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히라노 게이치로는 <일식> 이래 <달>과 <장송>에 이르기까지 항상 기대를 뛰어넘는 만족을 주었기 때문에 책이 나왔다면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작가이다. 무조건 주목!에 해당한다고 할까. 그런 그의 책임에도 출간된 지 3년이 지나 읽게 된 건, 장편의 놀라운 질에 반해 단편은 실망스럽다 혹은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달가울 것 없는 얘기들을 꽤나 많이 들어온 탓이다. 누군가 읽느라 들인 시간이 아깝다 생각하는 책이라고 나 역시 그럴지는 모르는 것이지만, 소위 그의 작품을 꼬박꼬박 챙겨 읽어온 팬들이 하는 소리에는 과히 얇지 않은 귀라도 솔깃해지는 것이 인지상정. 읽는데 티끌만한 부담도 안될 만큼 얄팍한 책을 집으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청수’는 아쉽고, ‘추억’은 당황스러웠다. ‘다카세가와’는 나쁘지 않지만 그저 평범한 수준. 그리고 남은 건 ‘얼음 덩어리’ 한 편. 수록작 대부분에 만족할 수가 없었는데도 (별 4개의) 후한 평가를 내리게 된 것은, 오직 이 글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단 둘, 사망한지 오래된 생모의 존재를 뒤늦게 안 내성적인 소년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도 불륜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여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눈이 마주친 서로를 각자의 생각 속 인물로 여기고(소년은 여자를 자신의 어머니로, 여자는 소년을 자신과 불륜관계에 있는 남자의 아이로 생각한다) 그 뒤로 계속, 의식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여한 정체는 이 글 전반에서 느껴지는 아련하고 정적인 정서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한 페이지를 양분해 왼쪽은 소년의 이야기, 오른쪽은 여자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글의 형식은 딱히 획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흔치 않은 읽기 방식을 시도해 글의 미묘하고 차분한 내용과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키는데 적절한 장치로 작용한다. 각각의 독립된 글로 진행되면서도 묘하게 연결된 서로의 관계처럼 접점에서 만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둘의 이야기. 작가가 선보인 그간의 장편에서 만나지 못했던, 그리고 그의 단편을 읽으면서 바라던 그런 이야기를 비로소 이 ‘얼음 덩어리’로 만나게 됐다. 안타깝고 아련하기도 (소년의 이야기), 담담하고 차분하기도(여자의 이야기) 한 둘의 이야기. 이미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앞의 세편에서 혹시나 그만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라도 조금 더 힘을 내서 끝까지 읽기를, 그래서 이 글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읽으면서, 창작으로 괴로웠을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째서 팬들에게서도 후한 평이 드문지 이해가 됐다. 워낙 뛰어난 작품들을 써낸 작가라 따르는 반작용이겠지만, 이전까지 보여준 적이 없었던 새로운 면모나 색다른 시도 자체는 높이 사줄만 하더라도 만족스럽지 않은 글을 감쌀 이유는 없으니까. 고만고만한 글을 양산해내는 작가들 중 하나라는 이미지와는 분명 거리가 먼, 탁월한 필력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화제작만을 발표한 젊은 작가라는 이미지는 분명 기쁘지만 부담으로 작용할만한 것이리라. 일개 독자로서 너무 앞서나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데뷔 때부터 항상 주목받은 작가의 부담감 혹은 나에게 이런 면도 있다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는 일종의 발버둥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져서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얼음 덩어리’에 이르러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까지 발표한 장편들처럼) 쓰는 족족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히라노 게이치로가 좋은 단편을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작가라고 믿게 된 것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이 책의 수확. 그에게 단편보다 장편이 더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단편 자체에 대해서는 겨우 한 권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좀 더 두고 봐야겠다. 계속 챙겨 읽을 것인가의 여부는 아무래도 단편집 두어 권쯤 더 읽고 결정하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