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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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고등학생용 여름방학 프로그램으로 서울대학교에 다니면서 역사학(입문 수준)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그리고 지금에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역사학'에 대한 역사학, 그리고 서양사학이었는데, 그때 고등학생들을 지도해 주신 교수님들은 대부분 파리에 유학을 다녀오신 분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중 하루, 한 교수님께서 자신들이 어떻게 박사학위를 땄는지 말씀해주신 적이 있었다. 프랑스 도서관에는 문서를 담아두는 종이 박스가 있고, 이를 꺼내면 당장이라도 먼지가 될 법한 종이 쪼가리들이 잔뜩 들어있는데, 이를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원하는 자료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강의를 듣고 난 후 나는 역사학을 반드시 전공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문학과지성사의 "채석장"시리즈를 <카프카의 아포리즘>, 그리고 사랑해 마지않는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을 통해 사랑하게 된 나는 채석장 시리즈의 전권을 사 모으게 되었다. 그 중 아를레트 파르주의 <아카이브 취향> 또한 도서관에 위치한, 정리되지 않은 고문서를 다루는 역사가의 나날을 그려낸 논픽션이자 인문 도서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금, <아카이브 취향>을 보면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크나큰 반가움과 조금의 후회(그 당시 원하는 대학과 과에 진학했지만, 특성상 서양사와 역사학에 대한 강의가 많지 않았고, 언제나 '조금만 더 열심히 할 걸'이란 마음은 남기 마련이다)를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사료 원문을 본다는 게 얼마나 큰 혜택이고 영광인지, 그리고 그것을 찾고 해독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전공자인 지금은 더욱 뼈저리게 안다. 그럼에도, 읽어내면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결과(기존의 가설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사료 해석은 꽤나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18세기 형사사건에 대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저자는 '날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저자가 조사하는 주제는 어떤 면에서는 장발장과 자베르를 떠올리게끔 만든다(앙졸라스와 가브로쉬는 실제로 역사학 논문에서 종종 상징적인 의미로 인용된다).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적인 민중들의 심리나 사상을 나타내는 말을 '망탈리테(멘탈리티)'라고 하는데, 이(심성사)와 '아날 학파'를 전공하고 싶었던 나는 이 책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느낌으로부터 어떤 나이브하면서도 농밀한 감각이 생각난다. 베일을 찢는 감각. 앎의 불투명함을 헤치고 나아가는 감각. 불확실했던 긴 여행을 거쳐 드디어 존재들과 사물들의 본질에 가닿는 감각.

흔적의 무수함 앞에서 작업자는 한편으로는 멈칫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료되어 다가간다.

그럼 있다 보세. 자네의 애인에게 나의 입맞춤을 저해달라는 안부 인사를 해본들 무슨 소용인가. 내가 입맞춤을 훔쳐내는 곳은 항상 턱이나 눈 아니면 뺨이지만 엉큼한 자네는 따로 챙긴 캉통canton이 있겠지. 뺨이나 눈에서 입맞춤 천 개를 훔쳐낸들 자네가 거기서 수확하는 입맞춤의 절반 값도 안 되는데. 입술 말일세. 제길.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입술인데. 그럼 있다 ㅂ세.

