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칼의 노래김훈 선생님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던가. 자기도 모르게 그 비슷한 문체가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서문을 읽어서 그랬던가. 초반의 글은 어색하고도 민망한 느낌이 있었다. 외과의사가 작가의 탈을 쓰고 어쭙지 않은 문장으로 문장가의 흉내를 내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서문에 나온 김훈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의사의 글쓰기와 전문 작가의 글쓰기는 다를 수 밖에 없다하지만 초반의 글은 전문작가의 문장을 흉내 내느라 어색해져서 글쓴이의 진심이, 진짜 상황이 충분히 녹아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중간부터 글쓴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술 도구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나열하며 그에 대한 느낌을 말하면서부터였던가. 점차 작가의 문체가 들떠 있는 느낌이 사라지고 진짜 이야기로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초반의 이야기에서는 글쓴이가 그저 밥벌이로 이 길을 택했음을, 타인에 의해 아직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그저 계속할 뿐이라는 그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증외상이라는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분야에 투신한 그가 드라마처럼 멋진 사명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었는데, 단순히 밥벌이로 이리 저리 가다 그쪽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대한 실망감. 그에 대한 반감이 공연한 문체에 대한 시비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나는 있어야 할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고, 분수에 넘치는 끼니를 원한 적이 없다. 빈 그릇에 채워지는 것을 채워지는 대로 먹었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밥을 벌어먹는 것만으로도 허덕였다. 어쩌면 나의 허기는 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끼니를 채워도 가시지 않는지도 몰랐다.

 (골든아워1. p425)

 

그랬구나. 사실은 그저 밥벌이가 아니었던 거다. 그저 누군가 끝내 주지 않기에 했던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있는 힘껏 해봐도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호해주는 방어기제 보호막을 치기 위해 이건 밥벌이라고 계속 되뇌었는지도 모른다. 일생의 사명을 못 이루어 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애써 이건 그저 어쩔 수 없이 하는 밥벌이라는 가짜 변명으로 덮어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밥벌이라면 밥을 먹으면 그만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끼니를 채워도 가시지 않는 허기, 바로 그 허기는 대한민국에 세계 최고 수준의 중증외상센터를 세우고 싶다는 꿈, 그리하여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죽지 않도록 만들고 싶다는 바로 그 꿈에 대한 허기였을 것이다.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에서 한국에 중증외상센터를 만들기. 글쓴이 전에 딱 한 명이 시도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도저히 그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접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화석 같은 진료 기록이 있어서 다시 한번 중증외상센터를 세워보려고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진행형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된 시스템을 세우지는 못할 가능성을 더 크게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에 시도한 기록을 화석처럼 남긴다면, 먼 훗날 누군가는 정말 제대로 된 중증외상센터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읽었다.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떠올랐다. 여왕개미의 첫 일개미. 맨 처음 여왕개미가 혼자 새로운 개미집을 짓기 위해 정착했을 때, 여왕개미는 움직일 수 없어서 자기가 낳은 알을 먹었다. 그래서 체력을 회복한 후 낳은 알 중 하나의 알만 골라 키우고 나머지 알을 먹여서 키워 애벌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애벌레도 도저히 더 키울 수 없어 다시 먹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체력이 더 보강된 여왕개미는 새롭게 알을 낳으며 다시 한 번 하나의 알을 키우기 위해 나머지 알들로 그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를 먹이며 드디어 첫 일개미를 키워내는데 성공했다. 첫 일개미는 비록 간신히 일개미로 성장한 셈이라 비실거리는 개미였지만 여왕개미를 위해 먹이를 나를 수 있는 진짜 일개미였다. 그 덕분에 먹이를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된 여왕개미는 이제 건강한 알을 낳아 건강한 일개미를 키워낼 수 있게 되고 이렇게 새로운 개미 왕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어쩌면 글쓴이는 여왕개미가 키우는 중인 첫 일개미인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에 중증외상센터라는 전에 없던 시스템이 정착하기 위해 키워지는 중인 일개미. 아니, 아직 제대로 된 개미는 태어나지 않았으니 애벌레인가. 수많은 희생과 노력 속에 간신히 자라나고는 있지만 아직 비실거리는 개미로도 키워지지 못한 애벌레. 이번에는 결국 먹혀버리고 먼 훗날 화석 같은 진료 기록을 가지고 또 다른 일개미가 다시 도전을 해야만 하게 될지, 혹은 이번에는 비실거리지만 확실한 일개미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는 아직도 더 진행되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헬리콥터는 바람과 함께 주위 모든 것들을 깎아내며 그 반동으로 솟아오르고, 앞으로 나아간다. 고정익 기체와 달리 글라이더 비행이 불가하므로 힘들어도 버텨서 항력을 얻지 못하면 곧장 추락한다. 어쩌면 나도 중증외상센터도 헬리콥터가 바람을 깎아 나아가듯, 내 동료들을 깎아가며 여기까지 밀어붙여왔는지도 모른다.

(골든아워2. p300)

 

시스템의 부재는 개인의 희생을 부른다. 공적인 사업이 필요한 것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증외상센터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 구역만을 대상으로 하면 발생빈도가 낮거나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인력과 기술, 자원이 집약적으로 모여있어야만 사람을 살리 수 있는 구조. 그것을 대비해 시설과 인력을 확충해놓는 것은 개인이나 사적인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중증외상센터는 공적으로 구축된 시스템이 없는 중에 오로지 구성원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버텨나가는 중인 것 같다. 헬리콥터를 띄우기 위해 깎여나가는 바람처럼 중증외상센터를 유지하기 위해 무수한 땀과 눈물들이 깎여나가는 중인 것이다. 중증외상센터도, 그 밖에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시스템 자체의 오류를 지닌 채 개인의 희생으로 기름칠 치며 삐걱거리고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헬리콥터 소음에 관한 민원이 나온 부분에서는 부끄러웠다. 그리고 화도 났다. 사실 오밤중에 헬기 소리가 나면 당연히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시간 당장 사람을 살리기 위한 일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민원을 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제대로 홍보가 필요한 일이었다. 일 분 일 초가 급한 응급 환자를 이송할 때 헬기 소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홍보. 그나마 이번에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책이 나와서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타인의 생명과 직결된 일에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는 개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소음은 싫지만 타당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오밤중에 헬리콥터 소리가 나면 무작정 투덜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이 고맙다. 그런데 이건 공적으로 중증외상센터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글쓴이 개인이 낸 책일 뿐이다. 결국 알리는 일을 또 개인이 했다는 점에서 또다시 시스템의 부재가 느껴진다. .. 국민의 의식의 변화를 위한 홍보와 교육도 또다시 개인이 했구나. 시스템의 부재가 시리도록 춥게 다가온다.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골든아워 1권 책 표지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어보게 된 것도 어쩐지 의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의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읽기에 적합한 책은 아닌 것 같다. 글쓴이의 상황이 의사로서 일반적으로 겪는 상황이 아니고, 아직도 제대로 궤도에 오르지 못한 시스템을 만드는 미완의 이야기는 동기 부여에 적합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다만 의사를 꿈꾸는 아이들 말고 이 책은 그냥 모두가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비록 중증외상센터 말고도 손봐야 할 일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지 않도록 하는 일,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은 우리 사회가 먼저 팔 걷고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원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애벌레에서 제대로 된 일개미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중증외상센터의 기록이 화석이 되지 않기를. 한국에 세계 최고 수준의 중증외상센터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일, 부디 끝까지 완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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