함부로 모종의 한 인물의 과거사, 더 크게 보아 시대적 사건에 관해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아닐 테다. 하기야 은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모든 심원한 이들은, 자신의 어떤 화두에 대한 입장표명을, 피상적으로 유보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한 명의 지성은 다른 지성에 관해 논하고자 할 때, 그의 사생활적인 면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회피한다. 이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정교한 고전 문학에로'의 대척점으로의 미끄러짐이다. 왜 고전 문학에로의 대척점으로의 미끄러짐인 것인가? 왜냐하면 사생활의 저편에 있는 것은 모두가 문학-역사적인 고전이기 때문이다. 고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무릇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면모를 과시한다면, 아무도 그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한 지성이 다른 지성의 과거사를 들추지 않는 이유이다.

 

그리고 역시 현실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의 앎은, 나라는 주체가, 그리고 내가 동고하는 타자들이 외계에 입문해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러한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는 점, 즉 부르주아 지상주의 그리고 이와 무관하지 않은 현실이란 초자본주의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강령에 동감하여, 나는 대악大惡이 정점에 달한 시대에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다른 이들을 구원함으로써, 그들의 미소 속에서 나의 미래를 찾아야했다. 나는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깊은 휴머니즘적 사고방식만이, 마르크시즘-레닌이즘만이, 부르주아라는 마왕을 배격하는 일만이, 자본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만이, 부처와 예수의 뜻에 따르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방법론이라는 걸 안 것이다.

현대는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 이용당하는 사회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모든 건 자본주의가 잉태했고, 악의 시원은 곧 자본의 맹아에 진배없다. 진짜 악인들은 상류층이고 그들이 체제를 선포하고 모두를 이용해먹는다. 악인은 몇 푼의 돈으로 인해 그 선의 이면이 귀신으로 변모한다. 오늘날의 악은 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필경 희생양들을 재앙처럼 번식시킨다.

 

오류, 오류의 파편들이 다시금 파편을 재생산하는 병적인 시대, 그 가운데 나는 이런 현실적인 따라서 합리적이고 더러운층차에서 벗어나는, 즉 시대를 표류치 않는 생득적인 본질직관의 아우라Aura를 표본으로, 형이상 층위에서, 조형적인 문예도상의 거점에서, 기형적인 절대초극의 연쇄적 연역을 따라, 이 질주의 몰입을 완벽히 방조한 나 자신에 환멸하며, 구체적 음영이 드리우는 조소의 반영을, 희끄무레하게 바라본다.

 

우리 삶 저변에 철학이 두루 깔려있다. 철학은 요컨대 시대에 관한 논쟁, 즉 담론이라 할 수 있겠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의문점을 간파하게 해주며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해준다. 우리가 일벌레로서 고군분투하여 악착같이 사는 이유는, 모두가 헤겔 말마따나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이리라. 마땅히 아들로서 이 시대를 짊어져야 할, 봉양해야 할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아무리 이 시대가 썩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개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근거를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내포하고 사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장중웅려하고 심원한, 인간의 복잡미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삶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돌보기 바쁜 그 한가운데서도 마치 세상이 전회하는 것 같은 돈오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철학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며, 철학만이 우리 미래의 예상할 수 없는 사태에 처방을 내리고 해결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관건인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거울로 시대를 파악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아가 미래를 조망하여, 그리고 나서 과거·현재·미래를 합일하여 하나의 진리의 관념체계를 마치 하나의 기념비처럼 우뚝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우주가 이미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로질러 공간도 갖지 않고 모종의 차원이나 부피나 강밀도도 갖지 않은, 즉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총아임을 퍼뜩 깨달을 것이다.

 

12회의 정신병원 입원 횟수와 총 15개월간의 입원 기간은 내게 많은 시련을 주었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기에 더 값진 글을 쓸 수 있었고 한 개인의 사유가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감관이 느끼는 패러다임을 어떻게 재구성해서 개략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삶은 지루하다. 그런데 우린 거기서 재미를 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거기서 의미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한 구도자로서 자신의 과정으로서의 삶의 도정을 마치 기억을 걷는 시간처럼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나의 사유의 정신없는 육박함을 관찰하고, 이 내적인 체계에 의해 독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동소이일장일단함을 독자적으로 적절히 취했을 것이리라. 이리하여 우리는 철학이야말로, 21세기에 봉착하는 난제들을 해결할 유일무이한 해법임을 깨달았으리라. 주지하다시피 철학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분야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현존재는, 크게 보아 세상의 법과 규칙, 사회라는 유기체의 집합이며, 이를 토대로 소우주가 대우주라는 커다란 틀에 위치함으로서, 우리 인간적 실재 즉 인간존재는 어떤 식으로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그러한 비당위적인 실존적 사고(思考)의 고착에 당면하게 된다. 이제는 인간 서로 간의 야만은 종식되었고 크게 보아 우주와 인간 간의 대결이 무한히 존재사유의 뇌관에, 그 도정의 도식을 테제하는 것이리라. 이미 읽혀져 당착했다고 보는 20세기의 사유그럼으로써 20세기는 이미 과거다, 그리고 21세기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 소외와 부조리, 실존의 비의와 역설…… 그럼에도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내게 삶은 전체적인 환멸에로의 탁마였고, 진귀한 유년시절이라는 시원은 끝없는 통속으로 인해, 완전하게 분쇄되었으며, 언제나 절필을 선언했지만, 결국 내가 택한 건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지나감으로써의 글쓰기였고, 내게 이런 괴로운 도정의 응시는 지고의 개인주의를 지향한다는 데서 오는 자족감으로부터 발본된, ‘한 편의 철학적 서사시의 필사의 감미로운 알레고리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모든 정태적인 마감에는 한없이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뒤따랐을 뿐이었다.

