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기 비상시대 -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내 아버지는 낙타를 탔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타고, 아들의 아들은 낙타를 탈 것이다.” - 현대에 만들어진 사우디 속담.
아기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다. 3년전, ‘인간 없는 세상’을 읽고 처음 고민했었다. ‘장기 비상시대(The Long Emergency)’를 읽고 같은 고민을 다시 하게 된다. 공교롭게 두 책을 한국에 소개한 사람은 같은 인물이다. 아기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 자식에겐 무엇을 가르치며 어떤 가치를 전해줄 수 있을까. 아이가 마주할 4대강의 현실 앞에서 아빠는 그 때 뭐했었냐고 물으면 뭐라 답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험난한 세상에 아빠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낳았느냐고 되묻는다면 무어라 답할까. 태어나지도 않은 이에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 글을 쓰는 새벽, 눈시울이 붉어진다. 밤이 깊어 감상에 젖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책을 닫고서 한동안 차분하게 아니, 침전하듯 착잡하게 가만히 있었다.
‘인간 없는 세상’은 일순간 인간이 없어진다는 가정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장기 비상시대’는 우리가 실제 맞닥뜨릴 처절한 현실을 하나하나 짓눌러 ‘설명’함으로써 객관적인 절망을 마주하게 한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다” - 카를 융.
어떠한 대체물도 석유의 고갈을 메워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저자의 견해는 외면하고 싶지만, 화석연료가 아닌 다른 에너지원은 그 자체가 화석연료의 경제를 기반으로 한다는 가장 상식적이고 기초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풍력발전기의 금속 터빈은 풍력에너지 기술로는 만들어낼 수 없고, 태양광 발전 시스템에 들어가는 납축전지는 기존의 어떤 태양광발전 시스템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다. ‘녹색혁명’이라 불리는 농업의 획기적인 생산 증가도 결국 석유화학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얘기는 우리들 일곱 명중 대여섯 명은 석유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고 지금껏 살아가고 있다는 섬뜩한 진실로 우리를 인도한다.
앞으로의 경제는 갈수록 지역화되고 그 규모가 축소된다고 한다. 세계화되는 경제구조는 석유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식량이 가장 긴급한 문제가 되며, 농업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란다. 따라서 일하는 가축도 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는데, 미국에서 말의 숫자가 가장 많았던 때가 불과 1915년이었다는 게 의외였다. 헨리 포드가 T모델 자동차 조립 라인 방식을 도입한 지 2년 뒤였다는 점, 그 뒤로 급격하게 줄었었다는 점은 우리의 날들이 기나긴 지질시대에서 유별난 한두 세기였음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
장기 비상시대의 사상이나 규범에 대한 언급도 인상적이다. 우리들은 지금의 사상이 가장 발전된 것이며, 우리의 태도가 가장 섬세하고 진보적이라고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의 사상은 특정한 상황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 문제는 지난 두 세기 동안의 물질적 진보가 인간의 본성도 발전시켰다고 믿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본성 자체의 한계를,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결국 죽기 마련이라는 것을 예민하게 의식할 것이라고 한다. 여러 부정적인 전망이 많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 있다고 한다. 공동체적인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 친근하게 어울려 일하며, 의미 있는 사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디서 이리로 왔는지는 알 수 있다.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게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렇게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우리가 바라는 것과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구분해야 한다. 별로 의욕도 없고 바라는 게 없다 한들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 머지 않아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것이 될 터이다. 이런 유의 책을 한두 권 읽은 것도 아닌데 책이 새삼스럽고, 개전의 정(!)이 부족한 것은 예수를 따라 살기로 해놓고선 토해냄을 당할 지도 모르고 여전히 미적지근한 나의 또 다른 단면이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정신과를 전공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래를 긍정하기 힘든 내가 소아과에 관심을 두는 것이 혹여 그런 꼴은 아닌지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은 공중보건의 기간 동안에는 어디서 이리로 왔는지에 좀더 주목하며 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갈 것이다.
2011년 가을, <장기 비상시대>를 읽고 일교차만큼이나 감상에 젖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