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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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야기가 선명하게 남는 소설이다.

비행운이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는 아직까지 하나로 단정 짓기가 힘들지만...


구름은 보통 설렘과 두근거림, 행복의 기호로 쓰인다.

푸른 하늘의 멋을 더해주고 거센 햇볕을 조금이나마 막아주기도 하고.

(음 먹구름은 일단 논외로 하자)


하지만 비행운은 비행기가 지나가며 만드는 구름이다.

인위적이고,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구름과는 다른 구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미지 역시 비행운과 닮아있다.


그러니 전반적인 이야기의 분위기도 어두울 수 밖에.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주인공이 느낀 설렘의 감정이 수치심으로 변하는 순간,

'하루의 축'에서 기옥씨가 보인 선의가 후회로 돌아오는 순간은

직접 그 상황에 대면한 듯 어쩔줄 모르는 감정으로 페이지를 넘겼고,

'서른'에서 순수한 호의를 이용한 '나'를 볼 때는 연민에 앞서 분노가 일기도 했다.


책 속 주인공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내 감정도 비행운처럼 그려졌다.

이야기를 따라 감정이 일었다가 금방 사라지고 다른 감정을 또 발산하는.

지금은 수치심도 후회도 분노도 모두 사라졌지만

이야기의 여운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이 이 책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겠지.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도 기어들어 가지 않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 내는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 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p.13


하지만 이런 역동적인 풍경과 달리, 멀리 바깥에서 본 인천공항의 모습은 고요하기만 했다. 공항 리무진 버스에서 소리가 소거된 채 나오는 연합뉴스 화면처럼 그랬다. 허허벌판 섬 한쪽에 외따로 핀 문명의 꽃이라 그런 듯했다.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靜的)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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