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

만약 그러한 수사가 본질에 조금 더 다가가있는 것이라면 우리네 삶은 필연적으로 인생의 소비를 통한 자아실현으로의 치환 해석되는 편협한 개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사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어울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니었던가.

인생의 장벽에 부딪혀 비분강개하고, 끊임없이 순환되는 과정의 울타리 안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에 대한 회의론이 우리네 철학이 아니었던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희극과 비극의 경계선이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성취와 박탈이었던 것은 쉽사리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은 배후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괴물이 그 음모의 주동자요, 그 괴물의 실체는 추악한 인간의 본질이다.



관문 이라는 것은 사실 삶과 죽음까지의 일직선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을 투명하게 볼 수 없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고작 삶과 죽음의 추상화일 뿐이다.

이 것이 바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다. 공포를 잊기 위한 추악한 발버둥이다.

공포는 인간에게 공포를 잊기 위한 수단을 요구한다. 조악한 두뇌로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 이라고는 삶을 모방하는 것, 죽음을 모방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방법론으로 인간은 삶과 죽음을 점, 선, 면의 형태로 인식하려 한다. 인생의 단면들이 결합하여 전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곧, 삶을 과정의 연속성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과정의 관문에는 인간이 이겨나가야 할 문제들이 존재하며, 그 것을 해결해 나가는 능력을 중시하게 된다. 그러한 능력이 없는 인간은 삶의 과정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는 불구자일 뿐인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 낸 삶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요, 처절하게 싸워 나가 얻어 내야 할 희노애락이다.

나는 이러한 관문으로부터의 탈피, 비상구로의 회귀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우리가 만들어 낸 삶은 허상이자, 나아가 괴물이다. 우리는 죽음으로의 일차선 도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본디 삶의 목적지는 죽음도 아니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관문의 존재보다도 내 자신의 존재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의 현실은 충분히 긴급 상황이다. 이러한 긴급 상황을 말해주는 징후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우리의 철학이 그렇고, 우리의 역사가 그러하며, 우리의 교육이 그러하고,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비상구가 필요하다. 인간이 수없이 검증하고, 반론하며 만들어 낸 지금의 현실에 대한 과감한 포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건물의 저 비상구를 보라.

후미지고, 어두운 곳에 매우 작은 통로가 있을 뿐이다. 건물의 화려하고, 웅장하고, 보행이 편한 출구에 비해 남루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보기 좋은 출구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출구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들의 철학과 삶에 대한 인식은 처참할 정도로 우울하고, 비극적일 정도로 유사하다. 허름한 비상구의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녹색 간판의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 하얀 인간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그와 함께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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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외진 곳에 존재 하는 한 나라가 있다.

외진 곳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평소 갖고 있는 상식의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 있다. 지구는 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자연의 속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인간에게 절대적 기준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본성을 표상화 하는 작업을 하는 시간을 보내왔고, 소위 우리는 이 것을 역사라고 칭하며, 철학이라 칭한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철학은 아이티를 외진 곳으로 몰아내는 폭력성으로 발현된다.



현대는 자아와 타자간의 관계에 대한 내면적 인식이 그대로 발현된다. 그것은 근대의 수준을 넘어서 더 많은 표상들과의 관계에 의해 구체화되며, 실제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는 이 것을 하나의 기회로 인식하고, 더 많은 정보에 대한 지각, 즉 다양성과 정보가 빠르게 유통되는 신속성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과 기술의 관계 맺기 속에서 만들어진 특수한 환경이 우리의 폭력성을 점점 더 가속화 시키고 있다. (철학과 테크놀로지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굳이 꺼내지 않겠다.) 아이티 문제는 더욱 그렇다. 연신 보도 되어지는 아이티에 대한 비쥬얼 이미지가 내재하고 있는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이티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화두를 꺼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외진 나라라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후진한 나라, 사회적 변동체계가 미진하며 정치적 정통성을 갖지 못한 나라라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이 것만은 아니다. 비쥬얼에 대한 경험적 지각이 부족한 나라, 우리의 철학 속에서 고찰의 기회가 적었던 나라, 국제적 정치관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나라라는 이유일 수도 있다. 이 것 말고도 우리 안에서 표상적 이미지로 발현되는 메커니즘은 수많은 팩터들이 존재 할 수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수많은 요인 중에 비쥬얼 메커니즘이 우리의 철학과 맺는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현대는 실제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우리가 TV나 인터넷과 같은 채널을 통해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이미지를 다시 현실 세계에 적용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즉, Fact에 대한 지각은 과정 상의 심리적, 공학적 잡음이 개입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고, 간헐적으로 해석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먹이사슬 관계와 비슷한 경향성을 갖게 된다. 먹이사슬의 하위 단계 생물 체내의 중금속이 상위단계로 올라가면서 축적 되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이는 이미지의 지각과 현실의 괴리성에 대한 문제를 필연적으로 야기시킨다.



아이티라는 국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작금의 비극이 아니다. 자연의 분노와 역공은 희대의 살인마가 아니었다. 이는 확률 상 낮긴 하지만, 가능한 일이다. 분노할 정도로 비극적이긴 하지만 윤리와 책임과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이 것은 고도로 진화된 테크놀로지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자연의 웅장함 앞에 차라리 숭고한 마음마저 생긴다. 인간의 무능력함 앞에 염세주의적 성향의 글들을 쓸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이러한 자연의 힘이 이미지화 되어 우리에게 인식되었을 때는 앞서 제시한 것처럼 왜곡의 과정을 격게 된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이 생기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는 이미지에 대한 개인적 수준의 문제와 사회적 수준의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두 가지 형태의 수용과정에서 생기는 잡음들은 철학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것에 있다.