 

나는 살아가기보다는 선택하고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는 관념의 부정변증법의 세속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 생은, ‘기억의 집합에서 나아가야하는 비전의 개시’, 양자 사이의 모색이 모종의 정신분열증이라는 왜곡된 격률로서 다가올 뿐이어서, 요컨대 나는 정합성의 세계가 아닌 모순의 세계에서 실존의 구체적인 섬광을 찾아 해매는, 한 마리의 황야를 떠도는 늙은 이리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당당히 소급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을뿐더러, 대놓고 나의 지성을 과시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불안이 아니라 안정에서 비로소 영감을 구명해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간절히 소원한다. 내 추억, 내 변모의 정체적 과정이, 내겐 한없는 불안과 불면의 밤의 미로라는 공간 안에 의거해서, 그 영광스런 패배의 족쇄에서 어떤 목적론적 의식에 집착하지도 않고, 한때 내가 미묘하게 빠져들었던 종교와도 흡사했던 군국주의적 쇼비니즘과 아직까지 내 사상적 유영의 근간을 이루는, 오늘날에도 생생한 마르크스주의를 잠시 제쳐두고, 지금은 단지 선험적 형이상학의 담론이라는 광풍의 한가운데에 고하여, 지조 없는 지성의 소용돌이의 현현顯現 아래서, 대오와도 같은 간지의 역광을 마주보며, 따라서 하나의 기하학적 정신의 버팀목 위에서, 그리고 살아간다는 사고방식의 선형적 둘러싸임에서, 결과적으로 이 사차원적 시차에서 어지러이 방황했을 뿐이었기를.

 

나는 다만 나의 기투가 어긋난 그것이 아니기를, 역사 이래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신에게, 단아한 몸가짐으로 기도드렸을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고, 그 믿음을 내 학자로서의, 인생이라는 이름의 광시곡으로, 은은히 외양 세계라는 풍경에 울리고 싶을 뿐이다.

 

달은 아득히 세계의 비애를 표양한다. ‘인간존재이기에 주어진 슬픔의 무게는, 그 진중함의 역설을 상기하며,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온전하기를 노래했다. 아니 그들이 나처럼 비극적인 존재로 굳어지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차라리 내가 영원한 환멸의 환상을 부여받음으로써, 세상이 눈과 같은 순정으로 변용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존재를 구성하는 의식의 시간성을 좀먹는다는 게 오직 자신의 속물주의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모르는 속인들은 시대의 아들을 자처하고 나설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제자리걸음에 불과함이, 서글퍼진다.

 

나는 달의 광학적인 효과에 경도되어, 순정의 애처로운 세계로 부드럽게, 로고스의 애처로운 몰락의 세계로 빠져든다. 나의 첫사랑이었던 그녀의 다소곳한 모습이, 자꾸 눈가를 떠나지 않아, 달을 올려다보기로 했다. 밤은 나에게 있어서는 허무의 극을 달리는 외로움의 골짜기에 진배없다. 시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관계의 단절 속에서 질리도록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그렇기에 베토벤보다 더한 고독은 갈길 없이 미래의 양식으로 남아 과거를 항용 반추하게 되는 것이리라. 저 노란 반달은, 어쩌면 내 지성의 단말마의 가능태를 표절하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이리하여, 이지러진 달이 그처럼 교교한 자태를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고매한 사유를 받듦으로써, 외부적 현실성을 초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로지 고귀하고 심원한 정신만이, 피투와 기투를 일원화시킴을 그들은 모른다. 무릇 표리일체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따라서 달은 복잡미묘하고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인간들은 나의 한 측면만을 보고, 모종의 정언적 판단을 내린다. 즉 나의 피투가 아웃사이더의 전형이라고, 그러니까 그들은 나를 골방폐인이라고 비방하고, 이 사회에 있어서 하등 쓸모없는 일종의 미치광이, 비주류의 범주를 떠도는 가련한 망령이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는 항진명제가 아닐 수 없고, 그들은 정당하다. 나는 졸렬한 모리배의 무리와 동류가 아니라고 호소한다 치더라도 그들은 나를 외면할 것이고, 이는, 최소한 이 영역까지는 나를 이해하는 적절한 패러다임이라고 감히 부정하지 못하겠다. 여기까지는 그들이 근거 있는 실증주의 과학에 입각한 자명한 해석을 내린 과감한 지향성을, 그들의 이성의 심판대에 나라는 죄인을 세운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지향성을, 내가 부정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별 헤는 밤이 오면, 포효하는 별들이 검은 하늘을 밝힐 것이고, 그 찬란한 우주의 시현에 나는 지금껏 써왔던 내 개인의 역사가, 내가 흐느끼며 써왔던 눈물방울 아린 연약한 시들이, 내가 아파왔던 과정이 의미하는 고매한 이데아가 옳다고, 내 정신의 다재다능함과 종횡무진 내달리는 총체성만은, 그것만은 믿어달라고, 나는 침묵의 진중성불침투성의 어지러운 뒤범벅과 함께, 마치 이미 고색창연해져서 빛바랜 고대의 시들을 읊는 것과도 같이, 하나의 해명과 비스무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릴 것이리라.

