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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평점 :
소설을 보면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적이 언제였나 싶다.
티피의 위트있는 쪽지에 피식하며 코웃음을 쳤고,
두 주인공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마지막 통쾌한 사이다를 건넨 결말에서는 눈가에까지 웃음이 번졌다.
연말에 이런 책을 만나서 참 다행이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인생에 한 번뿐인 2019년 연말의 기억이
늘 그랬듯 드라마 배우들이 상을 타는 모습뿐이었을테니까.
사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제목부터 당당하게 내건 '셰어하우스'라는 소재가 멜로 장르에서는 이미 흔한 소재이니까.
옥탑방 고양이, 너는 펫, 개인의 취향(연식이 너무 드러나는가...) 등등
당장 생각나는 동거 이야기만 해도 결코 적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시트를 갈아야겠다. 보고 싶지 않은 무엇이라도 눈에 띌까 겁이 나서 눈을 질끈 감고 시트를 잡아 뺐다. 됐다. 아마도 새로 빨았을 깨끗한 시트는 다시 세탁기로 들어갔다. 그리고 빤 사실이 100퍼센트 확실한 나의 사랑스러운 시트를 깐다.
p.60
책의 주인공들은 한 집, 게다가 한 침대까지 공유하지만
낮과 밤으로 철저하게 분리된 생활을 한다.
즉, 같이 살지만 같이 있을 수는 없는 상황.
뻔한 소재에 간단한 설정 하나만 더해졌을 뿐인데
상당히 독특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목도리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목도리의 수가 꽤 된다는 것도 의심을 부추겼다. 최소 열 개는 넘었다. 만약 훔친 것이라면? 망할. 혹시 그가 살해한 여자들에게서 포획한 전리품이라면? 어쩌면 연쇄 살인범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목도리를 두르는 겨울철만 노리는 살인범.
p.61
약간의 거부감과 함께 시작한 동거(?) 생활이지만
집안 곳곳에 붙인 쪽지로 소통하며 서로에게 위안을 얻고
결국에는 직접 마주하는 과정이 마치 연애 성장소설을 보는 듯 하기도 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티피에 비해 리언의 매력은 좀 떨어졌다.(특히 후반부의 고구마 장면들은...)
어쩌면 내가 리언과 비슷한 연애 타입을 가져서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감정에 너무 조심스럽게 다가갈 때나 생각이 많아 쓸데없이 오해를 하는 모습을 보며
답답해하는 한 편, 반성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웃음과 설렘뿐 아니라 교훈도 주는 소설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결정적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못지않게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세련되었다는 점이다.
두 주인공이 만나기 전까지는 두 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외모 묘사가 많지 않다.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 감정, 패션 정도를 주로 다루다가
두 사람이 서로 마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서로의 눈에 비친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티피는 티피대로, 리언은 리언대로 그들의 외모가 아닌
사람 그대로의 모습을 보며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로맨스 소설에서는 참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었다.
수개월간 이어진 쪽지와 음식, 그러고도 그녀를 전혀 알지 못했던 시간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이제 만나고 보니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었다. 그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수개월만이 아니었다. 그 전부터였다. 평생 꾸물거리고 망설이고 기다리기만 했던 시간들.
p.355
마음껏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책과 함께 올해를 마무리 짓고 싶다면
이 책이 바로 정답이다.
적어도 연말은 웃으면서 보내주는게 답이 아니겠는가.
"당신들이 지켜온 일상의 규칙에 변화를 주고 싶다면, 재빨리, 한꺼번에 해치워야 한다고 조언하겠소. 피해갈 도리가 없게 말이야."
p.160
집에 오는 내내 홀리가 나아졌다는 사실 덕분에 기분이 들떴다. 길구석에서 대마초 태우는 십 대 아이들 얼굴마저 천사 같아 보인다.
p.64
최저임금을 넘을까 말까 한 봉급을 주면서 왜 카운슬링 치료비는 지급할 의지가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직원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하도 그만두는 데 질려서일까?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