즉, 철학은 비쥬얼 이미지에 종속 될 수 밖에 없는 회의론으로 귀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관념론에 대한 비판은 아니나, 아이티 문제만을 놓고 생각해 봤을 때, 유례가 없는 잔혹한 현실에 처한 인간들의 모습이 갖는 이미지가 인식과 해석의 문제에 있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에 부정적 상관관계를 제시하기는 힘들다.



최근에 아이티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이는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 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양한 경로의 성금 모으기 운동이 한창이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내재화 된 이미지가 현실 속에 구체화되고, 핸드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성금을 하는 재이미지화 되는 현상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이티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 혹은 감정적 행동 유발 요인이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는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성금을 내놓는 행위가 이미지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 할 수도있겠다. 현대는 자신이 직접 물리적인 도움을 주지 않아도, 채널이 만들어 낸 이미지를 통해 대안적 도움을 용이하게 한다. 이를 시뮬라르크를 통해 설명 할 수 있는데 친구와 직접적인 대화를 하지 않아도 메신져 창의 문자들을 보며, 친구와 감성적인 교류를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내는 관심과 도움이 사실은 이미지를 통한 관계 맺기라 한정 할 수는 없다.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고찰이 중요한 것은 현대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있어서 새로운 논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애!

참으로 명확하고 아름다운 문자이다. 그 것은 인간이 고등동물임을 입증하는 가장 절대적 근거 중에 하나이다. 이는 이미지의 단순한 교류과정으로도, 생물학적인 진화론으로도,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의 성질이 아니다.

그 어떤 철학자도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답을 내지 못한다. 수사와 주장만으로 본질의 영역에 다가가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 찬란하고 인간적인 단어 앞에서,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마음을 전하려는 시도를 반복한다.

나쁘진 않다. 하지만 그 것뿐이다. 그들의 처참한 이미지에 대해 종속 되어, 자기 만족적 행위를 되풀이하고만 있다.

금모으기 운동과 같은 Nationalism이 완벽하게 발휘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지만, 인류에 대한 관계에 대한 성찰을 너무나 부족한 나라이다. 구호를 보면 알 수 있고, 저마다 갖고 있는 생각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부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고, 몇 년전 중국에서의 지진과 같이 또 그렇게 우리의 기억 속에 침식될 것이다.



씁쓸하다.

그러한 구호가 씁쓸하다. 물질이 본질을 대변하는 것이 씁쓸하다.



무관심은 씁쓸하지 않다.

단연코 철학의 부재 문제라고 말 할 수 있어 씁쓸하다.



나 역시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빵 한 조각과 물 한 모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것들을 수혜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이 문제가 없어질 때쯤,

우리가 불쌍해 하는 그들보다 우리 자신이 더 불쌍해질 것임은 자명하다.



우리는 몇 백억을 그들에게 주었지만,

인류애를 보여준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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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에 발휘하는 장엄한 불꽃의 죽음처럼 겨울의 마지막 발악이 끝날때즈음,

생경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아마도 새로운 봄맞이에 들떠 작년의 봄이 기억나지 않음에 기인한 것이리라.

 

봄의 기운이 오호츠크해 기단의 영향임을 몰랐던 어린시절의 봄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뇌의 고깃덩어리가 둔감해진 탓일까. 어쩐지 봄의 이미지를 수사하는 것이 거추장스럽다.

 

언제부턴가 봄이 되면 내 자신의 청춘을 수치스러워 하는 버릇이 생겼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나의 사고에 영향을 끼친 시점부터, 계절을 4개의 단락으로 나누는 세상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 전에는 계절이 왜 순환하는지, 작년의 봄과 올해의 봄이 같은 것인지, 혹은 우리를 스쳐가는 봄은 어디로 거처를 옮기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인류의 과학은 너무나 거만한 표정으로 자연의 섭리를 설명해주고 있고,

나는 그 원리를 기억하고, 적당한 시기에 잘난척 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내 청춘은 그렇게 쉽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연 보다 복잡한 구조로 생겨먹은 것이다.

 

봄은 사실 창조하는 힘이 없다. 창조는 봄이 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대지의 생명들과 자연의 영양분의 결합과정 사이에서

수많은 환경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봄은 수많은 요인들 중 하나 일뿐이며, 그 또한 그다지 결정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봄에게 창조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창조자의 자격을 부여한다.

 

내 청춘도 그와 같다. 나의 청춘은 사실 사치스럽고, 거만하며, 이기적이다.

남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도 못하고, 무언가에 기여하고 있지도 못하는 사회적 기생충 같은 삶이다.

하지만 나 역시 타성에 젖어 나의 무례함을 청춘의 특권이라고, 나의 자만심을 노력에 결과라고,

나의 온전함을 나만의 것이라고 착각하며 오늘도 어줍잖은 단어들로 청춘을 수사하고, 칭송한다.

 

봄처럼 청춘은 창조하는 힘이 없다. 창조는 청춘이 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정신의 땅에 수많은 영양분을 흡수하는 고통의 과정을 겪은 자들만의 특권이다.

우리는 오늘도 청춘의 창조하는 힘을 맹신하며, 누구에게나 있는 기회의 시간을 소비한다.

 

잊지말자, 봄의 소생의 비밀을, 청춘의 지독하게 표독스러운 그림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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