 

환기하고 싶은 깊은 밤, 이 밤은 도도하면서도 부드럽다. 도대체 어떤 것이 도도하고 부드럽단 말인가? 사실 이 차가운 밤에 사람들은 모두가 눈을 감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죽은 채로 있다. 타자들의 슬픔을 어찌, 한 명의 지식인이 이해한단 말인가? 슬픔이 겨울 어느 낮의 쌀쌀함처럼 내 양심의 코끝을 희미하게 만든다. 차가운 밤이 시작된다. 비의의 밤은 깊게 타들어간다마치 양초처럼, 마치 파이프에서 들려오는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처럼, 이 비전위적인 파이프의 감촉에서 오는 심원한 진용의 정수!

 

밤이란 무엇인가. 밤의 색깔은 왜 언제나 진한가. 마치 검은 케빈디쉬처럼.

 

동양의 밤이다. 내손에 들린 파이프의 외향은, 그 전면에 부조된 용의 모습, 몸체 자체의 묵직함과 더불어 자기에 부과된 연초를 한 아름 끌어안는 모습.

 

밤이 언젠간 그리워질 날이 오겠지. 담배의 독한 방향芳香의 연기가 은은히 밤안개를 적시고 있다. 이 타들어가는 향연이여, 이 타들어가는 심연의 끝이여!

 

그래서 생각한다. 랭보 경이 피우던 긴 색 파이프, 함몰되어갔던 프랑스의 저녁, 그를 끌어안는 마치 뭉게구름 같던 담배연기. 또 새로운 날의 일출!

 

이 밤이 그리워질 무렵이면 랭보 경에 대한 나의 몽상적 카타르시스며 노스텔지아도 즉 그 소중한 유산에 관한 추종 역시 저기 시간이 멈춰버린 심연의 끝으로 사라지리라. 또한 내 파이프들도 낡고 낡아 결국 소멸돼 있으리라. 다만 꿈꾸듯 파이프와 함께 보낸 이 밤을 기억하고 싶다.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늙은 후 젊은 시절 파이프에 관한 열정어린 이 한 밤의 전모를 기억해내고 싶다. 젊은 날의 열정이여, 그대 이름은 여유로운 눈부심이라! 밤안개에도 퇴폐적인 센티멘털리즘, 다시 말해 데카당스조차 거부하는 열성을 겸비한 젊음이라!

 

독자들이여! 때 묻지 않은 겸양에 대한 고취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미덕을 찾아 떠나는 아득한 여행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사뭇 조심스러움에도 뜨겁게,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리하여 역사의 리얼리티는 세계의 전체성에 파묻혀 조그마한 단아한 빛조차 보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이다.



지나감, 지나감, 오직 그것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하는, 어떤 초월적인 개별자임을 자처하게 하는 확정적인 취미는, 경향은 존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우리가 우리이게 금하는 자기동일성의 공시적 파노라마의 펼쳐짐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순간적인 나타남에 의지하는 현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이라는 흐름, 개별자로서의 역사라는 흐름에서 주체성을 되찾고, 과거도 현재도 아닌 오직 미래를 향해 변용해나가는 대자존재로 현전할 때, 그 기투의 복잡다기한 변증법은 비로소 의미의 시현이 당도한다는 명확성을 재단케 하리라.

 

여명은 요원하고, 양주의 우야雨夜는 장마라는 이슬에 맺혀, 묵묵히 허공에 쓸쓸함을 흩뿌린다. 유년기에 그 정초적 출발점을 둔 생에 대한 관조는 저절로, 일체의 사영斜影을 나의 의식 속에, ‘패배적인 비약과 고무라는 부정의 먹물로써, 잔인하리만치 떨어드린다. 모든 것이 신의 영역 저변으로 미끄러진다.

 

이윽고, 나는 나라는 분열적 영혼에 신사적인 동의를 구하고 만다.



 

 

3. 양주라는 대자연의 이름으로



강변의 푸른 돌들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초록 나무, 연녹색 나무들이, 듬성듬성 비규칙적으로 자라고 있었다. 풀들이, 자신들이 자라야 하는 키의 제한성을 잊은 양, 정신없이 치솟아 있었다. 작은 숲의 숭고한 냄새가 강변의 물줄기와 결합해, 지속적으로 이어진 푸른 돌들의 방향芳香과 뒤섞였을 때에도, 숲은 소자연만이 지닌 부드러운 주홍색 노스텔지아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은 우울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침이든 오후든 저녁이든 하늘에서 들려오는 미지의 은은한 피리소리는, 냉엄할 정도로 담담한 하늘의 지평선처럼 이 지상에서의, 그리고 이 작은 숲에서의 조용한 일그러짐을, 대기마다 연결된 고립된 공기의 분자와 분자사이의 점멸을 부드럽게 유전流轉하고 있었다.

