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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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ould be bound in a nutshell, and count myself a king of infinite space, were it not that i have bad dreams.

hamlet, william shakespeare.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새와는 달리, 다윈과 니스는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거부한다(러너의 경우, 무력한 존재가 호두 안으로 회귀한다는 표현이 보다 적합할 것이다) - 신(1지구)은 자신을 거부할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은 대신 '호두'처럼 자신의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한다. 호두 안에 들어있는 것은 새롭게 지저귀는 생명이 아니므로, 호두가 깨지려면 호두알의 의사와 관계없는 바깥으로부터의 '강한 충격'이 요구된다. 이때, 호두는 단단한 껍질, 즉 기득권층의 안락함과 삶의 주도권을 남의 손에 내어주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자를 한 겹 더 뒤집어쓰고 끈을 잡기로 선택한다. 그들은 '비상' 대신 '머무름'을 택하면서 이전의 자신에게 종말을 고한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서울예술단의 동명의 창작가무극을 통해서 접하게 되었다 - 당시 다른 진로를 준비하느라 삼연 중 단 한 차례도 볼 수 없었던 게 혼자 너무 서러웠다(뒤늦게 접한 넘버(뮤지컬의 노래를 말한다)는 왜 그토록 아름다운지!). 박지리 작가님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처음 책으로 접했을 때는 누구든지 분량의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나처럼 이미 그 작품의 팬인 사람한테도 말이다. 이 책은 총 856페이지이다. 하지만, 다른 분들께 내가 쓴 후기는 다음과 같다: "저는 공연 못 보게 된 상황에서 거의 울면서 읽었어요 너무 재밌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 두꺼운 게 오히려 되게 반가웠던 책이었어요!"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두꺼운 책을 짊어지고 다닐 만한(이북을 선호하신다면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가치가 분명히 있다. 먼저, 청소년 소설이기 때문에 문장과 서사, 캐릭터 간의 관계 및 갈등이 명확하다. 두 번째로, 이 책은 하나의 사회 혹은 언뜻 등장하고 말 법한 조연이 가진 사소한 이면까지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인물의 서사는 주연인 '루미 헌터'외에도 조연인 '조이 헌터'의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그만큼 높은 몰입감과 완성도를 자랑한다.

이 책은 주로 1지구 아이들(예외적으로 2지구와 3지구 아이들까지)이 입학하는 '프라임 스쿨'을 배경으로 한다. 기숙사제 명문고라는 배경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이튼 스쿨'을 배경으로 하는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나 <모리스>처럼 말이다. 이 폐쇄적인 공간은 다윈의 '완벽성'과 '무지함', 사건의 발단, 레오가 아버지에 대하여 느끼는 양가 감정, 레오와 다윈과의 우정, 루미의 열등감, 그리고 다윈이 느끼는 죄책감과 불안감을 종합적으로 표현해낸다. 9지구가 가지는 삭막함과 황량함 또한 이 소설의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얻을 게 없어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곳은 다윈과 루미의 목숨을 내걸지 않고도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된다.

이 책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지극히 입체적이다. 대표적으로, 루미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영민한 소녀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삼촌의 죽음을 밝히는 데 집착하는 루미의 마음에는 가족애가 아닌 보다 높은 지위에 대한 욕망이 기저에 깔려 있으며, 특권 의식, 인정 욕구, 그리고 허영을 미처 감추지 못한다. 다윈의 틀에 짜맞춘 듯한 이상적임과 온화함, 모범적임 뒤에는 기득권층 특유의 '무지함'이 깃들어 있다. 니스와 다윈은 도덕 의식으로 인해 끝없이 갈등하고 앓아눕게 되나, 그들은 결국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못한다. 러너의 선택과 권위적인 행동에는 삶에 대한 욕구와 짙은 방어 기제가 깔려 있다.

다윈과 니스는 유사한 이유로 인하여 유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러너의 손자가 아닌 아들인 니스가 보다 면밀하게 사건을 처리해나가야 했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 니스는 러너와 실험을 한다는 명목 하에 니스의 특징을 지워버리는 데 성공하고, 같은 동기로 문교부 차관의 자리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다. 또한, 두 사람은 자신이 짊어진 죄로부터 영영 자유로울 수 없다. 니스는 30년 간 친구의 추도식을 열었고, 소설 내에서 수도 없이 스스로를 '살인자'라 지칭한다 - 이는 다윈에게 큰 충격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윈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심판하고자 하나, 아버지에 대한 사랑, 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허위성, 그리고 자신이 영위하는 특권(3세대인 다윈에게는 이제는 당연시되는 것들)은 그를 손쉽게 굴복시킨다.

다윈은 삼대에 걸쳐 내려오는 죄의 굴레를 끊어내고자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윈이 끊어내고자 하는 것은, 러너와 니스와 그가 느꼈던, '불안'이 본질인 '죄의식'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루미의 시점에서 비춰진 다윈은 초연한 모습의, 소년기를 지나쳐버린 존재로 등장한다. 분명 다윈은 니스와 다른 선택을 했다. 자신의 목을 손아귀에 쥐고 있던 친구를 고르고, 공포에 사로잡혀 '원죄'를 제대로 삭제하지 못한 니스와는 달리, 다윈은 사태를 완전히 간파하지 못한 친구를 고른 채(다른 이를 골랐다면 분명 윤리적인 문제가 뒤따랐을 것이지만...) '원죄'와 '불안'에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윈이 불안의 굴레를 자신의 대에서 완전히 끊어낸 것인지 영영 알 수 없게 되어버렸을 뿐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스토커stoker와 유사한 <다윈 영의 악의 기원>속 다윈은 '타락'보다는 '성장기'와 같은 당연한 수순을 밟아 나간다. 우리 역시 사회의 '추악함'과 스스로가 누리는, 혹은 누리지 못하는 '기득권'을 절감하며 어른이 된다. 다윈이 어른이 되고, 소년기가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이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단순히 '성장'이라는 모티프만 놓고 보자면, 소년으로 남은 레오와 훌쩍 어른으로 변모해버린 다윈 중 누가 정답을 쥐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간직하는 것과 탈피하는 것, 진실을 밝히는 것과 관용을 베푸는 것(혹은 싹을 잘라내는 것). 1지구와 프라임 스쿨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청소년 소설이라 단언하기에는 성인인 우리에게도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주는 박지리 작가님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제발 읽어주시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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