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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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모든 것은 의미가 없고 혼돈만이 유일한 지배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허무함에 빠진다. 모든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자유를 아버지에게 주었지만 주인공에게는 뿌리를 어딘가에 내릴 수 없는 혼돈 그 자체를 준 것이다. 그러던 중 혼돈 속에서 좌절에도 불구하고 질서를 찾아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답을 찾아보려고, 혼돈 뿐인 세상에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찾아보려고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파고들게 된다.

9% 숨어있는 보잘 것 없는 것들

어린 시절 데이비드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들꽃에 관심을 가졌다. 아무도 무엇인지 신경쓰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나는 잡초. 마침내 그 이름을 알아냈을 때 그 라틴어로 된 이름은 승리의 선언 같았다. 모르던 미지의 혼돈으로부터 이름을 알고 질서를 부여한, 손 안에 움켜쥔 통제의 승리감. 데이비드가 가지고 있었던 수집의 습관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온다. 박탈이나 상실 후에 심해지기도 한다는데 수집할 때 무한한 힘의 환상을 주기도 한다고 한다. 혼돈으로부터 질서로 끄집어내어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는 느낌인 걸까.

데이비드의 스승이었던 아가시는 자연을, 이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해서 인류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음. 그건 과학이라기보다는 종교이고 신념이었다. 생물의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고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면 창조주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 속에서 인간은 완벽한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고 그 밑에 있는 어류나 다른 동물들은 인간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가 상기시켜 주는 존재라고 보았다. 데이비드 역시 그 믿음을 그대로 전수받았다. 다만 완벽한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가도록 하는 건창조주가 아니라 자연 법칙이라는 믿음을 고수했다. 이런 견해에서 유전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로 작용했고 사람들을 볼 때에도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데이비드의 삶에도 여러 역경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는 절망하지 않는 불굴의 낙천성을 보여줬다. 이것을 낙천성의 방패라고 설명하는데 그래도 지진으로 그가 지금까지 일궈온 모든 질서가 혼돈으로 처박히는 일은 가장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이라면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우주가 혼돈이 지배자라는 걸 선언하는 메시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했을 역경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이 혼돈에 맞서서 바늘로 이름을 물고기 자체에 꿰매버린다. 그토록 암울한 상황에서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며 주인공은 데이비드의 여러 가지 책들을 더 많이 살펴본다. 그리고 하나의 거짓말을 찾아낸다.

43%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마약이나 약물이 인간의 정신을 잘못된 낙천성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던 데이비드. 향정신성 약물은 사실이 아닌데 긍정적인 쪽으로 보게 해서 인간을 망친다고 생각했고 그런 것은 자기 기만이므로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작 절망 속에서 그가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똑같은 자기 기만이었다. 만일 데이비드도 이러한 자기 기만으로 도움을 받았다면 이건 정말 나쁜 것이라고 볼 수 있나 싶어서 주인공은 더 찾아본다. 오래 전에는 자기 기만은 나쁘다고 했으나 긍정적 착각이라는 용어를 쓰며 유익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스토리 에디팅또는 리프레이밍기법으로 적정한 수준 자기기만 좋다고 치료에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만은 단기적 혜택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는 비용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 착각 지수가 높으면 자기 손으로 혼돈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데 데이비드 역시 그랬던 건 아닐까.

데이비드는 스탠포드 부부가 만든 스탠포드 대학의 초기 총장이 되는데 여러 가지 정황 상 스탠포드 부인의 죽음에 데이비드가 관여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나온다.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는 안식처인 아오스타 마을에 대한 데이비드의 입장도 충격적이다. 그는 이 마을을 인간 퇴화의 현장으로 보았다. 본래 생존하지 못할 “부적합자”가 생존하여 유전자를 남기게 되면 인류는 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치의 이야기로 생각했던 우생학. 그 기원이 사실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의 믿음이 이렇게 엇나갈 수도 있구나 싶어 섬찟했다.

유전과 진화에 관한 책으로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는 인류라는 종이 발전하려면 열등한 부적합자의 유전자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떠한 종이 환경 변화에 버티게 해주는 것은 변이이다.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해야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민들레 원칙.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장은 하잘 것 없어 보여도 변화된 상황에서는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열등해 보이는 무언가가 부적합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우생학은 이미 과학이 아닌 종교였다. 과학은 스스로 틀릴 가능성을 열어둔다. 반증이 나오면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 과학이다. 데이비드의 경우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도 인류가 정점에 있는 진화의 사다리 이론을 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혼돈 속에서 그를 질서 속에 있을 수 있도록 지켜준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우생학적 관점을 유지한다. 그에게 부적합자를 불임화 하는 수술을 합법화 하는 일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이었을 것이다. 숨어있던 보잘 것 없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던 소년은 인류를 발전시킬 자연의 사다리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를 보호하는 낙천성의 방패로 부적합자를 말살하려는 차가운 우생학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주인공은 부적합자로 판정되어 수용소에 갇혀있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본다. 불임화 수술까지 받았던 애나와 수술은 받지 않았지만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메리. 그 둘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데이비드로부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려던 주인공은 그의 삶에서 답을 찾지 못했다. 대신 애나와 메리, 이들에게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지 질문한다.

71% 그 때 메리가 불쑥 말했다. “나 때문이지!”

생각 없이 농담으로 던져진 대답. 그렇지만 고민하지 않고 바로 튀어나온 답이었기에 진실했고 그것이 정답이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주는 작은 그물망. 남들에게는 대단치 않아 보여도 그들에게는 그 작은 연결 하나 하나가 이 땅에 그들을 붙들어주는 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민들레 법칙을 떠올리며 주인공은 깨닫는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는 이 작고 사소한 그물망 하나 하나가 소중한 것이라고. 이건 자기 기만이 아닌 진실이라고. 우리는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작은 점일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중요하다고. 그건 그랬다. 의미란 것은 주관적인 것이니 누구에게 의미있는 것인가에 따라 가치는 달라지는 것이다.

72%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이렇게 주인공은 아버지의 무의미에 대해 반박할 말을 찾아내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평생 우생학자로 살았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 결말을 알려준다. 우생학적 관점에서 전쟁을 반대하던 데이비드. 우수한 자들은 전쟁터로 가고, 부적합자들만 남아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게 되니 전쟁은 일어나면 안된다고 주장했던 그는 국제 평화상도 받아서 그야말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의 반격이 있었다. 그건 바로 물고기,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과학이 발달하면서 유전자도 연구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서 생물의 분류를 그저 비슷한 모양이 아닌 보다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밝혀진 사실, 어류라는 종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물 속에 살기 때문에 형태학적으로 닮았을 뿐,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생물이 어류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지만 단일 종으로서의 어류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물을 분류하여 자연의 사다리를 신념처럼 믿었던 데이비드의 세계가 존재 근거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75% “왜냐하면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되니까라고 헤더는 말했다. “그런데 물고기를 포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 별이 떠 있고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이 틀리다는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늘에 박혀있는 별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지동설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였을 때, 사람들은 우주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렌즈는 완전하지 않다. 그리하여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 하나를 포기하면 더 큰 세상을, 진짜에 더 가까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가지고 있던 틀을 깨고 스스로를 정확하게 바라봄으로써 진정한 삶과 행복을 얻게 되었다. 그것이 당연히 이성애자라고 생각한 틀을 깨고 본인이 양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아 여성인 주인공이 여성인 파트너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는 것이라는 게 아직 틀을 깨지 못한 내게는 충격이긴 했다.

85%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그래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유연하게 하고 우리 사고를 틀 속에 가두는 허구의 사다리를 부수려는 노력과 그걸 표현한 문장은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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