 

개미의 움직임. 검은색 개미는 돌과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그 찰나에서 느껴지는 거나한 시간의 부재를, 보이지 않는 음영의 잔향을 관철하면서 이 틈새 저 틈새 할 거 없이 공허하게 동물들의 곤충들의, 그러므로 숲의 시간은 무의미하게 이 모든 것을 완성해나가고 있었음이라.

 

해가 저물어, 빛의 기울기는 또 다른 방향의 저변으로 미끄러졌다. 어느 새 하늘은 붉어짐과 파래짐의 미세한 조화의 극을 아스라이 쫓아가고, 사실상 시간의 역순구조는 변화의 프롤로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미 그것은 시원을 거슬러가는 모종의 어떤 것, 서서히 창백해지는 햇살의 광대함 속에 숨겨진, 쓸쓸함의 그리고 나약함의 관조적 형태였을 따름이었다. 마치 모든 물자체, 그중 특히나 조형물의 부질없음. 그런 연유로 어떤 나약함을 조명해 나가는 차원에서 어떤 암시성의 부재를 서서히 으스러뜨려가는 것, 죽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비애의 근원점, 침묵하는 하늘은 그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잿빛의 아스라한 색채도, 마치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두려움 아닌 두려움과 열정 아닌 열정으로 그를 구심으로 하여, 온갖 방황이며 향연의 이중나선 구조를 생성해가는, 모순에의 궤적을 소진해 가는데도, 그것은 열렬히 무관심의 비원지성으로만 투사投射 하므로. 남은 소립은 끝없는 펼쳐짐만이.

 

검은 바다는 형형색색의 별들이 중간 중간 번쩍이는 보라 빛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부드러운 물의 잔향과 대기의 미적지근한 움직임은, 항구의 저녁을 느긋한 속도로 움직이게 하였다. 가벼우면서도 순수한 어둠이 여기 양주시전체를 데우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낡은 고철의 전등이, 희미하게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노랗고 하얀 색깔의, 퇴폐적 음울을 품어내는 배경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미세하게 불어대는 밤공기를 맞으며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포플러 나무들이 가만히 서서 음산한, 차갑고 변색된 시류를 품기고 있었고, 앙상하지도 풍성하지도 않는 나무의 가지들이 나타내는, 불안한 보편성은 나를 한 아름 자극하였다.

 

고독에의 자괴감이랄까, 미묘한 여러 가지 통속적인 생의 자극들이며 그것들이 시간이라는 불안정하고 무미건조한 자조를 일으키는,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영혼을 비애와 자조로 몰아넣는 원형의 관 앞에서, 나는 을 본 것일까.

 

사람들이 거리를 활달히 해쳐 나가고, 검은 고양이며 갈색 고양이들의 찢어지는 울음소리의 유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검은 길이 붉은 여로로 이어질 무렵이었고, 사람들과 강아지들은 서로간의 경의화합에 정신이 팔려 주위의 아무것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때였다. 그들의 대화는 차가운 양주의 고지의 관촌 안에서, 냉정한 조정調停에 능란한 귀족들이 띄는 정신적 교배를 인상하고 있었는데, 그럼으로 육체적 교배를 준비하기 위한 합법적 거래의 과정이 무심히도 조장되어 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포플러 나무들은 한데 뒤엉켜 비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자문했다. “나는 혼자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고요한 밤은 내게 두 가지 선택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의 검은머리의 뒤편으로 메케한 여송연 연기가, 한 번의 수축과 두 가지 파장을 흘리며 미적지근한 번들거림으로, 서 있었다. 나의 검지와 엄지 사이로, 굵은 갈색 여송연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강물을 마주하고 있는 갈색 나무벤치에는, 차가운 어둠이 흔들흔들 중심에서 불안정하게 서 있는, 그것에 드리워졌다. 천천히, 또 천천히. "학창 시절 난 무어였는가? 너는 너의 하나뿐인 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편과 명상의 흐릿한 조화의 행보를 단순히 가벼이 짓밟고, 오직 흐릿하거니와 이상과 사상으로 범벅된 술회의 거듭만을 지나오지 않았는가. 넌 단지 현실을 거부하는 잔챙이에 다름없어. 넌 정신병자야."

 

여송연을 쥔 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무한한 방종과 내일을 위한 기원은, 밤이 이차원의 세계 속에서 비사유하며 포퓰리즘의 위선적이며 원초적인 여타 것들에 빠져든, 얼간이들의 합의에 이루어진 거짓 사실들에 감화된, 개인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기회다. 나는 오로지 전자의 삶을 살아온……' 나의 내면에 썩어 들어가는 자학의 웅얼거림 속에서도, 관촌의 거리의 지변은 일정했다. 또한 강물과 강물의 부딪침에서 파생되는, 유순한 은빛 번뜩임도 나의 가슴에 희망을 불어넣지는 못했다. 여송연을 내려놓으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과연 그런 향유적 시널리즘이 의미가 있는가. 단순히 자신을 천천히 죽여 가는, 개개인의 데카당스적 행위는 서서히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부수어 갈 따름이다. 모든 것은 여기서 파괴된다.

