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이너지가 조금씩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 본 사람만은 알 것이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어떤 곳을 여행하고 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그 도시의 전부를 속속들이 다녀온 것은 아니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