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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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서점에서 시집들을 살펴보면 결코 쉽지 않다.


한번은 영화 속 주인공이 시를 읽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해 시를 읽어보려 마음 먹은 적이 있다.

평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타입이라 평점이 높은 시집을

몇 개 찾아봤었는데 하나 같이 암울하고 어둡고, 난해했다.

(당시의 시대상과 감정이 반영되었겠지만)


그후로 한동안 시를 잊고 살았는데 오랜만에 관심이 가는 시집이 생겼다.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독특한 제목 때문에 검색해보다 그녀의 이력을 찾아보니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미용고 졸업, 미용 보조, 단역 배우.

주물 공장에서 일하며 쓴 글로 소설가가 된 김동식 작가가 떠올랐다.

김동식 작가처럼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새로운 감성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며

이 시집을 집어들었는데 이원하 시인은 그에 딱 걸맞은 사람이었다.


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시를 낱낱이 분해하고 분석하는 식의

감상은 남기기 어렵고 기억에 남는 몇 가지 표현에 대해 

간략하게 코멘트를 남기는 것으로 평을 대신하려 한다.


두 줄짜리 글에는

몇 달치의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그렇고 그런 말들

내가 입기엔 너무 큰 말들

비가 그쳤는데 급하게 우산을 펼치는 말들


(중략)


이러다가는 내일도

바다가 나를 채갈 겁니다

자꾸 울면

내 눈에만 보이던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겁니다


<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중에서


제목도 좋고 표현들도 너무 좋았다.

마음 같아선 시 전체를 옮겨두고 싶을 정도로.

혼자서 마음을 표현 못하고 앓았던 경험이 많아서 더욱 와닿고

누군가가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는 사실도 재미있었다.


돌아 보면 행복했던 감정과는 거리가 먼데도

당시의 애태우던 마음이 반가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며 웃으신다


내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해

침만 삼키고 있으니


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중에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다.

내가 채 걷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가끔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꺼내보는 아버지의

표정을 통해 짐작만해볼 뿐이지.

그래도 이런 시를 만나면 역시나 마음이 움직인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셨을까하는 마음에...

'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라는 문장에 한참 눈길이 머문다.



몽글몽글한 사랑의 감정으로 가득찬 시집인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한 방을 먹기도 했다.

내게 처음으로 시의 맛을 알려준 이원하 시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녀의 다음 행보도 응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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