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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안에서 <해방일보>의 문예 특집 편집자로 근무했었던 저우리보는 1946년 공산당에 의해 토지개혁을 위한 농촌 선동 임무를 맡아 만주로 파견되었다. 명령을 받은 저우리보와 그를 따르는 공작원들은 곧바로 하얼빈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쑹화 강 근처의 위안바오라는 마을로 내려갔지만 당시 대다수의 만주 주민들은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을 지지했으며 공산당원이었던 한후이의 회고에 따르면 위안바오에 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등 공산당 지지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저우리보는 마을 주민들을 지주, 부농, 소작농, 육체노동자 등의 계급으로 나누었다. 이때 그는 마을 대표인 한라오류를 악이자 지주 계급으로 설정했는데 정작 위안바오 마을에는 지주가 없었으며 한라오류도 현청 소재지에 거주하는 지주를 대신해서 소작료를 거두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딱히 다른 농민보다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실제로 마을의 어떤 주민도 한라오류에게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저우리보와 공산당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소작농과 육체노동자로 분류된 주민들의 증오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노동력을 착취해온 부자들이 있다고 설득했으며 성토대회를 열어서 참가자들의 불만을 털어놓도록 시켰다. 이때 몇몇 사람들은 진심으로 오랫동안 담아두던 불만을 드러냈고 어떤 이들은 하는 수 없이 부유한 주민에 대한 불만을 급조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공산당원들은 가진 자들의 과거 악행을 돈으로 환산하고 주민들에게 보상을 요구하도록 종용하며 계급 간의 갈등을 부채질했다.


여러 주 동안 진행된 세뇌 작업으로 마침내 혁명을 위해서 가족이나 우정도 버릴 수 있는 광신적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수개월 후에는 소작농들과 육체노동자들 같이 공산당원들에게 세뇌된 자들이 마을 지도자들을 적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던 마을은 파탄나기 시작했으며 공산당 추종자들은 총과 창, 몽둥이, 괭이로 무장하고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여나갔다.


희생자들은 지주나 반역자로 몰렸으며 사람들은 각자의 출신 계급을 표시하는 천을 부착하고 다녀야만 했다. 지주 계급과 부농 계급으로 몰린 자들은 공산당 추종자들에 의헤 비판 대회에 끌려나와서 모욕과 폭행, 고문 등을 당한 뒤 살해당했다. 이로써 마을은 광기에 휩싸였고 그나마 정상인 주민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거나 탈출해버렸다.


위안바오 마을 사건 이후로도 토지개혁 과정에서의 학살 사례들은 중국 전체에 벌어졌다. 1947년 이후, 만주 전역에서 패배한 국민당군이 계속 후퇴를 거듭하자 자연스럽게 '해방구'라고 불리는 공산당 점령지가 늘게 되었고 이런 일들이 그곳에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소련 비밀경찰과 함께 일한 경력이 있던 캉성이 토지개혁을 담당하던 산시성이 가장 폭력적이었다고 알려져있다.


1947년 산시 성의 토지개혁을 담당하던 캉성은 모든 마을 주민들에게 태도를 분명하게 취하게 강요하면서 계급투쟁을 선동했다. 이 시기에 하오자포라는 촌락에서는 농부들이 지주를 깨진 벽돌 위에 무릎을 꿇리는 모습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희생자들은 이어서 매질과 침세례를 당하고 배설물 테러를 당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도 국민당 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중산층 농민들까지도 폭행과 고문을 자행하며 재산을 강탈하고 지주 계급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공산당 협력자들도 숙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공산당군에게 양곡과 옷, 돈을 기증하던 뉴유란이라는 남성은 1947년 9월에 5천명의 마을 주민들이 지켜보는 단상으로 끌려왔다. 그의 콧구멍에는 철사줄이 꿰어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그의 아들에게 뉴유란을 소처럼 끌어보라고 시키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 후 뉴유란은 뜨겁게 달군 쇠로 낙인이 찍힌 뒤 동굴에 갇혀서 사망했다. 1948년 1월, 시중쉰이 마오쩌둥에게 한 보고에 따르면 사람을 소금물에 담긴 통 속에 처박아 익사시키거나 머리에 끓는 기름을 부어서 튀겨죽였다.


허베이 성에서 류사오치가 한 보고에는 "민중들은 폭행과 고문, 살인을 서슴치 않으며 통제불능"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아예 사람들은 생매장 되거나 육시를 당하거나 시체는 나무에 매달아 토막내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폭력이 확산된 이유로는 말 그대로 민중들이 하고 싶은대로 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학살이 벌어질 때마다 민중들은 희생자의 재산을 강탈해갔으며 이 시기에만 토지개혁으로 대략 50만명에서 100만명이 죽어나갔다.


