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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
스티븐 내들러 지음, 김호경 옮김 / 텍스트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학자는 외길 인생이다. 고독 속에서 오직 정신적인 측면만 부각되는 끝도 없는 지평선이고, 뒤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평화로운 일상에서는 멀어져만 간다. 왜냐하면 학자는 자신의 존재를 학문으로 해명해야 하므로, 이를테면 ‘토마스 만’이 일상성과 예술성의 양자 간의 대립을 추구한 것처럼, 학자 역시 일상성에 대립되는 학술성이라는 장구한 늪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학문을 통한 끊임없는 변증법적 연역을 통해 발전해나간다. 여기에는 종말이 없다. 항시 무원한 지속의 밑도 끝도 없는 연장으로 그는 고독의 질주를 할 뿐이다. 여기서 학문이 얻어내는 건 단순히 학식만이 아니다. 학문은 일종의 수양이자 정양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가치관의 조정을 체감할 수 있거니와 이의 질적 양적 팽창에 입각하여 깊은 사유의 지평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은 오로지 ‘인간이성’의 각인에만 그 뜻이 있으며, 학문을 한다는 것은 감정을 전혀 배제한다는 걸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란 비단 오관이 불러일으키는 희노애락 뿐 만이 아니라 고귀한 미학의 영역에 속해 있는 ‘파토스’까지 망라한다. 지식에 전문성과 논리적 엄밀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일시적인 지엽성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사물의 어깨 너머에 있는 총체적인 ‘절대’를 응시해야 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객관적인 실재’를 깨우치기 위한 구조지향성의 계승자다. 이 우주의 유위변전을 관통하여 조상들이 일구어낸 기초적 질료를 이용하여, 또한 그들이 남긴 문헌을 제반으로 삼아 이를 발전시켜나가 자기만의 독보적인 역사를 새로 써야한다. 이 독보적인 역사는 전적으로 학문적인 것이고, 이 학문의 영역을 마치 밭을 갈듯 해가 갈 때마다 진일보를 거듭하려면 어떤 졸렬한 사고방식 갖고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왜냐하면 학문이란 전적으로 창의성을 요하는 분야이므로, 그리고 대부분의 성공한 학자들이 자신의 ‘독자적 견해’로 그 발로를 연쇄 폭발 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서 자신의 이론을 천명할 필연적인 열정을 부여받아야 한다. 따라서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자신의 젊음까지도 거기에 불살라야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현대는 정보화 사회이니만큼 새롭게 창조되는 지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후학들은 줄곧 혼란에 빠지기 쉽다. 이런 카오스는 자기의 지적 강인함과 창발성에 의거해 변별적으로 분류해서 섭취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나서 코스모스로의 전화를 맛보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사회적인 잣대에 휩쓸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개론할 개연성이 있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즉 그 고귀한 개인성을 보증하기 위한 보루이다. 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의 저서로 자신의 지성을 입장표명하기 위한 방책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기야 학문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 해봤자 ‘사영의 중첩된 집합체’의 하나가 아닌가? 이는 그것이 아무리 첨단으로 기술적 혁신을 거친다고 해도 언제나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성된 ‘사생아’에 진배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문과 인간 제요소 모두는 ‘시대에 아들’일 뿐이리라. 따라서 나는 고와 금을 통합하여 내 이론의 기초적 근거를 세우고, 내 학술적 이념의 ‘묘명’을 밝혀, 전심으로 내 대사상을 창발적으로 제기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역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살다갔지만 그들은 단순시제로서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으나, 나는 과거/현재를 관계대명사로 묶어 내 이론적 준칙의 기초로 세울 것이거니와, 내 위대한 ‘사유정신’적 모태의 사영斜影을 사상적 핵심논리로 수미일관되게 개론해나갈 것이리라. 이리하여 나는 과거 내 스승 사르트르가 그랬듯 제2의 세계 학계의 황제로서, 21세기 지성의 최고봉으로서,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지식의 전승자로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지식인으로 우뚝 설 것이다. 그 누구도 내 특유의 기술적인 방법으로서의 촌철살인을 막지 못할 것이다. 바야흐로 나는 24살에 뚜렷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할 수 있었다. 좀 늦게 꿈을 꾼 게 마음에 걸리지만, 아무리 내가 직업을 가진 직장인이나 공무원이 되려고 해도 나의 거대한 지적 야심은 나무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질기고 강인한 생명의 ‘현실태’를 내포하고 있을 뿐 이었다. 또한 별처럼 빛나는 ‘가능태’로 충원한 내 가슴을 바라보며 즉 ‘별 헤는 밤’에서 ‘별’을 응시하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따라서 사태는 ‘순수 정신’에 완전무결이 입각해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나는 내 본질을 살려고 언제나 노력했지만 이는 단지 헛된 시도에 전혀하다는 걸 직시하고, 성찰의 끝자락에서 나는 꿈결에 빠져 ‘오직 학문하는 것만이 내 ‘존재가치’적 기준의 ‘파생실재’의 뇌관에 불을 밝히는 것’이라는 글이 어지럽게 필기체 문형으로 비석에 각인돼 있는 걸 보았다. 그 꿈을 프로이트가 분석한다면 어떤 인과관계의 도식이 성립될 것인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난데없이 꺼내는 이유는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이 진짜 내가 사랑하는 학문의 분과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사상가가 되기 원하지만, 정신분석학이라는 심리학의 한 분과에 광적으로 경도된 나머지, 아니 경도라는 말은 결코 옳지 않으며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이미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의식 세계로 끌어와 치환작업에 나섬으로써 정식적인 심리학의 하나가 되었고, 프로이트, 그가 옳았다는 생각이 귀의 이명처럼 낯설게 들려오는 건 어떤 이유에설까?
그래, 그래, 그래.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일종의 숲길, 하이데거의 ‘숲길(그의 저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철학을 논할 수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의 실존주의 철학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데리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하버마스’ 등의 대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더 나아가 많은 실존주의 작가들에게 테마를 선사하였고, 총체적으로 하이데거는 ‘20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라 불리며 그 가세를 떨치고 있으니 어찌 그를 피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학인의 외길 인생에 대해 설명했다. 학자는 언제나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저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아름다운 덕성’이 그의 가슴 속 저변으로 미끄러진다. 학인이란 그런 것이다. ‘배움과 앎’을 언제나 몰대상적인 절대자 혹은 우주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포부는 가히 하늘을 뚫을 만큼 광대무비하기도 하다. 하기야 ,수학한다는 것은, 이에 의거해 변증법적 글쓰기를 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그리고 필자에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에 불과할 것이다. 좀 외롭더라도, 좀쓸쓸하더라도, 좀 가난하더라도, 이렇게 산재한 가없는 난관을 제치고 ‘자신이 상정한 표상 아래 기도 드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들은, 그리고 필자는 분발할 것이다. 외길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