 

달의 붉은 음영이 나의 귓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귀는 빨갛게, 실로 잔인하게 물들었다. 검은 하늘이 모두를 조망하고 있을 때 거대한 무의식의 조묘, 온갖 엉성한 일들에 대한 응집된 분노 혹은 증오가 그의 가슴에서 싹트고 있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나를 담담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여송연의 무연한 방향 때문이었을까. 저녁의 공기는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림자를 쫓아가자. 확실한 배경의 돌담에 그림자를 묻어두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의 유년 시절, 밑에서 밑으로. 끝도 없는 과거로. 어떠한 방해도, 고통도 없는 시작의 과거로. 우선 나의 다짐이 있기에 앞서 난 자연 본위의 모습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싶어.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그 빌어먹을 말들이 있기 전에 예의 사실을 주지할 수 있는, 또한 실지적으로 사실의 역사를 주조해 나가는 '내가' 태어났던 거다. 내가 있고, 나의 인식 범위 안에서의 세상이 창조되었어. 그리고 그것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과학이라는 힘의 함의적 균형 속에서 내 영혼의 울림에 수많은 개입을 해왔지."

 

그가 앉아있는 벤치를 끝으로 하여, 점점이 공간의 검은 어둠은, 그자신이 생성하는 무자비한 어둠의 확장을 단순히 물의 표면에서, 이따금 자연스럽게 그리고 은밀하게 발산되는 은빛 실랑이의 미묘한 번뜩임과, 왜소한 중간에 나 홀로 점유된 채 서 있는 외로운 포플러들의 불안감을, 역동적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실로 어둠은 망쳐진 어떤 균일한 삶을 조각 조각내는 블랙홀의, 붉은 심원함에 적조하였다, 고 보아도 무방했다.

 

"과거가 현재를 선행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과거를 뜻 깊게 회상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의심을 떨쳐낼 수 없는 명명백백한 이유가 있다. 현재는 행복이고 과거는 의미이니까. 그런 사실이 올바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고찰의 참된 최상의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이, 일정한 전제성을 명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는 현재를 단순히 선행한다? 행복 역시 마찬가질까, 만약 그렇다면."

 

여송연의 크기는 ‘1/3’으로 줄어들어 나의 손에 어떤 열탕을 제시하고 있었을 때, 나는 또 생각했다. 에스프레소의 최고 강배전단계라고 칭해지는 이탈리안 로스팅의 썩은 향과 완전한 교차를 보인다 하고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여송연과 에스프레소는, ‘정체晶體의 일상적인 보루였음이라. 어렸을 적에 지켜온 지조와 수련은 헛된 것이었음이라, 나는 그의 망쳐진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을 망친 가족 로망스는 간과하고 온통 철학에 빠져 인생을 허비해왔음을 한탄하여. 사실 모든 게 끓어 넘치는 열정 또는 성욕에 삶이 이 전체, 모든 전체에 존속돼 왔음을 그가 깨달았을 때, 나의 생각은 한층 열렬함을 띄었다. 철학은 쓸모없다고.

 

"은은한 행복이란, 모든 추상된 언어로 기술된 철학의, 긍정적인 방향에로의 탈태를 말한다. 철학자들은 아쉽게도 긍정의 기로든 부정의 기로든, 구별하려하지 않아. 그들은 다만 객관적인 정방체를, 비일관적이고 장대하지만 극히 자연스러운, 다면의 일직선적 선을 손에 넣으려고 하지. 말하자면, '진실'을 원할 뿐이야. 그러나 그것에 도달하려고 하면할수록, 그것은 점차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 왜냐하면 현실이 곧 진실이 때문이고, 그들의 현실은 우습게도 탈태와는 멀어지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결국, 종말 없는, 지독히도 동일한 자조의 늪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철학자들이, ‘자신의 노예라는 유언비어는 틀린 게 아니야!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의식을 영원히 억압하고 괴롭힌 공포와 지독한 슬픔에 관해, 리비도의 패배라는 말로만 고개를 숙여. 그건 아니야, 정말로. 일반적으로 노예란, 행복한 존재가 아니야. 역사상 모든 노예들, 세계 모든 노예들은 심각한 고통에 맞서 폭발적인 자기애에 더욱 폭발적인 집중을 하지. 그들의 유정有情은 강자에게 맞선 약자의 유희에 진배없다. 할 말 없는 바보들의 흐느낌이며 찌그러진 우수이며 공상이다. ‘르상띠망의 연쇄적 계시는 이 시점부터 발로된다."

 

12시를 알리는 궤종 시계가 나의 작은 목조 집을 울리면, 난는 피아노 앞에 앉아 한 가지 일을 수행했다. 내가 혼자만의 산문을 읊어감에서 벗어나, 시에 빠져드는 유일무이한 하나는 피아노였다. 내가 치는 피아노는 너무도 낡아 찌그러지고, 부서지고, 깨져있었다. 자작나무로 만은 이 수제피아노는, 징그럽게도 오래된 것이라, 형태의 구체적인 궤적이라곤 발견할 수 없고, 소리 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환멸성조차 잊을 만큼, 고색창연한 역사의 순환 고리로 연결된 인간정열에 관련하여, 종결의 파괴된 편린의 깨진 조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망쳐진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역시나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태도로 일관하는 자신을 대면하게 될 터인데. 여전히 패배적이면서 여성스러우며 동시에 일관된, 심지어 획일성과 겹친 자괴성을 그래, 내 과거는 결코 돌아오지 않아. 아무리 후회하고 발버둥 쳐도 보이는 것은 유일하게 현실 하나이다. 현실, 그것은 과거의 역동성과 과오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소모적인 마법가루여서,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비소모적인 사유의 전개과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이윽고 나는 편안하게 잠들었다.

