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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성장의 사례 ㅣ 이음 희곡선
강현주 지음 / 이음 / 2023년 8월
평점 :
이 책은 ‘성장’에 관한 책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발전이나 성공이 아니라,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의 서로 다른 성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음 희곡선이며 강현주가 집필한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실 사전제작활동 지원을 통해 쓰인 대본을 책으로 엮은 희곡입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다음의 대사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키우잖아. 어떻게든 분류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게 인간의 습성인데. 다양하게 살 수도 없고, 또 그 꼴을 못보지.”
이 대사는 작품 속에서 식물과 인간을 대비하는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식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구절에 앞서 인범이라는 인물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근데 사람한테는 안 그러잖아요. ‘식물은 이렇게 다양하구나. 와-’ 감탄하고, ‘기록하고 보존하자.’ 왜 사람한테는 안 그러는 거예요?”
왜 인간은 식물을 바라보듯 서로를 관찰하고 존중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위의 대사라고 느껴졌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한 이 말은, 제가 타인을 쉽게 분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다양하게 살고 싶으면서도 결국 평범함을 선택했던 기억 또한 함께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식물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조금 더 평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혜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더욱 선명해집니다. 혜경은 응용생명과학부 박사과정 연구원으로, 연구실 초창기 멤버입니다. 연구에 몰두하지만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지는 않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와 관련된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과 깊은 소통을 피하고, 자신의 과거를 여전히 아프게 기억하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작품에는 아기장대라는 식물이 등장합니다. 혜경은 아기장대에게 고염 스트레스를 주는 실험을 진행하는데, 어떤 개체는 크게 자라고 어떤 개체는 작게 자랍니다. 작게 자란 개체들은 저항성 유전자가 파괴된 돌연변이로, 연구 대상이 됩니다. 반면 스트레스를 받아도 너무 잘 자란 아기장대는 연구에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실패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혜경은 그 아기장대들을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이 장면은 혜경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과 닮아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아픈 과거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존재, 노력했고 견뎌냈지만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혜경이 아기장대를 버리는 모습은 연구자의 냉정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혜경 곁에는 도윤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도윤은 종자원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자 혜경의 동기이며, ‘유미’라는 이름으로 식물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혜경의 과거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 과거를 집요하게 캐묻지 않습니다. 대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곁에 머뭅니다. 밝은 에너지를 지닌 도윤은 혜경에게 무엇을 바꾸라고 말하지도, 억지로 이해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그저 계속 따뜻한 햇빛처럼 곁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저에게 여러 가지 성장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비옥한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한 존재,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존재, 그리고 그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성장을 겪었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신기하게 느껴지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들도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이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 책을 읽으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거나 주제넘게 공감하기보다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강낭콩을 키우는 숙제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을 주고 작은 새싹이 올라왔을 때 ‘생명의 탄생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나이에 생명이 무엇인지 알았을 리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들인 노력이 눈으로 보였기에 기뻤고, 그 강낭콩이 기특했습니다. 무럭무럭 자라 콩이 열렸을 때, 그것은 식물이 아니라 저의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특별한 소통을 하지 않아도 저는 그 성장을 도왔고, 그저 바라봤을 뿐이지만 충분히 좋고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저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부족해 보이면 물을 주되 원하는 만큼 주고, 햇볕이 잘 들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말할 수 없는 속을 억지로 들여다보기보다, 제가 성장하면서 필요로 했던 것들을 넌지시 건네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그 새싹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 속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아기장대와 혜경처럼, 그 과정은 누구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윤과 같은 인물이 계속 따스한 햇빛을 비춰준다면, 그 존재는 조금 더 비옥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은 그렇게, 성장의 조건에 대해 조용히 질문을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