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들리 러블리 - 로맨스릴러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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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문제로 한동안 서평을 쓰지 못했고,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많이 느려졌다는 걸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꼭 <파리의 클로딘>의 도입부 같군! 나는 클로딘처럼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지만...) 감사하게도 황금가지 <데들리 러블리> 서평단에 당첨되어 다양하고 기발한 아홉 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데들리 러블리>에서는 예상치 못한 배경과 소재들이 등장하고, 작가들의 상상력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자유롭게 펼쳐진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것만 같다.

먼저 <휘파람을 불면>에 대하여 쓰자면, 이 소설은 현대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호랑이와 착호갑사의 후손이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이자 어떤 면에는 불구대천지의 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 두 존재는 (어쩌면 당연하게도)착호갑사가 호랑이를 추격하고 발견하여 마주하게 된다. 착호갑사는 호랑이에게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고, 호랑이는 이 제안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착호갑사에게 휘둘린다. 이 위태로운 동맹은 어떻게 끝을 맺을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착호갑사'와 '호랑이'라는 정체성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자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전자는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제외하겠다) 호랑이는 장난감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고양이과 동물, 전통설화 속 어수룩하고 순수하며 친근한 존재, 그리고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협적인 맹수라는 정체성을 작품 속에서 전부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단편 중에서 가장 길이가 긴 작품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의 인어>이다. 여성의 일방적인 짝사랑과 희생으로 끝을 맺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었고, '인어'라는 매혹적인 존재는 때로는 사람을 매혹하여 목숨을 앗아가는 존재로, 때로는 보호를 필요로 하는 아름다운 존재로 등장하며 수많은 창작자들의 영감이 된다.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인물인 '근위대장'이 등장한다. 근위대장은 허영에 넘쳐 인어에게 관심을 두지 않던 왕자와는 달리 말을 하지 못하는 인어를 똑똑한 이라 여겨주고 아픈 다리를 걱정해주던 인물이다. 왕자와 함께 자랐지만 근위대장이 되어 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근위대장은 인어와 사랑에 빠져 함께 달아나고자 한다. 둘은 왕자의 손아귀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의 인어>에서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결말 직전까지 철저하게 따른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와 그 차이가 있다. 다만 왕자는 인어가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영영 알지 못한 존재가 아닌, 사실을 알면서도 '왕자비'를 택하고 왕자 대신 '왕'이 되기를 열망한다. 디즈니판에서 '우르술라'가(사랑하는 멜리사 맥카시라니!) 변한 '왕자비'는 진실을 알면서도 왕자와 함께 '왕비'라는 신분을 탐한다. 무엇보다도, 인어가 다리를 얻는 과정은 '동경'이나 '사랑'에서 탈피하여 탄탄하고 설득력 있는 서사와 함께 전개되어 독자를 매혹시킨다. '인어'라는 소재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분이더라도 이 소설에는 충분히 마음을 붙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반려인 입장에서 <고양이 지옥>은 매우 흥미로웠다(강아지와 함께하는 반려인 분들도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끼실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는 주거지 근처의 개와 고양이는 인식칩을 이식받고 생명에 관한 권리를 보호받는 통칭 '동네 개, 마을 고양이 법'이 시행되는, 일종의 '유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당연하게도(반려인 입장에서는 슬프게도), 유토피아는 균열을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동물권을 존중하는 직장에서 마을 고양이의 매력을 소개하는 일을 하는 오윤주 주무관은 고양이들의 사망 사건을 조사하다 그 원인이 '부동액'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품은 드론을 이용해 부동액을 분사하여 고양이들을 고의로 살해하였다는 일종의 '살해 트릭'을 밝히고 전개되는데, 도무지 뚜렷한 동기를 찾을 수 없다(스포일러를 하자면, 고양이에게 화풀이를 하는 묻지마 범죄는 결코 아니다).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는 '탐정소설'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진정한 매력은 주인공 오윤주의 업무를 중심으로 탄탄히 구축된, 동물권이 중시되는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있다. 고양이들의 매력포인트를 소개하고 결연, 혹은 입양예정자가 있는 세계관은 소설 내의 뜻밖의 사건 외에는 더없이 사랑스럽다. 특히 '간식을 주지 마세요' 라는 수를 놓은 조끼를 입은 고양이 '뚱이'는 직접 만나보고 싶을 정도였다.

기묘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촘촘히 엮어 놓은 소설집인 <데들리 러블리>는 각 작가들의 독특한 상상력을 선보여주는, 아이스크림 같은 책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달콤함과 쌉쌀함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로맨스릴러'라는 독특한 장르 이외에는 이 책의 통통 튀는 매력을 정의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책의 단점을 굳이 지적해야 한다면, 이야기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모든 단편집의 특징이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는 sf, 동화, 로판과 같은 다양한 세계관을 다루고 있으니 새로운 장르를 찾아나서고 싶은 독자분들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책태기'에 처해 있는 독자분들께는 가장 적합한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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