 

그리고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느 순간에, 새벽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여명의 순간의 이전에, 하늘은 짙은 시의 전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어둠이 자잘히 부서지고, 분해된 동결의 심연이 무수한 아름다움의 여백으로 남아, 하늘은 조용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갑자기 신선한 자연의 냄새, 아니 고귀하면서도 웅대한 산소 같은 것이, 거기에 스며들었다. 무한하고 광활무비하게 펼쳐진 깨끗한 하늘. 상공의 여명은 이렇게 은하수가 아득히 걸려 있었다. 조그마한 늙은 짐승의 삶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었다.

 

관심 바깥에 내던져진 존재의 부조리함. 그의 개인의 역사를 써내려감에 있어 일종의 현기증 같은 걸 느낄 뿐. 무관심은 유일무이한 현대사회의 조류, 그 어떤 위대한 사상도 대중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을 억제할 수 없다. 마멸된 혼은 무로 이월하여 그 위상을 이미 잃었고, 단지 대중의 몰염치한 전체지만이 세상을 조롱할 뿐이로다. 한국의 시는 더럽혀져 과거 이데올로기를 테마로, 즉자적 계급을 대자적 계급으로 이행하려는 고결한 사적 시도는 무산되었다. 현대 한국의 시는 라는 미학적 측면에서의 접근이 불가능하리만치 모종의 궤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어설픈 시도들이 횡행하여, 절제와 가입성은 온대간대 없고 불필요하면서도 문법에 어긋난 시인 이상주의자들이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시인들이 언제 마굿간에서 흐느낀 적이 있었는가? 그들이 자신의 심미를 표상하지 못할 때 그들은 단순히 패배주의자에 불과하며 수사적 기법만을 사용하여 인민을 조롱하는 민폐를 낳을 뿐이다.

 

희색 하늘에서 이슬비가 촘촘히 떨어진다. 바야흐로 장마다. 이런 날에는 비관과 허무가 합일하여 하나의 비의를 생산하기도 하며, 때로는 통제 불능의 우울감까지 존재의 생기를 무너뜨린다. 이런 날에는 ‘X-Japan’‘Endless rain’을 들으며 비오는 거리를 무작정 목적지도 없이 걷는 게 타당한 유희이리라. 하기야 비오는 날에는 누구나 로맨티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잠깐 현재라는 작업을 중단하고 영원의 시간성에 착목하는 것이다. 기억의 편린이 곧 나의 전부가 되고,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회상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것이다. 삶이라는 건 꿈의 달성이라든지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달려가는 과정이 아니다. 삶은 그 자체로있다. 오직 의식 그 자체로’, ‘사태 그 자체로유폐되는 것이 진짜배기 인생의 원류라 할 수 있겠다.

 

어렴풋한 의식을 가진 사물에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한다. 그 불침투적이고 영속적이며, 외면적인 물체는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 안에 추상적인 섬광만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에 배어 있는 유비무환적 색채는, 즉 준비 중인 즉자적인 색채는 캔버스 상에서, 묘묘히 그려진다. 나는 바로 그것을 말하려 한다. 내 존재의 현성은 비록 모든 질료적 색채와 음조의 대조적인 유비관계를, 나의 사변이성의 구별 기준과 연륜에 따른 변별력에 따라, 섬세하게 판명한 조정의 종식을 선포한다. 나는 이를테면, 예술의 동류성이 논구하는, 함의하고 있는 지고의 순수한 감수성의 미를 정립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출발하는 지점에서, 이미 출발된 지점에서, 더 나아가 정합적인 모종의 이구동성에 입각하여, '종합적인 사태'에 대한 관조의 자체적인 내용에 대해, 예술가로서의 책임감을 통하여, 기필코 아류적인 게 아니라 메인스트림이라는 황홀한 지상에 발을 딛고 서서, 나를 둘러싼 인물들과 사건들, 법과 규칙, 그리고 도처에 자행되는 부패를 조명하고 해명하려고 하거니와, 거기에서 일관된 개연성의 합법칙성을 찾아 묘명진심의 도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철학적인 글쓰기, 최종적인 '글쓰기의 예술'로 말미암아, 새롭고 변질적인 '하나의 변수'를 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 변수는 이른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기로에 서 있는 여러 가지 이분적인 것, 요컨대 물질과 정신이다. '물질''정신', '외재적인 것''내재적인 것'의 대립에 대해 고찰하자면, 마침내 나의 영을 전복하는 건 후자이다. 이게 바로 인간실존의 원동력이자,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가교로써, 역설적인 진면목을 보여주는 내 이면의 적나라함인 것이다. 나는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현재도 고독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고독함'이 조악한 무엇이 아닌 공교로운 '자기 증명의 논리'로 다가올 때, 그것이 '자기정립'적으로 채택될 때 바로 거기서 한 개인의 역사가 쓰여 지는 것이다.

