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p.191 뱀과 물)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 (p.188, 도둑자매)


19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이 단편집의 주인공들은 어린 소녀들이다. 그녀들은 어린 소녀로 등장하여 서커스 단원, 반두의 여왕, 마을의 미치광이, 여승, 여교사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인이 된 그녀들은 사회에서 스스로의 모습으로 서지 못하고 서커스 단원처럼 점점 존재가 희미해져 여성의 육체로만 사람들의 입에서 대상화되어 남는다. 마치 작가님이 직접 고른 이 책의 표지처럼. 다만 그것이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같은 시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환상적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2018년 2월에는 희생양처럼 친구를 잃은 소녀(얼이에 대하여)와 딸 또는 여동생을 잃은 어머니(도둑 자매)가 죄책감으로 인해 직관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것이 온 몸에 아로새겨져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표제작 뱀과 물이 유독 낯설었다. 그렇다면 여교사는 어째서 자신의 아이를 씹어먹었는가?


2018년 10월 다섯번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떠올렸다. 이 책의 여성들은 전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부조리한 현실 속에 내던져진다. 이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잃어가고 범죄의 피해자임에도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다. 비난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죄책감에 파묻힌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나는 여교사가 꿈의 세계에서 이 영겁회귀와 같은 굴레를 끊어 냈다고 생각했다. 원치 않는 생명을 자신의 입으로 씹어 먹고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또 다른 나인 여승을 보내면서.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직관도 없이. (p.216)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몸도 없이. (p.218)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어린 시절도 없이.” (p.224)


그가 어린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p.223, 뱀과 물)


이 책을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라고 말하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작가의 자기반복이란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의 작품들은 모두 정확히 현실 위에 발을 딛고 있으며 작품의 주인공들이 모두 비슷해 보이는 건 이 땅위의 여성들이 비슷한 어린시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여제자를 성적 대상화하고 접촉하며 동료 교사의 성폭력 사건을 묻어주는 교사나(1979) 어린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노리는 범죄자(얼이에 대하여)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자아이들은 자신을 숨긴다. 냄새를 지우고, 성별을 숨기고, 늘 그림자처럼 걸으며 존재 그 자체를 숨기고자 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이들을 찾아낸 추악한 목소리들은 그녀들을 욕보이려고 한다.


배수아 작가는 어린 소녀들이 평생을 간직할 죄책감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 놓거나 데이터를 가지고 반박하지 않았을 뿐이다. 띄지에 쓰인 비밀스런결속감은 이 땅에서 소녀들과 여성들이 겪었을 일들을 이 책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자에게만 느껴질 것이다. ‘과 같은 이는 대머리 썅년(p.255)이나 찾으라지.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좋은 책에 대한 기준은 모두 다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책'이 좋은 책이라는 기준을 새로 세우게 됐다. 1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같은 소설을 5번 읽으며 2번의 독서모임을 참가하고 책소개 영상을 만들고서 리뷰까지 쓰는 일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드문 일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작가님이 어떤 비밀을 알아내길 바랬는지 찾고 그를 통해 내가 얻는 결속, 즉 연대감은 추악한 현실 속에서도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위안을 준다. 고전에서 느끼기 힘든,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작가에게 느끼는 이 비밀스런 결속이 나는 무척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