1950년대 초반에도 농촌정책으로 인한 학살을 계속되었다. 이때 화남 지역에서는 20~60% 수치의 양곡이 강제 징발되었는데 쓰촨 성에서는 농민들이 곡식을 안넘겨주는 경우에는 폭행을 당하거나 눈에 연기를 불어넣고 억지로 코에 알콜을 들이붓는 고문이 이뤄졌다. 고위 간부들의 보고서에는 임산부들이 가혹한 폭행을 당하다가 유산을 당하기도 했다고 나오며 세금 징수원을 피해 일가족이 독약으로 자살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매우 빈곤해졌다. 사람들이 힘들게 자수성가와 노력으로 얻은 재산들은 금새 증발해버렸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똑똑한 사람들은 민중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화북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량이 3분의 1이 감소했으며 중국에서 가장 부유했던 쓰촨 성도 소작농에게 분배된 토지들은 이전보다 생산성이 감소했다. 더 나아가 토지에 대한 권리도 모호해지면서 주민들은 지주들로부터 압수된 재산을 소유했음에도 자기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두려움과 탐욕, 시샘 때문에 가열된 학살에서 정작 남들보다 더 많이 생산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에 의해 분배된 땅은 엄청 적었고 그마저도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었다. 또한 땅을 경작하는데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와 종자, 비료도 부족해졌으며 상점들과 기업들은 약탈당하는 바람에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텅 비게 되었다.


1951년 말까지 약 1000만명이 넘는 지주나 부농들의 재산은 몰수당했고 40%가 넘는 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는 중국 공산당의 검열로 인해서 아직 제대로 공개된 바가 없지만 1947년과 1952년 사이에만 150~200만명이 넘는 숫자가 죽어갔고 사망자들 외에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으로 몰려서 수백만명의 인생도 망가지고 말았다.

- 프랑크 디쾨터, <해방의 비극: 1945~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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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사령장관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한 이유 중 하나는 하와이 점령을 위한 발판 마련이었다. 또한 존 스테판의 <Hawaii under the Rising Sun>에서도 일본군은 예전부터 하와이 침공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1942년 9월까지도 하와이에 대한 상륙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만약 일본군이 미드웨이를 점령했다면 하와이까지 진출하는게 가능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예측 가능한 조건 하에서는 당시 일본군은 절대 하와이를 점령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먼저 막강했던 미군의 하와이 방어 전력을 봐야 한다.



1942년 4월 하와이 주둔 미군 지상병력은 6만명이 넘었고 육군항공대는 8,900명이었다. 거기다가 미 육군은 빠른 시일 내 육군 지상군과 항공대 규모를 11만 5,000명까지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참고로 이 수치는 해군 전력은 제외한 결과이다. 대부분의 병력은 오아후 섬에 주둔했는데 이 섬은 기동방어전을 펼치기에 좋은 지형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하와이를 점령하는데 필요한 전력을 3개 사단에 4만 5,000명이라고 보고 있었는데 이건 턱 없이 적은 병력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군은 7,000km가 넘는 곳을 가로질러 이 규모의 병력을 수송할 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고 설령 어찌 저찌해서 섬을 점령한다고 해도 워낙 본토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라 보급을 충분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 해서 수송 선단을 확보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일본군은 미군의 방어를 뚫고 상륙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군에게는 상륙작전 지원에 필요한 함포 사격이나 항공지원에 대한 교리가 없었고 오아후 섬의 크기와 미군 방어선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우회기동은 불가능하기에 정면 공격만 가능했다. 당연히 과달카날의 사례처럼 저 상황에서 정면 돌격했다간 바로 박살날테니 성공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다.



더욱이 일본군은 항공모함들로만 하와이의 제공권을 얻어야 했다. 약 2,000km나 떨어진 미드웨이에서 하와이 상륙 작전을 지원하는 일은 말도 안되니 말이다. 거기다 일본군 기동부대는 전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도 수주일 동안 적대수역에서 전투를 하며 적을 굴복시킬 수준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942년 4월 하와이에는 275기의 작전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또 새러토가와 와스프가 작전기들을 추가로 수송해올테니 일본군은 항공모함 6척을 죄다 끌고 왔어도 하와이 주둔 미군기와 비슷한 수의 비행기들을 가지고 전투를 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와이 해역에서 항공모함들이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보급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1941년 12월 이후 일본군 점령지들에 공업지대가 전무하다는 부분도 눈여겨 볼 만하다. 당장 독일만 하더라도 체코슬로바키아 공업지대와 프랑스 파리, 생나제르 조선소, 루마니아의 유전지대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태평양 지대에서 구축함 이상의 군함을 만들 수 있는 조선소가 없었다. 규슈 이남의 일본군 점령지 중 쓸 만한 드라이독은 기껏해야 싱가포르 정도가 전부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획득한 자원들도 일본으로 싣고 가야만 완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거기다가 일본 본토의 공업지대는 1930년의 군비 확장 기간 동안 생산한계점에 도달해 있었고 생산잠재력이 충분한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단기간 내 설비를 확충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무리하게 확장했던 남태평양 지역은 자원 획득 관점에서 불모지였다.


출처: 조너선 파셜,앤서니 털리,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일조각, 2019, p60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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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3-0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만 기습 공격에서 항공모함과 유류저장소를 파괴하지 못한게 일본군의 패착이었다 봅니다. 최근에 본 영화 미드웨이에도 잘 나오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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