저자는 18세기 형사사건 자료는 (공문서이므로)일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는 측면을 강조한다. 일기의 경우 개인의 생각과 감정과 사상이 자유롭게(때로는 검열되어)표현된 반면, 형사사건 아카이브의 경우 연루된 자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저자가 얘기하는 '헝겊 편지'와 같은 지극히 사적인 기록은 때로는 학자를 감동시킬 만큼 로맨틱한 측면이 있다. 두 자료는 각각 이성적인 이유와 감성적인 이유로 기록되었다. 두 가지 이유는 분리되는 대신 오히려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된다. 이때, 이들과 같은 자료는 정말이지 '무수히 많고', 진실과 거짓을 그 당시의 맥락을 생각하면서 구분해 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자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항상 자료가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맞춤법이 제멋대로인 자료, 찢어지거나 악천후로 인해 망가진 자료도 '무슨 보물을 품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하나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연히 발견한 자료 중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또한, 이 책은 '아스날 도서관'과 같은 한 학자의 일상을 면밀하고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동일한 자리에 앉는 동일한 사람들. 버릇, 옷차림, 혹은 향수가 항상 같은 사서의 모습,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순간, 가장 좋은 자리, 짜증스럽고 미세한 소음, 패스를 요구받는 상황. 도서관에 다나는 사람이라면(나를 포함해서) 누구나 공감할 만한 도서관이 주는 안정성이자 매력을 저자는 매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카이브는 담론에 가려져 있던 것들을 엿볼 수 있는 곳, 규범적인 행동이나 정형화된 행동이 파기되면서 다양한 행동들, 의외의 행동들, 그야말로 틀을 벗어나는 행동들이 출현하는 곳인 만큼, 아카이브 작업자는 지배와 억압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개념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아카이브의 또 다른 이점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소수, 즉 '여성'에 대한 기록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카이브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 있다. 여성은 오히려 '과격하고 결연하게 언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일반적인 여성과 관련된 형사 사건 대신, 전혀 다른 입체적인 여성들(예를 들자면, 궁지에 몰린 남편을 구하기 위해 여성이 대신 직접 싸우거나, 징세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쇠스랑 등으로 무장하는 경우)이 문서에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고전문학 속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시대를 잠시 내려놓고 살펴보자면,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두 도시 이야기>의 '마담 드파르주'와는 유사할지 몰라도, <레 미제라블>의 '팡틴'과 '코제트'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왜 동일화는 위험한가. 동일화라는 거울 놀이는 비좁고 답답한 울타리 안에 들어앉은 채 상상력의 길, 사고력과 호기심의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동일화한다는 것은 자료를 마비시키는 동시에 자료를 이해하는 힘을 마비시킨다.

아카이브 취향은 아카이브에서 골라낸 하나에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 골라낸 것들을 하나로 엮고 싶은 마음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의 칼날, 사건의 칼날을 무디게 해서는 안 된다."

이때, 아카이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들에만 주목하기 위해(동일화identification) 함부로 다른 자료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경고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참혹한 사건들에 대하여 '진지한 태도로 임할 것'을 강조한다. 저자는 역사가 실제 사건들을 순서대로 배치하는 일이라고 할 경우, 이가 반드시 '진실'이라는 확고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말하고 있다. 즉,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자 반드시 잊혀져서는 안 될 사건의 '실재성'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거될 수 없다.

저자는 18세기를 "공론의 필요성에 관한 활발한 논쟁에서는 계몽된 집단의 여론을 인정했을 뿐, 대중의 여론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서술하며 18세기 형사사건 아카이브의 한계점, 즉 대중이 공적인 사안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막는 지배층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비밀경찰 일지 아카이브에 따르면, 지배층은 끊임없이 대중의 여론을 살피고 조사한다. 즉, 더 이상 지배층은 대중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 저자는 '지배층 위주의 역사적 관점으루부터 탈피할 것'을 주장한다.

역사를 써야 하는 이유는 죽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과거를 이야기할 어법을 찾아내 "살아 있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아카이브 취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과거와 현재와의 소통은 끊임없이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고 있으며,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과거는 하나의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굴레 안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기도 하며, 이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끔 만들기도 한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억과 생각과 감정 또한 미래의 누군가가 절실히 찾는 메세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즐거워진다. <아카이브 취향>을 통하여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당시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그리고 그 애에게 조금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전공한 역사학과 관련된 <아카이브 취향>뿐만 아니라, 문학과지성사의 "채석장"시리즈는 우리의 생각을 순식간에 뒤흔들어놓을 정도로 멋진 글들로 가득하다. 역사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 18세기 문학이나 도서관을 사랑하시는 분들, 그리고 여전히 격동기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시대가 주는 좌절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카이브 취향>은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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