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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줄이고 농촌을 살려라 - 변산농부 윤구병과의 대화 ㅣ 이슈북 4
윤구병.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노동시간 줄이고 농촌을 살려라 : 변산농부 윤구병과의 대화>, 윤구병/손석춘 지음
윤구병 선생은 예전에 <보리 국어사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후 우리 아이들 책을 고르다가, 보리에서 나온 계절 그림책 내용이 좋아서 사면서 다시 이름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짧은 인터뷰집이다.
실제 주고받은 대화를 옮겨서 문장의 호흡이 짧고, 구어체적이지만, 제대로 그 의미와 행간을 이해하려면 내공이 좀 필요하다.
일단 일독했는데, 현재로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공자의 '정명正名'에 대해서 '말길을 바로잡겠다'라고 해석하는 대목.
지금 우리말이 계속해서 없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말들, 꼭 삶에 필요한 말들이 전부 없어지고 힘 있는 나라들의 말이 득세하고 있어요.
세 나라 시대(삼국시대)부터 힘 있는 사람들이 더 힘 있는 중국에서 말을 들여와 우리말 질서를 다 흩뜨려놓고 우리의, 섞임이 없는 정말 쉽고 소중한 말들을 다 없애는 데 큰 몫을 했잖습니까?
흑석동이나 현석동 같은 말을 들을 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게 있어요? 하나도 없잖아요. 우리말로 감은 돌이라고 부르면 물이 감아 도는 모습이 떠오르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먹물들이 토박이말을 한자말로 바꾸면서 상상력을 다 죽여버린 거에요. 힘센 나라, 힘센 말들을 들여와서는 우리 상상력을 전부 죽이고 구체성을 없애버린 거란 말이죠.
'말길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세 살배기 애도 알아듣는 말, 시골의 까막눈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알아듣는 말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겁니다. 구체성이 있고 우리의 상상력과 창조성이 드러날 수 있는 쉬운 말을 써야 해요. 그렇게 말이 민주화돼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정치가 민주화되고 경제가 민주화될 수 있습니다.
교육의 궁극 목표라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사람도 생명체니까, 살아야 하니까,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것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거에요. 의식주 문제를 머리 굴려서 해결하지 못하잖습니까. 몸 놀리고 손발 놀려야 해결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몸 놀리고 손발 놀리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농사짓는 사람이고, 호주에서 소 키우는 사람이고, 이 사람들 것을 어떻게 하면 머리 굴려서 뺏어 먹을까, 그 궁리만 시키잖아요.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스스로 몸 놀리고 손발 놀려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의 궁극 목표인데.
그리고 사람은 혼자 살아남을 수 없잖아요. ... 사람은 저마다 도와서 부족한 것을 나누면서 살아야 하는데, 한 가정이 기초단위라고 하지만 한 가정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길은 아무것도 없어요. 적어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공동체가 이루어져야 여러가지 나눌 수 있는 길이 생기는데, 서로 도와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합니다.
다만 균형이 깨져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옛날에는 아홉 사람, 열 사람이 땀 흘려 일해서 한 사람을 먹여 살려야 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땀 흘려서 열 사람, 스무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러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후손들에게 살길을 열어주려면 머리 쓰는 시간을 하루에 세 시간 이하로 줄여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정치의 주체이자 경제의 주체이자 문화의 주체이자 예술의 주체입니다. ... 하루 두 시간, 세 시간만 머리 쓰게 하고 나머지는 몸 놀리고 손발 놀리는 시간으로 돌려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초.중.고등학교는 방학을 넉 달로 늘리고 작금의 대학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의 어조는 진지했다.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가서 그곳에서 인생을 배워야 한다는 논리는 '변산농부'의 사고에 일관되게 흐른다.
어떻게 보면, 급진적이기도 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촌뜨기 같기도 하지만...
뭔가 울림이 있다.
정치를 말글살이와 연결짓는 것도 굉장히 독특한 직관이 번뜩인다.
책상물림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며, 현실에 뿌리박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신선하다.
생각이 딱딱한 우리나라에 이런 분이 있다는 게 신기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