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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에게 길을 묻다 2
송정림 지음, 유재형 그림 / 갤리온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명작인 경우 줄거리를 요약해서 나온 다이제스트는 피한다.’
어린이를 위한 독서지도 책에 나오는 말이다.
어린이의 경우 다이제스트판으로 나온 명작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명작의 향기를 맡아보지도 못하고 읽은 권수만 늘려 아이를 근거없는 우월감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안 좋은 경우이다.
‘명작에게 길을 묻다2(송정림 지음,유재형 그림,갤리온 펴냄)’는 명작의 다이제스트판도 아니고,어린이를 위한 책도 아니다.
명작 41편에 대한 줄거리 소개와 작가의 감상을 담아,명작 중 어떤 책을 먼저 읽을까 하는 고민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이 책은 외관이 뛰어나서 소유하고 싶은 물건이다.
표지의 큰 반 정도를 덮고 있는 띠지에는 비가 내리는 어스름한 광장에서 트렌치코트를 입은 신사들이 우산을 받치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의 유화가 있다.
클래식한 그림이 책의 분위기를 흠씬 느끼게 해준다.
책을 들춰보면,어떤 작품에 대한 소개 부분인지 알 수 있도록 페이지마다 오른쪽 하단에 아주 작은 글씨로 표시해 놓아서 편집에 신경 많이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일곱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각 장마다 두 페이지에 걸쳐 있는 유화는 들판과 숲을 그려 놨고 간간이 거기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격조 있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는 유화를 배치하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준다.
소개글의 중간에 있는 삽화들은 책의 내용을 압축시켜 하나의 컷으로 만든 것들인데,쉽지 않은 주제를 한 컷으로 표현해 놓은 걸 보니,미술가도 머리가 영민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내용은 물론이고 그림들,좋은 종이,활자체 등이 공을 들여 만든 작품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초판 1쇄임에도 불구하고 오탈자 하나 없다는 것도 놀라웠다.
작품의 소개가 끝난 후 명작의 작가들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 것도 좋았다.
단순히 연대기적인 소개로 그치지 않고 재미있고 특징적으로 작가에 대해 소개했다.
책은 일곱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1장은 ‘떨림,설렘,미열의 혼란’이라는 부제 하에 바라보기만 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사랑에 대한 작품을 모았다.
그 중 전체 41편 중 3편이 속한 우리나라 명작 두 편(‘소나기’,‘메밀꽃 필 무렵’)이 여기에 속한다.
2장은 주로 열정적,적극적 사랑에 대한 작품들에 대한 소개를 모았다.
그 중 헝가리의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이라는 작품이 눈에 띈다.
둘도 없는 친구와 아내의 부정 때문에 친구를 기다리며 41년 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한 채 산 사나이의 이야기이다.
사나이는 친구로부터 진실을 듣기를 기다렸으나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41년 간의 감옥을 만든 것,가둔 것,거기서부터 나온 것은 모두 친구,아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어떤 기억,시간,사람이라도 그 대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복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작가의 해석이 가슴에 와 닿았다.
3장은 ‘조용히 스며들었다 눈처럼 스러지는 것’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몰입,메타포,희망 등에 대한 작품 소개들을 모았다.
영화 ‘일 포스티노’로 제작된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대상도 모르면서 무작정 기다리는 ‘고도를 기다리며’,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읽고 싶어하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희망 고문에 대해 말하고 있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등의 작품들이 이 장에서 소개된다.
4장은 ‘내 생에 부는 바람’이라는 부제 하에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그 중 ‘부활’에 대한 작가의 글-‘누구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은 위안이 된다.
반면에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자신의 목소리는 목구멍의 진동을 통해 듣게 돼 있으므로 잘 알 수가 없다.때문에 막상 녹음해서 들어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목소리와 너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나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그 외에 읽으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도 이 장에 속해 있다.
5장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나무(‘아낌없이 주는 나무’),남편(‘인생의 베일’),친구(‘베니스의 상인’),어머니(‘나라야마 부시코’)가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보여준다.
반면에 남편의 사랑에만 기대어 가려고만 한 여인의 삶을 보여준 ‘인형의 집’,‘여자의 일생’도 이 장에서 소개된다.
이 중 ‘나라야마 부시코’는 노인이 된 부모를 산 속에 내다버렸던 일본의 풍습을 그린 작품인데,어떤 상황에서도 오로지 자식을 사랑하는 노모의 마음이 절절히 전해진다.
정신을 차리고 맞닥뜨리기조차 싫었을 과거의 비인간적인 풍습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일본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6장은 ‘마음으로 봐야 마음이 보입니다’라는 타이틀로,외모는 비루하지만 마음만은 진실했던 사람들을 그린 네 작품(‘노트르담의 꼽추’,‘벙어리 삼룡이’,‘비곗덩어리’,‘엘리펀트맨’)과 보잘 것 없는 신분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지만 우리가 더 보듬어줘야 할 사람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큐정전’이 소개된다.
그 중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는 작가의 짤막한 소개글만 보고서도 모파상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몸 파는 여자를 멸시하던 사람들이 그녀의 음식을 먹을 때와 그녀로 인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할 때만 그녀를 이용하고 그 이외에는 고상을 떨며 그 여자를 업신여기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사람들의 편견과 이기심이 이 정도일까,아니야,이 정도는 아닐 거야 라며 마음속으로 손사래를 여러 번 치게 한다.
7장은 천국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는 이 세상에 대한 글들이다.
이 중 ‘멋진 신세계’에 대한 작가의 감상이 와 닿는다.
‘모든 편리가 행복의 척도는 아니라는 것을...모든 욕망이 거세되고,걱정을 도려내고 불행을 차단시켜버린 행복은 결코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계급이 정해져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꿈을 이루기 위한 고통과 갈망도,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는 효과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 이 책은 명작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은 물론이고 잔잔한 수필을 읽은 것 같은 마음의 편안함을 줄 것이다. 강렬하지 않고 서늘하며,이성적이지만 날카롭지 않고 훈훈한 느낌.
서늘한 날씨에 들판에 앉아 조용히 사색하며 조근조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를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