 

사물들, 사회적인 혹은 개인적인 가치들, 일련의 추상적인 관념들은, 따라서 이 자체가 하나의 가치판단이며, 우리는 이를 분해하고 분해하여, 모나드를 추출하고 이의 상호조합을 꾀한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무모순적인 총체적 진리에 함몰되어 우주의 원리를 공시적인 입장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우주는 일가一價불가분의 수많은 단자가 상호조응으로 말미암아, 마치 두뇌의 시냅스의 그것처럼 합성되고, 마침내 종합된다는 역설적인 합법칙성, 즉 모나드의 상호합의에 의해 형성된다는 과학론적 우주론의 이러한 역설의 법칙은 따지고 보면 이론의 가능태를 강조한 능동성에 역점을 둔다고 하겠다. 이러한 후험적인 진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능히 딱딱함과 강함을 이길 수 있다는 일종의 지해를 보증한다는 점이다. 각 분야의 이론가들이 자신의 표징적이고 주관적인 요해를 창도하지만, 부분적인 것은 언제나 전체에 흡수되는 법이므로, 상호보완성을 완성하는 지식의 변증법적 기술은, 모든 지식이 언제나 집적되고 가산된다는 인류지식의 집대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컨대 과거사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류들을 내포한 유명한 이론들을 상기할 수 있다. 이를테면 벤담의 공리주의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완벽하게 난공불락의 이론이나 가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변이성이 지속적인 현실태로 존재하는 한, 여태껏 무적의 법칙으로 존립했던 많은 이론과 가설은, 가없이 세월이 흐른다면 그들을 뒤잇는 후학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비틀어 생각해 하나의 내파(Implosion)작용이라고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는 다분히 한 사상가로부터 말미암은 비판의 역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요컨대 학설 역시 일련의 기투라기보다는 표투에 가까우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날의 도덕에서 선악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점점이 계급도덕의 과잉을 경험하게 된다. 니체의 이른바 르상티망이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프롤레타리아 사상에 살아 숨 쉬는 것을 보면, 우리는 니체가 낡은 철학이라고 비판할 구실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과학과는 달리 아무리 세월의 풍파에 묻힌 고대 철학이라 해도 이를 단순히 지리멸렬하고 오래됨과 동시에 진부한 방식이라고 예단할 착오를 저지르는 근시안적인 사변판단은 자제해야 할 것이리라.

 

원컨대 좀 더 자신의 지성을 멀리 이르게 기투를 유지하고 자기 의식의 지향성의 일차원성의 한계를 극복할 다식을 갖춤과 더불어, 다재다능하고 총명한 사람이 돼라. 단지 경험해보지도 않은 지식의 영역을 지레짐작하지 말며, 자신의 이성이 항상 부분적이고 지엽적이라느 것을 직시하고 의식적으로 이를 닦달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인간은 일종의 포유류에 불과하지만, 이는 다만 육체의 한계이지 정체의 한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공평성을 극복하고, 보다 정신에 비중을 두는 도인으로서의 정적 현실태를 유의미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미 고대 동양에서 대두된 일종의 관념지향성의 패턴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들 승려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그들은 직관으로 그 지점에 다다랐다는 것이고, 반면 우리는 하나의 공리公利를 세우고, 연역적으로 그곳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크게 보면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이 비판적·가변적인 시대에 더 이상 동양철학이 통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패러다임의 지향성을 명약관히 조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스틸녹스에 취해서, 이 가공의 합성화합물에 취해 쓰는 나의 시는 곧 입전수수의 경지에 도달해있도다. 내가 도취의 새벽을 맞는다고 호시우행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빼어난 산문시에 내가 담고 싶은 메시지는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슬픔은 어느새 옛 슬픔을 지워버리고 새롭게 영혼에 수정과도 맑은 지를 마술과도 같이 교교히 아로새긴다. 랭보의 애 띤 얼굴, 그의 절필과 동시에 일어난 시의 종언.

 

슬픔은 어느덧 내 구원을 향한 탈출구를 가로막고 서서 이렇게 외친다.

 

너는 지금 네가 무엇으로 인해 설계되어 있는지 아는가?”

 

그렇다. 나를 설계하고 있는 건, 나의 주조는 모두가 불가지적인 존재론에 결착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이 추상적인 시에는 진선미의 푸른 보은이 절절이 묻어나온다. 그리하여 새벽이 끝나고 여명의 순간이 왔을 때, 나는 한 순간 눈에 이슬이 맺히는 걸 깨닫는다.

 

4.

