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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여, 바다여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5
아이리스 머독 지음, 최옥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http://blog.naver.com/lebenswelt/220177890166
영국의 여류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의 장편소설 <The sea the sea> 완독. 이 독특한 분위기의 긴 소설을 어떻게 해야 간략하고 함축적인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듬뿍 담긴 로맨스 소설이지만, 환타지와 희비극의 연극적 요소 또한 고루 녹아있다. 전반부 중반부는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이나 템피스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1인칭 화자인 찰스 애로비는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영국의 저명한 연출가 겸 배우다. 한마디로 영국 연극계의 거물.
독신이지만 여러 여자들과 연애사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는 은퇴 뒤 잉글랜드 북부지역의 해변으로 전원생활을 즐기러 이사를 온다. 그러나 평화로운 전원 생활에 대한 소망은 처참히 깨어지고 마는데...소설은 이 해변의 집에서 이어지는 애로비의 사랑과 연애, 이별, 죽음 등의 연쇄 소동을 다룬다.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등장 인물들이 끝없이 등장하는데 다음 사건 혹은 다음 등장인물이 누굴까 한치도 예측할 수 없다. 이 예측 불가능성이야 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저자인 아이리스 머독은 명문 옥스퍼드에서 철학 교수를 지낸 전후 최고의 영국 여류 지식인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머독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에서 머독의 철학적 사유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사랑, 연애, 죽음, 종교, 선불교, 각종 신화 등에 대한 생각들이 시각화되어서 또는 등장인물의 글과 말 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개인적으로 철학의 관념적 사유보다 문학을 통해 구현되는 구체성에 더 끌리는 편이라 이런 부분들은 참 좋았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서는 그 관념성이 너무 짙어지고, 소설이 갑자기 환타지로 흐르면서 사건과 등장인물의 개연성이 뚝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막판 50여 페이지를 놔두고는 소설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졌다. 여기서 집중력은 독자로서의 나의 집중력이기도 하지만, 저자인 머독의 집중력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나다니, 이 소설은 재독 삼독의 가치가 있다. 여기저기 좋은 아포리즘이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이 간 인물은 귀엽고 열정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Lizzy였고, 많은 독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신비에 휩싸인, 합리성과 종교적 성찰을 두루 갖춘, 애로비의 사촌 제임스는 가장 궁금한 인물이었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까지도 그의 정체가 궁금하다. 주인공 찰스 애로비가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열정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그의 사촌 제임스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합리성, 조용한 종교적 성찰, 신비주의, 금욕, 등등. 그런 제임스를 애로비는 질투하고 시기하지만, 결국에는 죽을 뻔한 사건에서 제임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평생의 짝사랑이었던 하틀리를 마음속에서 놔주는 과정에서 제임스의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제임스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의 쌍둥이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결국 제임스의 죽음 뒤에서야 찾아오게 되는데...
이 소설은 머독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진다. 1919년생인 머독이 59세때인 1979년에 완성했고 이 소설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머독은 국내에 그리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영미권에서는 이름을 날린 유명한 작가였다. 로버트 갤브레이스(조앤 K. 롤링의 탐정소설 쓸 때 필명)가 영국의 문단을 배경으로 해서 쓴 탐정소설 <The Silkworm>에도 '지가 뭐 아이리스 머독이라도 되는 줄 알아'라는 식의 대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영국에서 `아이리스 머독' 하면 아직도 지적인 여류소설가의 대명사로 통하는 것 같다.
아이리스 머독은 말년에 치매를 앓다가 죽었다. 문학평론가이자 같은 작가인 남편의 시선에서 본 아이리스의 젊은 시절과 늘그막을 묘사한 동명의 영화 <아이리스>도 꼭 봐야겠다. 케이트 윈슬릿이 젊은 시절의 아이리스를, 007 시리즈의 여성 정보국장으로 유명한 주디 덴치가 늘그막의 아이리스로 분해서 열연했다고 하니 꼭 찾아봐야할 영화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