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사람들 서문문고 52
알베르까뮈 지음 / 서문당 / 197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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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 사랑이여! 오 삶이여! 삶보다 죽음 속의 사랑을!"(로미오와 줄리엣, 4막 5장)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이것이야말로 <정의의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비극적인 측면이라 생각한다) 희곡 <정의의 사람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실제로 sns에 남긴 글은 다음과 같다: 카뮈! 카뮈하면 역시 <정의의 사람들>입니다 제발 읽어주세요 제가 이렇게 빌게요 진짜로) 너무 아껴서 잘 펼쳐볼 수 없게 된 책이 있다면, 내게는 <레 미제라블>과 <정의의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 정말 아끼는 지인분께 추천을 받아서 n년 전에 접하게 된 이 희극은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부조리와 비극에 부딪치는 과정을 다루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내 마음이 그대를 그리던 고요한 곳에서......'

'영원한 여름을 숨쉬었노라......'

두 혁명가인 스테판과 카리아예브(야네크)는 동일한 신념과 당으로 묶여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성향이 다르다. 혁명에 온 영혼을 투신한 스테판은 삶의 다른 측면을 포기하지 않는 카리아예브를 신뢰하지 않는다. 카리아예브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스테판의 적대적인 시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첫 번째 거사는 카리아예브의 망설임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만다. 폭탄을 던질 마차 안에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의 마차 속에 두 아이들, 대공의 조카와 조카딸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혁명가들은 동요하고, 갈등은 극심하게 고조된다.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하여 무고한 어린아이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과연 마땅한가, 다르게 말하자면, '정의'로운가.

"명예란, 마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용어요."

"아니오. 차라리 그것은 가난뱅이가 지니고 있는 최후의 재산이지요."

'어린아이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져야 하는가'라는 화두에 대하여 혁명가들의 의견은 찬성과 반대로 갈리게 된다. '대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쟁취하기 위해 폭탄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테판은 일종의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즉, 두 아이의 목숨을 희생시켜 몇천 명의 아이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오히려 '평화로운 죽음(폭탄으로 인한 즉사)'을 선사하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이다. 스테판은 야네크의 망설임은 체포의 위험을 높일 것이라며 크게 화를 낸다. 카리아예브는 자신의 망설임을 부끄러워하지만, '무고한'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어떤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도라 역시 카리아예브의 주장에 동의한다. 카리아예브는 혁명은 삶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고 말하며,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희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설파한다.

"천만에, 영원한 겨울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녜요. 정의의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의 정열이 있요. (돌아서며) 온 정의의 사람들은 가엾어라!"

<정의의 사람들>에는 두 사람 외에도 다양한 양상의 혁명가가 등장한다. 과거를 후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수장 아넨코프, 아름다움과 기쁨을 찬미하는 시인 카리아예브, 동지에 대한 사랑을 끝네 감추지 못한 도라, 대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불사하고자 하는 스테판, 그리고 죽음이 두렵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바노브까지. 혁명가들의 '캐릭터성'은 결국 거사를 성공한 자가 스테판이나 아넨코프가 아니라 카리아예브가 되면서, 스테판이 카리아예브의 경건함을 믿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입체적으로 뒤바뀌고 정교해진다.

<제 4막>에 접어들면서, <정의의 사람들>은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카리아예브와 그를 찾아온 '태공비' 간의 갈등으로 그 양상이 뒤바뀐다. 태공비가 바라보는 태공과 카리아예브 및 당원들이 바라보는 태공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당원들에게 태공은 전제주의와 부정의의 상징일 뿐이나, 태공비에게 그는 '낮잠을 자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태공비는 카리아예브의 살인을 용서하고 이해함으로써 남은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바라보는 대상은 전혀 다르므로, 태공비와 카리아예브는, 비록 상대방의 말을 듣고 괴로움을 느끼더라도,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폭력에 대한 인간의 항의에 견줄 수 있게 된다면 죽음이 사상의 순수함으로써 나의 일을 영예롭게 하기를!'

"아냐, 앞으로 가야지. 사람은 걸음을 멈추려고 해. 앞으로! 앞으로! 사람은 가끔 두 팔을 벌리고, 될 대로 내버려 두려고 해. 그러니 그 더러운 부정의가 우리의 몸에서 안 떨어지지. 앞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도 더 위대하도록 선고를 받았어."

"그는 가끔 공연히 웃었어요. 참 젊기도 했지! 그는 지금 웃어야 해요. 땅에 얼굴을 대고!"

개인적으로 <정의의 사람들> 중 가장 좋아하는 파트는 <제 5막>이다. 당원들은 다시 모여 카리아예브의 죽음을 예견하고, 증언하고, 슬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일상적이고 무의미해 보일 정도로 순식간에 집행된 카리아예브의 사형은 카뮈와 당원들의 지극히 아름다운 언어로 재구성된다. 카리아예브가 가진 '정의'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의 삶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도라의 절절한 마음은 마지막 파트인 <제 5막>에 이르러 비극적으로 터져나온다. 혁명가 중 '사랑'을 가장 중시하는 인물인 도라는 어린아이와 '현재'를 살려내는 데 성공한 카리아예브의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다가올 미래가 '장밋빛'이 아닐 경우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도라는 폭탄을 던질 것을, 카리아예브와 같은 '죽음'을 맞이할 것을 결심한다. '정의의 사람들'이 되는 것은 얼마나 큰 값어치를 필요로 하던가. 짧게 반짝이던 삶에 대한 사랑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은 크나큰 슬픔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눈물을 흘리며 그 길을 택하는 카리아예브와 도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카뮈는 역설적이게도 목숨을 내던지는 혁명가를 통해서 삶과 현재의 값어치를 설파한다.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은 당시, 그리고 이전 시대의 혁명가들이 한 번쯤은 목도했을 만한 딜레마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들로도 가득하다. 또한, 이 희극은 미래에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만드는 극이기도 하다. 카뮈의 작품과 부조리극, 연극, 그리고 노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과 반드시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극을 떠올릴 때면 생각한다. 왜 슬픔은 이다지도 아름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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