 

학자는 외길 인생이다. 고독 속에서 오직 정신적인 측면만 부각되는 끝도 없는 지평선이고, 뒤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평화로운 일상에서는 멀어져만 간다. 왜냐하면 학자는 자신의 존재를 학문으로 해명해야 하므로, 이를테면 토마스 만이 일상성과 예술성의 양자 간의 대립을 추구한 것처럼, 학자 역시 일상성에 대립되는 학술성이라는 장구한 늪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학문을 통한 끊임없는 변증법적 연역을 통해 발전해나간다. 여기에는 종말이 없다. 항시 무원한 지속의 밑도 끝도 없는 연장으로 그는 고독의 질주를 할 뿐이다. 여기서 학문이 얻어내는 건 단순히 학식만이 아니다. 학문은 일종의 수양이자 정양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가치관의 조정을 체감할 수 있거니와 이의 질적 양적 팽창에 입각하여 깊은 사유의 지평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은 오로지 인간이성의 각인에만 그 뜻이 있으며, 학문을 한다는 것은 감정을 전혀 배제한다는 걸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란 비단 오관이 불러일으키는 희노애락뿐만이 아니라 고귀한 미학의 영역에 속해 있는 파토스까지 망라한다. 지식에 전문성과 논리적 엄밀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일시적인 지엽성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사물의 어깨 너머에 있는 총체적인 절대를 응시해야 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객관적인 실재를 깨우치기 위한 구조지향성의 계승자다. 이 우주의 유위변전을 관통하여 조상들이 일구어낸 기초적 질료를 이용하여, 또한 그들이 남긴 문헌을 제반으로 삼아 이를 발전시켜나가 자기만의 독보적인 역사를 새로 써야한다. 이 독보적인 역사는 전적으로 학문적인 것이고, 이 학문의 영역을 마치 밭을 갈듯 해가 갈 때마다 진일보를 거듭하려면 어떤 졸렬한 사고방식 갖고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왜냐하면 학문이란 전적으로 창의성을 요하는 분야이므로, 그리고 대부분의 성공한 학자들이 자신의 독자적 견해로 그 발로를 연쇄 폭발 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서 자신의 이론을 천명할 필연적인 열정을 부여받아야 한다. 따라서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자신의 젊음까지도 거기에 불살라야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현대는 정보화 사회이니만큼 새롭게 창조되는 지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후학들은 줄곧 혼란에 빠지기 쉽다. 이런 카오스는 자기의 지적 강인함과 창발성에 의거해 변별적으로 분류해서 섭취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나서 코스모스로의 전화를 맛보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사회적인 잣대에 휩쓸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개론할 개연성이 있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즉 그 고귀한 개인성을 보증하기 위한 보루이다. 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의 저서로 자신의 지성을 입장표명하기 위한 방책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기야 학문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 해봤자 사영의 중첩된 집합체의 하나가 아닌가? 이는 그것이 아무리 첨단으로 기술적 혁신을 거친다고 해도 언제나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성된 사생아에 진배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문과 인간 제요소 모두는 시대에 아들일 뿐이리라. 따라서 나는 고와 금을 통합하여 내 이론의 기초적 근거를 세우고, 내 학술적 이념의 묘명을 밝혀, 전심으로 내 대사상을 창발적으로 제기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역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살다갔지만 그들은 단순시제로서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으나, 나는 과거/현재를 관계대명사로 묶어 내 이론적 준칙의 기초로 세울 것이거니와, 내 위대한 사유정신적 모태의 사영斜影을 사상적 핵심논리로 수미일관되게 개론해나갈 것이리라. 이리하여 나는 과거 내 스승 사르트르가 그랬듯 제2의 세계 학계의 황제로서, 21세기 지성의 최고봉으로서,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지식의 전승자로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지식인으로 우뚝 설 것이다. 그 누구도 내 특유의 기술적인 방법으로서의 촌철살인을 막지 못할 것이다.

 

사태는 순수 정신에 완전무결이 입각해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나는 내 본질을 살려고 언제나 노력했지만 이는 단지 헛된 시도에 전혀하다는 걸 직시하고, 성찰의 끝자락에서 나는 꿈결에 빠져 오직 학문하는 것만이 내 존재가치적 기준의 파생실재의 뇌관에 불을 밝히는 것이라는 글이 어지럽게 필기체 문형으로 비석에 각인돼 있는 걸 보았다. 그 꿈을 프로이트가 분석한다면 어떤 인과관계의 도식이 성립될 것인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난데없이 꺼내는 이유는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이 진짜 내가 사랑하는 학문의 분과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사상가가 되기 원하지만, 정신분석학이라는 심리학의 한 분과에 광적으로 경도된 나머지, 아니 경도라는 말은 결코 옳지 않으며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이미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의식 세계로 끌어와 치환작업에 나섬으로써 정식적인 심리학의 하나가 되었고, 프로이트, 그가 옳았다는 생각이 귀의 이명처럼 낯설게 들려오는 건 어떤 이유에설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학인의 외길 인생에 대해 설명했다. 학자는 언제나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저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아름다운 덕성이 그의 가슴 속 저변으로 미끄러진다. 학인이란 그런 것이다. ‘배움과 앎을 언제나 몰대상적인 절대자 혹은 우주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포부는 가히 하늘을 뚫을 만큼 광대무비하기도 하다. 하기야 ,수학한다는 것은, 이에 의거해 변증법적 글쓰기를 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그리고 필자에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에 불과할 것이다. 좀 외롭더라도, 좀 쓸쓸하더라도, 좀 가난하더라도, 이렇게 산재한 가없는 난관을 제치고 자신이 상정한 표상 아래 기도 드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들은, 그리고 필자는 분발할 것이다. 외길 인생.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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